아, 다음 카페에 올리시는거요... 저야 뭐, 좋을 뿐이죠. 올리셔도 상관없습니다.^^ 어떤 작가님들은 너무 많이 올라가는 걸 안 좋아한다고도 하시지만... 글쎄요, 제가 아직 초보라서 그런가? 많은 사람이 제 글을 읽어준다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은데 말이죠. ^^ 혹(眩) - 아찔하다 마음속의 외침 - 스스로에 대한 객관적 관찰(금선유 편) 내 이름은 금선유. 고울 선(嬋)과 선비 유(儒) - 고운 마음을 가진 곧고 바른 선비처럼 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 중 한 글자에도 충실하지 못한 다. 그다지 마음이 쓰이는 것은 아니다. 내 성격이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걸 어쩌겠냐는 말이 다. 30대줄에 들어서 그런대로 철이 든다면 이름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이루고 있는 첫번째,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고유명사이며 나의 사회적 존재를 확인 시켜주는 예인 이름을 설명하였으니 그 다음은 나를 이루고 있는, 다른 이가 의식하는 나의 신체적 조건에 대해 설명해야할까. 키는 176, 몸무게는 58이다. 키야 뭐, 친구들이 전부 180줄이라 더 컸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우리나라 평균치에 도달한 것으로도 그럭저럭 만족한다. 몸무게는... 평균보다 적은 편이다. 어찌된 일인지 나는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것이다. 물론 원래 식 탐이 없기도 하다. 조금만 먹으면 질리는걸 어쩌란 말인가. 여성들이 듣는다면 정말 싸 가지 만땅이라 하겠지만, 남자의 입장에서 마른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신체조건이 아니 다. 근육도 잘 안 생기고, 괜한 시비에 휘말리기도 한다. 나도 이 신체조건 탓으로 상당 히 많이 시비를 받았다. 물론 배로 갚아주었지만. 나는 착한 인간이 못된다. 피부는 남들보다 하얀 편이다. 아니, 동양인으로서는 갖기 힘든 피부이다. 그 이유는 나 의 어머니 마리아 루치안 로프치예스키 때문이며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다시피 우리 어 머니는 외국인 -러시아인-이셨다. 고로 나는 혼혈인 것이다. 혼혈인 것에 구얘받냐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어렸을 때는 위화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이제는 포기해서 아무래 도 상관없다는 식이다. 내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흰 피부와 깊고 푸른 눈동자이다. 사람들이 '시베리 안 허스키'라 부르는... 늑대인지, 개인지, 아니면 늑대개인지가 가지고 있는 짙은 푸 른 눈동자로, 내가 신체부위중 유일하게 마음에 들어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거리 를 다니다 보면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되기 때문에 상당히 귀찮은 편이다. 다행히 머리카 락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검은 머리이다. 그럭저럭, 보통의 사내아이가 되는 것이 다. 다만 문제되는 점은 부모님이 초등학교 6학년때 항공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것과, 그 후로 고모님 댁에 신세를 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 그렇다고 해서 혼자 착각하지 말기 바란다. 현실은 소설이 아니다. 나는 구박받는다 거나 매를 맞는 따위의 취급은 받지 않는다. 물론 구박따위를 주면 주는대로 받을 나도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착한 인간이 아니다. 고모와 고모부는 인격자이고, 집안형 편은 매우 좋으며(물론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산도 상당했다) 사촌형제와는 마음이 매우 잘 맞는 편이다. "..유야.." "...." "금선유!!!" 돌아보니 단영이다. 그는 현재 내가 재학중인 선화예술고등학교의 친구로 같은 미술부이 다. 나는 미술을 전공하고 있는데, 그림그리다-라는 행위는 상당히 나의 마음을 끈다. 대학교도 가능하면 미술과로 진학하고 싶다. "왜?"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냐? 집에 가자. 얘들은 벌써 다 나갔다구." 서단영. 그는 나보다 키가 5센티정도 크고 남자답게 생겼다. 엄밀히 말하자면 잘 생긴 편으로, 화술도 뛰어나고 매너도 좋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가 있다. 나와도 상당 히 마음이 맞는 편이다. 오늘은... 바람이 분다. 나는 바람을 매우 좋아한다.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았을지도 모른다. 나의 아버지 는 방랑벽이 있는 분이셨다고 하는데, 상당히 심하셨다고 한다. 어느날 갑자기 훌쩍 여 행을 떠나, 도착지에서 거는 전화를 받은 적도 여러번이었다고 한다. 아마 나의 어머니 도 러시아로 여행을 갔다가 만났을 것이다. 언젠가... 나도 여행을 떠나고 싶다. 아니,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나도 꽤나 방랑벽이 있 는 것 같다. 화구와 부모님의 사진, 하얀 남방을 가지고 떠나고 싶다. 아프리카 초원, 드넓은 대지, 사막의 밤, 역사의 흔적... 단순히 본 것이 아닌 느낀 것을 화폭에 담아내 고 싶다. 그것이 현재 나의 꿈이다. 현재시각 02:25(am) 이미 잠들어도 함창 잠들어있을 시간이다. 나는 그다지 건강한 편이 아닌데(이것은 내 가 애석히 생각하는 유일한 것이다) 저혈압과 약간의 기관지염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 로 저녁에 자 두지 않으면 아침에 고생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깨어서 이 어두운 거실을 지키고 있냐면, 그것은 나의 잘게 빻아 부셔서 갈아먹어도 시원치않을 빌어먹을 동갑내기 사촌, 이민재군 때문이다. 5시에 학교에서 귀가하자마자 고모의 강압으로 무슨무슨 비타민제니, 심해상어에서 축출 한 무엇이니, 로열제리니를 잔뜩 먹어야 했다. 몇일동안 기온이 급변한다 싶더니 감기 에 걸려버린 것이다. 다행히 목감기로 그칠 것 같지만, 덕분에 고모의 온갖 잔소리를 들 어야 했다. 그 잔소리는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 것이다. 피하는 수밖에 없다. 약기운이 돌아 자고 일어나니 9시. 고모의 잔소리가 무서워 억지로 저녁을 먹고 나니 민 재가 보이지 않았다. 고모님 내외는 세상 무너져도 10시에는 주무셔야 한다. 그래서 민 재 녀석이 들어오면 문 좀 열어주고 꼭 비타민제니, 뭐니를 챙겨 먹여달라고 하셨다. 고 모께서는 당연히 민재가 11시나 12시쯤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셨을 거다. 하지만... 천만 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 녀석이 어떤 녀석인데 그렇게 빨리 귀가하겠는가. 하는 수 없이 거실 흔들의자에서 모포를 뒤집어 쓴 채 차 한잔과 녀석에게 먹일 수많은 색색 의 알약을 옆에 놓고 기다리는 중이다. 민재녀석... 보나마나 하진과 율이와 놀고있을 것이다. 아, 이들은 나의 중학교 친구이 기도 하다. 하진이와는 전부터도 안면이 있었지만... 역시 친해진 것은 내가 이 집에 온 후이다. 우리는 중학교 시절 상당히 거칠게 놀았다. 하지 말라는 것을 한번쯤 다 해봤을 것이 다. 술, 담배(나는 기관지가 약한 탓에 못 해봤다. 하지만 녀석들은 나를 멀찍이 띠어놓 고 열나게 피었다), 땡땡이, 싸움, 바이크... 싸움에서 그 녀석들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중학생 신분으로 근처 지역을 재패한 것이 다. 나도 상당한 편이긴 하지만 그 녀석들은 진짜다. 나는 평화주의자다. 물론 상대가 나를 치려는데도 대화를 고집하는 인간은 아니다. 하지 만 상대가 나를 건들지 않는 한 나도 상대를 건들지 않는다. 나는 맹세코 싸움이 싫다. 하지만 그 녀석들은... 정말인지 사정을 봐주질 않는다. 중학생 어린 주먹으로도 그랬는 데, 대가리 큰 고등학생이 어련하겠는가. 그래서 녀석들에게 억지로 맹세를 받아냈다. 왠만한 일이 아니면 싸움을 하지 않겠다는 것, 써클을 만들거나 써클에 들어가지 않겠다 는 것. 일이 크게 벌어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 지금쯤 그 녀석들은 나이트에 있거나 바이크를 몰 것이다. 나와의 약속을 지킨다면 그렇 다는 거고, 나와의 약속을 어겼다면 어디선가 싸움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부르르릉-" 민재 녀석인가보다. 오토바이 소리가 나는 것을 보면... 나는 바이크가 없다. 돈 아깝게 뭣하러 그런 것을 사는가. 튼튼한 두 다리를 놔두고, 값 싼 대중교통을 놔두고 바이크를 탈 만큼 나는 갑부가 아니다. 아, 바이크 타는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민재나 하진, 율이가 태워준다면 기 꺼이 받아들인다. 내가 운전하지는 않고, 그 녀석들의 앞이나 뒤에 타는 편이다. 왜 운 전하지 않느냐고? 오토바이 운전을 하려면 면허가 필요하고, 부과적으로 돈이 든다. 돈 아깝다. 고모는 요즘 민재녀석 때문에 골을 썩고 있다. 이 녀석이 고등학교 입학 후 현재까지, 약 한달 반동안 거의 새벽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아예 하진이나 율이네서 자는 경우도 많다. 나와는 서너번 마주쳤으니까. 오늘 온다면 좀 혼내달라고 부탁하셨기에 이렇게 기 다리고 있긴 하지만, 과연 내 말을 들을지 어떨지는 미지수이다. 그 녀석, 아니 율이와 하진까지 포함해 그 녀석들은 지금 현재 나에게 삐진 상태이다. 일의 발단은 나에게 있다. 내가 사립 원영학원 고등부의 시험을 치지 않고 몰래 선화예 고의 시험을 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 원영학원의 등록금은 너무 부담스럽다. 고모 님께서 대신 내 주신다지만 나에겐 상당한 유산도 있는데 그정도로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게다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연줄도 필요없고 하이 레벨의 교육도 필요 없다. 쓸데없는데 돈을 쓰는 것은 질색이다. 그 녀석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긴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 녀석들은 틀림없이 나를 따라 선화예고의 시험을 치거나, 나를 강제로 원영학원 고등부의 시험을 치르게 했을 것이다. 중3때, 그 녀석들은 같은 학교로 진학한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다 는 듯 믿고 있었으니까. 어느날 내가 살짝 말을 흘렸었다. 만약 다른 학교 시험을 치고 싶은 사람이 나오면 어떻게 하냐고. 그랬더니 세 놈 다, "강제로라도 같은 학교 시험치 게 만들어야지" 란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녀석들에게 말을 할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어쨌든, 녀석들은 삐졌다. 뼈에 사무칠 정도로 삐져서는, 민재 녀석은 집에 붙어있지도 않고, 하진이와 율이 녀석은 연락도 안 한다. 섭섭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선택한 일 이니까. 오토바이 시동이 멎었으니 곧 집 현관문을 따고 민재가 몰래 들어올 것이다. "달칵-" 저 봐라. 저 녀석은 내 예상대로 몰래 집 열쇠를 따고 들어왔다. 나는 민재를 노려봐주 었다. 뒤로 그림자 두개가 더 있다. 율이와 하진이일 것이다. 흔들의자에서 일어나려 했 지만... 지금 내 몸이 너무 무겁다. 모포는 너무 따뜻하고... 두 눈은 뜨기가 힘들다. 민재 녀석을 혼내야 하는데... 약도 먹이고... 민재 녀석은 삐졌으니까 아마 나를 그냥 놔둔 채 올라갈 것이다. 이런.. 새벽은 상당히 추운데... 모르겠다. 지금은 너무 졸리다. 그냥 자고 싶다. 의식이... 멈...춘...... 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안녕하세여? 카린입니다. 제 글이 마음에 드실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네여. 이 글을 올리던 토란방이 문을 닫아서... 여기 다시 올리게 되었습니다. 음... 어쩌면 보신 분이 있을지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혹은 좋은 하루 보내셨기를... karin (primblade00@yahoo.co.kr) 혹(眩) - 아찔하다 "빨리 들어와." 민재는 몰래 현관을 따고 친구들을 유인했다. 어머니께 걸리면 그야말로 죽도록 잔소리 를 들을 것이기 때문에 되도록 조용히 들어왔다. 몇번이나 해 봤기 때문에 익숙한 발걸 음으로 복도를 지날 수 있었다. 새벽 3시. 부모님은 지금쯤 틀림없이 자고 계실 것이 다. 그리고... 선유도. 요즘 자신들이(하진이와 율이를 포함해서) 선유에게 쌀쌀맞게 굴고 있다는 건 인정한 다. 하지만 선유도 너무한 것이다. 굳이 다른 학교를 갈게 뭐란 말인가. 미술을 하고 싶 다면 미술학원을 다니면 되지 않는가. 하진이와 율이네의 권력을 이용해 선유를 억지 로 원영에 입학시키려다 부모님께 들켜 미수로 그친게 안타까울 뿐이다. 게다가 자신 들 몰래 시험을 쳤다고 생각하면 너무나도 분했다. 도대체 우리를 어떻게 생각했으 면... (선유가 판단을 잘 한거지... 말했음 너네가 곱게 보내줬겠냐...) 자신도 이런데 저 녀석들은 오죽할까. 선유에 대한 하진이의 무서울정도의 집착과 율이 의 관심은 자신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뭐야, 다들 자는건가." "흐음... 민재 너 구박받는군. 아무도 기다리질 않는다니." 휴우.. 이 녀석들이 누구를 염두에 두고 하는 소리인지 충분히 알고 있다. 금선유. 이 두 녀석은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선유만 바라본 것이다. 이 녀석들의 성격을 고려한다 면 믿기 힘든 것이다. 그야말로 개망나니...(너도 같잖아..)라고 표현될 성격들이건 만... 어쩔땐 선유가 참 대단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야말로 맹수 조련사 아닌가. "선유 녀석이라면 당연히 잘거다. 그 녀석은 저혈압에다 8시간 수면을 채우지 않으면 컨디션이 엉망이 되니까." "알아." "..." 저 정나미 떨어지는 대답이라니. 헉.... 나 뿐만이 아니라 하진과 율도 순간적으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선유는... 선유는 흔들 의자에서 모포에 쌓여 자고 있었다. 아마도 나를 기다리다가 잠들었을 것이다. 옆에 엄 마의 저주받은 비타민제들이 있는 것을 보니 엄마의 부탁을 받았나보다. 요즘 내 태도 에 불만도 많았을테니 이때다 하고 기다렸겠군. 달빛이 그를 비추어 안 그래도 흰 피부가 더욱 희게 보였다. 피부와 대비되는 칠흑같은 검은 머리는 부드러운 결을 자랑하며 흘러내렸고,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달빛 을 받은 붉은 입술이 한눈에 들어온다. 선유의 이미지는 -그의 성격과는 판이하게 다르긴 하지만- 천사였다. 어린 천사가 아니 라 중성적이고 절대적인 미를 자랑하는 미카엘. 그는 누구보다 아름답게 생긴 사람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마음을 끄는 사람이었다. 누구든지 지켜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처음 그를 보았을 때부터일 것이다. 정말... 어쩔수 없다. 하진이도, 율이도 마 찬가지일 것이다. 인간 주제에 천사를 거역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의 약점은 저 얼굴 이었나 보다. 아니, 인간 금선유인가 보다. "이런... 여기서 잠들었군." "역시... 예쁘다. 이 말을 듣는다면 또 난리를 칠테지만." "옮긴다." 하진이 녀석... 짧게 한 마디 하고는 선유를 들어올렸다. 옆에서 율이가 '나는 왜 그 생 각을 못했지' 하며 원통해하고 있다. 이 녀석들... 에휴- "이런데서 자니까 감기따윌 걸리지. 아무튼 너무 건강에 관심이 없어. 사내녀석이 번쩍 들어올려지다니.. 먹긴 제대로 먹는건지. 하긴, 제대로 먹을리가 없는건가. 이 녀석 일 어나면 맛있는거나 먹으러 가야겠군." 헉... 저 녀석들... 하진은 오늘 어떤 때보다 많은 말을 했고, 율이는 오늘 어떤 때보 다 즐거워 보였다. ... 배신감이 느껴진다아 ㅠㅠ "우리... 일부러 선유 모른척 했잖아. 그만이냐?" "당연하지!! 선유가 이렇게 마를 정도로 신경쓰이게 했는데!! 더 하다간 얘 잡겠다. 뭐, 어차피 선유가 실실 웃으며 변명할 때부터 화는 풀렸었지만..." 이봐, 율아... 그 녀석은 원래 그정도야... 우리 신경쓰느라 살 빠질 만큼 착한 녀석으 로 보이냐... "상관없어." 남궁하진... 네 녀석이 제일 화 내지 않았었냐. 선화예고 재단을 사들여 원영학원과 붙 여 버린다고까지 했잖아... 아마 내가 말리지 않았다면 그렇게 하고도 남았을 넘이 네넘 이야... 졸지에 나만 나쁜놈 되었다. 어쩔 수 없다. 나의 사촌은 천사이다. 사람을 유혹하는,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운 천사이 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허접글을 봐 주시는 당신께 - 러브러브 파워를~ karin (primblade00@yahoo.co.kr) 혹(眩) - 아찔하다 "으음..." 졸리다. 너무 졸리다. 졸려 죽을 지경이다. 졸려 돌아가시겠다. 젠장할!!! 졸려 죽겠단 말이닷!!! ...내가 앞서 말했는지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 저혈압이다. 게다가 어제 늦 게 자서... 지금 상당히 저.기.압.이다. 건들지 마라. 다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따라랑~ 따라랑~ 아침입니다. 일어나세요. 빠빠빠빰~" ...젠장할. ...빌어먹을. ...얼어죽을. 파악- "퍽-" 선유는 자명종 시계를 들어 침대 밑으로 박아버렸다. 어쩌면 고장났을지도 모르겠다. 하 지만... 도대체 저 방정맞은 종소리는 뭐란 말인가!!!(참고로 말하자면 저건 원래 민재 놈 꺼였다. 방정맞게 시끄러운게 꼭 지 주인 닮았다.) 시계를 억지로 꺼버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다. 자신이 일어나서 완전 히 정신을 차리는데 30분에서 1시간 정도가 걸림을 감안하고 알람을 맞춰놓았는지라 느 긋하게 다시 포근한 오리털 이불의 감촉을 만끽하며 중간 수면으로 돌입하였다....!!! 가 아니다!!! 정말 오래간만에, 선유는 순간에 잠을 확 깰 수 있었다. 침대? 침대라고? 자신은 분명 히 어제 마루 흔들의자 위에서 잠들었다. 자신이 잠자면서 무의식중으로 침대로 기어올 라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제 눈을 감기 전에 얼핏 민재와 하진, 율이 녀석이 보인것도 같다. 그 녀석들이 옮겨놨을까? ...음, 그럼 이제 삐짐 놀이는 관둔건가?(네넘에겐 그게 놀이로 보였냐...) ...으음... 너무 좋다... 포근해... ...일어나기 싫어... 그리고 다시 본능에 순응하기 시작했다. 07:30(am) "으아아아아아악~~~" 아침부터 시작된 선유의 절규에 놀란 민재, 하진, 율은 단잠을 떨치며 선유의 방으로 달 려갔다. "왜그래?!" "무슨 일이야!!!" "선유야!!" ... 선유는 자신의 방문을 떨어져라 열며 외치는 세 명의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 리 놀래서 달려왔기로서니... 저 꼬락서니를 봐라. 그나마 하진이가 제일 낳군. 하진이 는 상의를 벗은체 잠옷바지만 입고 있었다. 민재와 율이는 아래 위 홀딱 벗은 채였다. 그런 꼴로 자신에게 허겁지겁 무슨 일인지를 물어오다니. 기뻐해야할지 한심히 여겨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선유였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율이가 다급히 물어왔다. 동시에 쏠리는 6개의 눈동자. "아, 옷 좀 입고오지 그래? 나야 괜찮지만 고모님께서 보시기라도 하면-" "응? 으윽!!" "이런!!" 낭패한 듯 율이와 민재는 방으로 다시 달렸다. 하진은 그대로 방문에 기대어 섰다. 뭐, 남자가 상의정도라면 벗을 수 있지. 넌 합격이다. 그나저나, 저 근육들이라니. 균형잡힌 몸매가 그을린 갈색 피부로 더욱 빛을 발한다. 남 자의 몸이면 저정도는 되어야지... 아무래도 저 녀석은 내 컴플렉스를 너무 자극해. 우 성 인간 같으니라고.(그럼 너는 열성인간이군... -_-;;; 죄송합니다. 이제 소설 중간에 끼어드는거 자제할께여... ㅠㅠ karin.) "그나저나, 왜 고함 지른거야?" 물어오는 하진의 목소리에 "으아아아아악~~~~~ 지각이다!!!" 라고 다시 고함을 지르며 우왕좌왕하는 선유였다. "그러길래 그냥 원영에 있으면 좋잖아. 아침마다 그 고생 안 해도 되고." "시끄럿!!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선유는 교복 자켓을 입으며 민재를 양껏 째려주었다. 저 자식, 아직 삐진게 풀어지지 않 았나보다. 계속 저렇게 궁시렁대는것 보면. 사실 등교는 8시 30분까지니까 그다지 늦은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침에는 버스와 지하철 의 인파 때문에 15분 걸릴 거리지만 40분정도는 잡아야 했다. 으윽- 샤워를 하니 어느새 10분이 갔다. 10분만에 모든것을 다 해야한다니!! 어제 저녁 준비물을 챙겨놓지 않은 자신의 무심함을 탓하며 선유는 입에 토스트를 물고 (아침은 무슨 일이 있어도 먹어야 한다는 게 고모님의 지론이다) 한손으로 자켓을 걸치 며 다른 한 손으로는 데생 재료를 챙겼다. 저런 싸가지들!!! 지네가 무슨 10살먹은 어린얜줄 안다. 아니, 정신연령은 정말 10살과 친구하기 딱 좋을거다. 민재 저 놈, 아무리 생각해도 메피스토텔레스와 계약이라도 맺은 것 같잖아. 느긋이 책 상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한쪽 입가를 올린채 마음껏 비웃다니!!! 그렇게 시간이 남아 돌면 좀 돕기라도 하란 말이다!! 하진은 여전히 문에 기대어 서 있었고 그나마 율이는 도와주려 했지만... 율아, 안 돕는 게 더 빠를것 같구나... ㅠㅠ 아무래도 나가야겠다. 더이상 지체하다간 그야말로 지각이다. "나 간다." 선유가 토스트를 입에 물고 나서려 하자 율이와 하진이가 재빨리 앞을 막았다. "뭐야! 나 늦었다니까?" "그 꼴로 어딜 가려고 그래?" "내 꼴이 뭐 어때서??" 휴... 이녀석의 둔감함에는 정말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다른 이에게 어떤 감정을 유발시키는지에 대해 어찌 이리도 둔하단 말인가. 촉촉히 젖은 푸른 눈동자, 채 말리지 못해 물방울이 맺혀 있는 흑단같은 머리카락, 보호 본능을 유발하는 창백한 피부, 그와 대비되는 빨간 입술, 다 잠구지 못해 벌려진 셔츠 사이로 보이는 도드라진 쇄골... 그의 성격이랑 닮던 닮지 않던, 그가 깨닫던 깨닫지 못하던 그는 누가 봐도 아름다웠 다. 게다가 저혈압이라 약간 감겨지는 길다란 속눈썹이 묘한 색기마져 유발했다. 여자에 게도, 남자에게도 절대미로 부각될 모습이다. 저런 모습을 하고 만원 버스와 지하철을 오가다니. 그야말로 치한에게 나 잡아 잡수- 하 는 꼴 아니란 말인가. 두 녀석의 생각을 빤히 아는 민재는 그들이 불쌍하다 못해 안타까웠다. '저 녀석에게 너무 많은걸 바라지 마라- 에휴-' 차마 내꼴이 어떻냐는 선유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한 채 순진한 얘들마냥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라니. 한 100년은 두고두고 놀려먹을 거리다. "..오토바이로 태워줄테니 제대로 하고 가라." 하진이가 말을 꺼냈다. "아니, 됐어. 너희도 학교가야지." 금선유, 저 둔팅이 같으니라구. "...태워준다면 타고 가. 사람 두번 말하게 하지 마라." 급기야 하진이가 목소리를 깔고 말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무조건 선유 탓이다. '뭐, 나야 태워준다면 좋긴 하지만...' 덕분에 시간을 좀 벌긴 했지만 왠지 찜찜하다. 내가 그렇게 못볼 꼴이었나? 아침에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가 봐도 한심했기 때문에 그려려니 했다. 아무튼 하진이 덕 분에 머리를 말리고, 교복을 단정히 입고, 얼굴색을 좀 되찾을 수 있었다. 그동안 녀석 들도 학교갈 준비를 했으므로 집을 나온 것은 8시10분 경이었다. "으윽- 빨리 가자. 늦겠다." "알았어, 알았어. 그만좀 재촉해라, 금선유." "시끄럿, 이민재. 네놈때문에 10분은 더 지체되었다고. 게을뱅이 같으니." "남말 하시네. 누가 늦게 일어나래?" 티격 태격 민재와의 대화를 이어나가며 밖으로 나왔다. 빨강색 아프릴리아, 검은색 야마 하, 파란색 가와사키가 나란히 서 있었다. 뭐, Z니 G니 하고 여러 숫자가 복잡하게 붙어있는 상표명이었지만 자신은 기껏 아프릴리 아, 야마하, 가와사키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그나마 그것도 귀찮아서 빨갱이, 검둥이, 파랑이(-_-;;;)라는 얘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아프릴리아가 민재 것, 야마하가 하진이 것, 그리고 가와사키가 율이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하진이 뒤에 타는 것을 좋아했다. 민재 녀석은 일단 타기만 하면 눈이 뒤 집히고 사람이 변하는 스피드 광에다, 율이 녀석은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뛰어넘고, 날고, 마치 장얘물 경기를 하듯 요리조리 움직여 타기만 하면 속이 뒤집어졌다. 그에 비 하면 하진이는 정말 신사적으로 바이크를 몰았다.(글쎄... 과연? ^^) "난 어디 타냐?" "으음... 보!!" 뭐냐 하면... 사천만 전국민이 즐기는 국민스포츠, 가위 바위 보다.(-_-;;;) 녀석들은 내가 자신들 뒤에 타게 될때면 항상 가위 바위 보로 정했다. 간편하고 뒤 끝이 없다나? 사람 한명 태우는걸로 무슨 뒤끝 운운하는지는 모르겠다만, 태워주는 사람 맘이니 얻어 타는 사람이 뭐라하리오. 아! 잘됐다. 오늘은 검둥이다. 하진이 뒤라는 소리다. 신사적으로, 유유히 갈 수 있을 것 같다. 부르르릉- 부르르릉- 오토바이의 시동이 걸리고 선화예고를 향해 출발했다. "...너네는 그냥 학교로 가지 그러냐?" 도대체 저 녀석들은 왜 따라오는건지 모르겠다. 하진이는 나를 우리 학교에 떨궈야하니 까 그렇다 치고, 민재와 율이는 왜 오는건지.. 같은 방향이면 말을 만다. 원영학원과 우 리 학교는 정 반대 방향이다. 친구따라 강남가는 덜.떨.어.진. 녀석들... 하진이가 오니까 따라오기는. "학교를... 봐... 야.. ....하지." "그래... 혹시... ...할... 있잖아..." 바람소리 때문에 그나마 무슨 소린지 모를 말이 띄엄띄엄 들린다. 해독불능이다. 어느새 우리 학교 앞이다. 윽... 좀 쪽팔린다. 하긴, 나라도 오토바이 세대가 나란히 달 려온다면 한번쯤 쳐다보겠지만... 아무래도 앞에서 내려야겠다. "하진아, 멈춰라." "왜?" "쪽팔려. 저쯤에 세워줘." "됐어. 늦었다며." 이자식아!!! 사람 말을 개떡으로 아냐!!! 내 말에도 불구하고 하진, 그리고 민재와 율이까지 세대의 오토바이가 정문에 요란하게 섰다. 나쁜놈들... 지금 내 얼굴은 그야말로 불타는 고구마(?)일 거다. 이 넘들... 정말 아직 삐져있는거 아냐? 쪼잔한 넘들... "고맙다. 학교 잘 가라." "그래." "..." "..." "너네, 안 가냐?" "너 들어가는거 보구." "장난하나. 데이트 바래다주는것도 아닌데. 얼렁 가라." "알아서 갈테니까 어서 들어가기나 해." "...모르겠다. 간다." 그냥 뒤돌아서 교문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 튀어서 한대 차서라도 보내고 싶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건 정말 고역이다. 저녀석들은 얼굴에 철판이 라도 깔렸는지 모르지만, 내 피부는 보통 인간의 피부다. 그 녀석들과 상당히 멀어졌건 만 아직도 주위에서 수근대며 나를 보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윽... 면상팔려. 다음부 턴 아무리 늦어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편을 택하리라. ...본관에 다 닿아 뒤를 돌아보니 그제서야 떠나는 모습이 보인다. 서로 다른 색의 오토 바이가 조화를 이루어 꽤나 멋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어제 잠이 너무 부족한 탓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안녕하세요- ^^* 추천 눌러주신 분들, 읽어주신 분들.... 너무너무 감사하구요... 그럼 여러분. 좋은 하루 보내시길, 좋은 하루 보내셨길. 혹(眩) - 아찔하다 어느새 고 1의 4월도 거의 다 지나갔다. 추웠던 날씨는 그런대로 따뜻해져서 점심시간 의 운동장이 가득 차는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내가 다니던 원영학원 중등부에서 선화예고의 시험을 본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기껏 비싼 등록금 내면서 상류계급과의 연줄을 만들었는데 누가 미쳤다고 거길 빠져나오겠는 가.(그럼... 넌... 미친넘...?) 게다가 상류계급에게 예술은 취미생활일 뿐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들로 인해 학기초 나는 거의 왕따였다. 같은 학교에서 온 녀석들은 삼 삼오오 모여 즐겁게 얘기하는데 나는 홀로 사색에 잠겨야만 했다. 원해서 한 것이 아니 었다. ㅠㅠ 나는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다. 사람을 스스럼없이 대하려면 짧게는 반 년, 길게는 일 년 정도가 걸린다. 그렇기 때문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교실은 나에게 있어 무차별 지뢰 밭이나 다름없었다. 별다른 뜻은 아니고, 단지 심하게 긴장하고 있었단 얘기다. 선화예고는 크게 미술부, 무용부, 기악.성악부로 나뉜다. 그리고 거기서 좀더 세세하게 나눠지는데, 미술부는 서양화과, 한국화과(동양화라고 하는 것은 사실 틀린 것이라고 하 더군요.), 디자인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서양화를 전공하고 있다. 다른 이유는 없고 단지 유화가 좋아서이다. 한국화도 좋아하긴 하지만 정신의 미덕과 절 제, 한획으로 모든것을 표현하기에 나는 너무 다중적이다. 게다가 나는 스스로를 다스리 는 일에 서툴기 때문에 어떠한 고침도, 예비도 없이 실전 한번으로 이루어지는 한국화 는 맞지 않다. 나에게는 유화가 맞는다. 몇번이나 잘못을 해도 덧칠해 낼 수 있는 유화가 어울린다. 실 수를 해도 위에 덮으면 그만이다. 아니, 오히려 그 실수가 기회가 되어 더 아름다운 색 깔이 물들 수도 있다. 한국화가 삶의 정수를 뽑아낸 그림이라 하면 유화는 실수도 있고 잘못도 있는, 그리고 그것을 고치려 노력하는 인간의 삶 자체가 나타나있는 것이다. 전공에 따라 반이 나뉘는데 각 부가 4반씩 미술부가 1~4반, 무용부가 5~8반, 그리고 기 악.성악부가 12반까지에 나뉘어 들어가 있었다. 나는 3반이며 우리반 남학생 13명 중 하 나이다. 이 학교에 들어온지도 벌써 2달이다. 아직도 완전히 친해지진 않았지만 그런대로 친구 를 사귀어 사색에 잠기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보통 우리 패거리는 6~7명인데 그중에 서 나와 친한 녀석들은 서단영, 한지성, 안성혁이다. 음... 셋 다 내 성격에 맞는다. 그 중에서 서단영이란 녀석하고는 꽤 친해진 것 같다. 오래 사귄다면 민재네 정도로 친 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점차 이 학교에 편안함을 느끼는 나를 알 수 있다. 나와 이 학교는 궁합이 꽤 맞나보다. 혹(眩) - 아찔하다 08:10(am) "안녕?" "이제 오네?" "여어-" 학교는 등교하는 아이들로 한창 시끌벅적했다. 약간씩 분위기가 들떠있는 아이들에 의 해 선유는 자신의 기분도 즐거워지는 것 같았다.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는 꽤나 좋아하는 것이었지만, 교화(校花) 이기도 한 벛꽃잎이 빨리 질 것을 생각하니 좀 아쉬웠다. 선유는 비를 좋아했다. 가랑비든, 소낙비든 가리지 않고 좋아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 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은 뭐든지 좋아했다. 눈, 비, 흩날리는 꽃잎, 심지어는 패러글라이더를 착용하고 뛰어내리는 군인들마져 이 뻐 보인다면 이상한걸까?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은 단지 그것만으로도 경외심을 갖게 한다고 선유는 생각했다. 그 렇기에 오늘 아침은 더욱 마음에 들었다. 비가 내리는 걸 구경만 하기엔 성이 차지 않아 결국은 잠깐동안 우산을 치우고 내리는 비를 맞았기 때문에 선유는 조금 젖어있었다. 고모님이나 삼인조(민재, 하진, 율) 녀석 들이 본다면 기겁을 할 일이다. 고모님께선 건강지상제일주의자시기 때문에 건강에 안 좋은건 무조건 배척하시니 화를 내실 것이고, 삼인조 녀석들은 이유를 모른다. 단지 비 든 눈이든 꽃잎이든 보기만 하고 맞지는 말란다. 정말 제멋대로인 녀석들이다.(너도 만 만치 않잖아... -_-;;;) ...이상하다. 무슨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상하다. 반 분위기가 왜 이런 것일까? 혹시 나도 모르는 새에 나 왕따가 되어버렸나? 교실로 들 어가자 떠들석하던 교실이 순간 조용해졌다. 여자얘들의 노골적인 눈빛과 사내녀석들의 노려보는 눈빛... 도대체 왜 이런거야, 정말. 짜증이 나려 한다. 좋았던 기분에 초를 치는군. 이유를 알아야 째림을 받던 나이프를 받던 할 것 아닌가. 아무런 언질도 없이 단지 노려 보는 학우들이라니. 젠장할.. 뭐, 내가 잘못한게 있음 따지러 올테고 없으면 알아서 풀어지겠지. 나는 그다지 사교적인 인간이 아니다. "어? 선유야? 너 비 맞은거야?" "그래." "춥겠다. 수건 주랴?" "어. 고맙다." 다행히 짝인 지성이가 가방을 내려놓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제서야 아이들은 각기 자 신의 생활속으로 돌아간다. 어찌됐건 상당히 다행이다. 잠깐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상당히 되었나보다. 머리카락에 물방울이 맺혀 떨어진 다. 물기를 닦고 나니 한기가 든다. 좀 춥다. 털썩- "...?" "걸쳐라. 추워보인다." "땡큐. 지금 왔냐?" "...그래." 단영이가 나에게 체육복 상의를 꺼내주었다. 스웨터 재질이라 상당히 따뜻하다. 그나저 나, 저녀석은 아침부터 왜 저리 저기압인지.. 따뜻해지니 또 잠이 온다. 으음... 졸리다. 수업 시작 전까지 잠이나 자야겠다. 점심시간- "선유야. 매점가자." 4교시가 끝나자마자 축 처져서 잠든 나를 지성이가 깨웠다. 점심시간인데 도시락은 어쩌 고 매점이냐고? 나는 원래 식당에서 사먹는다. 그리고 저 녀석들은 애저녁에 까먹은지 오래다. 팔팔한 고1 남학생치고 점심시간에 점심먹는 녀석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귀찮아..." "아무튼 늙었다니까." "말하는 꼬라지 봐라. 아주 싸가지가 바가지다, 안성혁." "남말 마라. 막상 막하, 피장파장, 오십보 백보다." 저 녀석은 안성혁. 나랑 말싸움 하는것을 꽤 즐기는 것 같다. 아, 물론 나도 즐긴다. 가 운데서 죽어나는게 지성이다. "그만 좀 해라. 지겹지도 않냐?" "어이구- 잘났다, 한지성." "빨리 나와. 밖에 단영이 기다린다." 지성이의 재촉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매점으로 향했다. 매점은 식당과 같은 곳에 있는 데 항상 사람이 북적대는 편이다. 나는 시끌벅적한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 너무 사람이 많으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 되도록 점심시간엔 오고싶지 않지만 위장을 채워달라는 본능이 우선순위이다. 뜨거운 캔커피 한잔과 카레라이스를 샀다. 좀 배합이 안 맞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뱃속에 들어가면 어차피 다 섞인다. 성혁은 초코파이 하나와 우동 - 저녀석은 황당하게도 초코파이 매니아다. 빅파이도, 몽 쉘통통도 안 되고 오로지 초코파이만 된단다. 하루에 하나를 먹지 않으면 정신분열이 일 어난다고 한다. 아, 물론 이 같은 중학교 출신의 지성이가 해 준 말이다. 아무튼, 웃기 지도 않은 놈이다.-, 지성은 짜장밥, 단영은 라면을 사 들고 자리를 찾았다. ...자리가 별로 없다. 아무래도 한창 혈기왕성한 고등학생들인만큼 많이 먹는다. 적당한 자리를 찾으려 두리번거리는데 한쪽에 커다란 테이블 하나가 거의 비워져 있는 게 보였다. 딱 한 명만이 앉아 있었다. "어, 저기 자리 났다. 가자." 하며 지성이를 끄는데 왜인지 이넘이 나를 만류하며 미어터지는 구석자리에 앉는다. "야, 자리 놔두고 뭐하는 짓이냐?" "아서라, 저기 선화파 놈이 지키구 있구만." ..그건 또 뭐란 말인가. "선화파? 그건 뭐냐?" "너, 도대체 학교에 관심이 있긴 한거냐? 어째 선화파도 몰라?" 성혁이 무안을 준다. 나 참, 그거 모르면 누가 내 목숨 뺏어가기라도 한다냐. 왠 타박이 야. 시어머니도 아닌것이. "빨랑 설명해봐. 뭐야?" "우리학교 폭력써클... 이지. 꽤 유명해. 고교연합에도 들어있고. 아, 짱은 2학년 최대 일이라는 넘인데... 별로 좋은 넘 같지는 않아." "그러냐?" "어? 양건우잖아." 계단을 내려오는 어떤 넘을 가리키며 지성이가 말했다. "...그건 또 뭐냐?" "넌 아는게 뭐냐?" 상혁이가 맞받아친다. "잔말말고 말이나 해라. 계집얘처럼 잔소리는." 기가막힌다는 듯 성혁이 나를 쳐다본다. 이넘아, 네넘도 만만치는 않다는걸 아셔야지. "이름난 싸움꾼이다. 선화파가 영입하려는 것 같기도 한데, 아마 저놈이 거절할거야. 누 구 밑에 들어가는걸 엄청 싫어하거든. 조만간 저넘이랑 선화파랑 붙어서 짱 교체될거 다." "잘 아네?" "아아... 몇번 얼굴만 마주쳤을 뿐이다." "흐흠... 꽤 세단 말이지..." 아아- 중학교 시절의 버릇은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고수를 만나니 손이 근질거린다. 요즘 너무 운동을 안 했다. 욕구불만인가? 그렇다고 해도 싸움을 할 수는 없다. 삼인조 녀석들에겐 하지 말라고 해 놓고 내가 하 면 그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어차피 싸움은 안 하다 보면 저절로 끊어지기 마련이다. 양건우란 넘이 계단을 내려와서 식당을 천천히 가로지른다. 날카롭게 생긴 눈매, 커다 란 키, 균형잡힌 몸.. 여자얘들에게 꽤나 인기있겠군. 한참을 관찰하다 눈을 돌리려는데 그 녀석이 나를 본다. 잠깐- 이쪽을 본 것 같은데... 뭐, 그럴일은 없겠지. 아는 놈도 아니고. 우리학교 카레라이스는 상당히 맛있다. 우동은 팅팅 불어서 간신히 형체만 유지한 채 나 왔다. 그래도 상혁이 넘은 맛만 좋단다. 그걸 먹고도 내 카레라이스와 지성이의 짜장밥 을 반 이상 먹어치웠다. 라면은 단영이 넘의 재빠른 방어로 못 먹었지만... 4차원으로 이어진 그넘의 위장에 경의를 표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안녕하세요, karin입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 (-_-)(_ _)(-_-)(_ _) ] karin (primblade00@yahoo.co.kr) 혹(眩) - 아찔하다 어느새 5월 중순이다. 수업에도, 학교에도, 새로 사귄 친구들에게도 많이 익숙해 졌다. 민재, 하진, 율이 넘들도 나름대로 잘 다니고 있는 것 같다. 글쎄... 그나마 그넘들을 제어하던 내가 사라졌으니 그넘들이 어떻게 지낼지는 안봐도 뻔하지만... 그래도 민재넘이 알아서 절충시키겠지... 내가 민재넘을 존경하는 게 바로 그런 부분이다. 머.리.싸.움. 좋게 말하면 두뇌싸움이고, 나쁘게 말하면 잔머리 굴리기다. 그넘은 잔머리 굴리기에 가 깝다. 얼마전 고등학교 들어와서 첫 시험을 보았다. 장장 4일간에 걸쳐진 시험은 그런대로 만 족할 만한 결과를 얻고 끝을 내렸다. 사실 꽤 열심히 했다. 첫 시험인만큼 그 결과에 따 라 담임이나 아이들이 보는 눈이 달라진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다. 반에서 4등, 전교에선 32등을 했다. 우리 학교는 예술계지만 성적도 중요시하기 때문에 문제가 상당히 어려웠다.(니 잘났다!!!) 지성이는 전교 1등이다. 물론 반에서도 1등이다. 매일 성실하게 하는 녀석을 보고 있자 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단영이가 3등,성혁이가 12등이다. 성혁이 녀석은 정말 엄 청 잘 본거다. 그 녀석이 시험 전날 스타 크래프트를 하느라 밤을 샜다는 건 하늘이 알 고 내가 알고 지성이가 알고 녀석이 안다. 민재, 하진, 율이도 시험을 봤을텐데... 도무지 공부하는 모습을 못 봤다. 뭐, 그 녀석 들이야 원래 공부 안 해도 잘 보지만... 그러고보니 중학교때 시험공부한건 넷 중 나 하나였다. 물론 세 놈 다 공부한답시고 내 방에서 밤을 새웠지만 민재넘과 율이넘은 FIFA 게임, 하진이는 오토바이 관련 서적을 뒤 적댔고 정작 공부한건 나 혼자였다. 공부 방해된다고, 그럴려면 차라리 오질 말라고 잔 소리를 해대도 끝까지 내 방을 점령한 자식들이었다. 날씨가 상당히 덥다. 지구촌 온난화가 사실인것 같다. 아무래도 곧 있으면 하복을 입게 될 것 같다. 퍽- ... ...... 순간적으로 눈에서 뭔가가 번쩍였다. 지금이 체육시간이고 농구수업을 하고 있다는 걸 망각한 채 멍하니 있었다는건 인정한다만... 그렇다고 해도 면상을 농구공으로 강타하 는 것은 좀 심하지 않은가? 안경을 벗고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음 공 던진 녀석은 살인미수죄로 큰집 갔을거다. 아, 난 얼마전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요즘 눈이 많이 나빠져서 결정한 일이다. "으윽..." 초점이 안 맞는다. 머리가 멍하다. 어떤 자식이야.... "나 참, 그러길래 왜 멍하니 있냐?" 지가 잘못한건 말도 안 하는 저 꼬라지... 말하나 마나, 성혁이 놈이다. "안성혁. 니넘이 잘못했으면 순순히 빌것이지, 왠 적반하장이야." "누가 그렇게 넋 놓고 있으래?" "...성혁아... 지금 그게 할 소리냐...?" 어라. 이건 왠 음산한 기운인가- 그 검은 오라를 마구마구 발산해대는 인간은 다름아닌 지성이었다. 평소에 온순하던 놈 이 화내면 무섭다더니, 역시 그랬다. 지성이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강조하며 그 누구도 대적할 자 없을 것 같던 뺀질대왕 성혁이 넘한테서 사과를 받아냈다. 정말 굉장한 잠재 력이다. "쳇- 사과로 끝내면 되지, 내가 왜..." "안.성.혁...." "아니, 내가 뭐라고 그랬나? 아니라구.." 지성이는 아직도 폭주모드인지 으르렁대고, 성혁이넘은 깨깽댄다. 참으로 볼만한 광경이 다. 단영이가 학생총회의에 가느라 여기 없는게 애석할 따름이다. 여기는 매점. 내 앞에는 라면과 카레라이스와 떡볶이가 놓여 있다. 지성이의 협박 아래 거의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성혁이 넘이 사온거다. 어쨌든 사과의 뜻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음식들이다. 맛있게 먹어주는게 사람된 도리 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감사히 먹겠습니다아- "쿡... 쿨럭... 켁..." "푸하핫- 꼬시다!! 잘 됐다, 이넘아. 그럼 그렇지, 내 피같은 돈으로 산 음식물이 네넘 의 위장에 고이 들어갈리가 없지... 큭큭..." "쿨럭, 쿨럭-" "안성혁!! 물떠와!! 앞에서 인간이 괴로워하는데 넌 즐거워하고만 있냐?" "쿡.. 쿨럭.. 쿨럭, 쿨럭-" 성혁이 넘을 째리며 물떠오라는 지성이를 말리곤 일어섰다. 지성아, 저 넘을 그렇게 모 르느냐? 물 떠오라고 하면 고추가루 뿌릴 넘이다... 성혁이 넘이 속으로 얼마나 저주를 퍼부었으면 떡볶이가 목에 걸릴까. 나는 재빨리 개수 대에 가 물을 마셨다. 벌컥, 벌컥, 벌컥- 휴, 살것 같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서비스나 좀 하자고 생각하며 넘들 물까지 떠 손 에 들었다. 물컵 세 개를 드는 건 상당한 균형감각이 필요한 것 같다. 달그락- 툭- "이런..." 바로 방금 전, 물컵을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근처에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남에 게 피해 입히는 것 까지는 모면할 수 있었지만... 오늘이 바로 그 유명한 머피의 날인가... 하루종일 나쁜 일만 일어나는 것 같다. 음... 이 상태로 본다면 한두가지 정도는 더 일어날 듯 싶은데... 그래.. 뭔가.. 최고조에 닿을 만한... 엄청나게 재수없는 일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안녕하세요, karin. 입니다. 과연... 그... 엄청나게 재수없는 일이란... 뭘.까.요? 우후훗- 그럼 이만. ^^* 혹(眩) - 아찔하다 컵을 줍기 위해 무릎을 구부렸던 선유의 주위를 몇 명의 사내녀석들이 둘러쌓다. 킬킬거 리며 비웃는 듯한 목소리, 어줍잖은 욕설... 빙고!! ..자신의 어이없는 예지능력에 한탄하며 선유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건 얼굴이나 봐야겠지. 제길헐... 지성이가 '별로 안 좋아' 판정을 내린 최대일... 우리 학교 짱이라는 넘이 내 바로 앞 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최대일의 똘마니들은 선유와 최대일이 보이지 않게 그들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최대일이 금선유에게 무슨 짓을 하던 다른 놈들 은 모를 거란 말이다. 선유는 이 짱이라는 넘이 자신에게 도대체 무슨 볼일이 있는건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기 에 가만히 최대일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그다지 보고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최대일의 눈을 피하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 "..." 선유도 말을 하지 않고, 최대일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똘마니들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순식간에 분위기는 굉장히 어색하게 흘러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쨌든 선배니 존대말을 써야겠지. 지성이가 마이너스 판결을 내렸을 정도면 상당히 재 수없을 놈이겠지만... 선유는 상대주의자다. 상대방의 행동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결정 짓는 것이다. "..여기." 그 말을 하고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뭐야, 이놈. 왜 웃는거지? 게다가 이건... 일 명... "네가 물을 쏟아서 여기 묻었다." ..그래, 일명 '비열한 웃음' 이었다. 자신의 앞에서 입꼬리를 삐죽 올리며 웃는 넘... 그리고 그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바지 자락에 묻은 물 세.방.울. "죄송합니다. 됐습니까?" 어쨌든 잘못하긴 했겠지. 묻힌건 묻힌거니까. 그게 아무리 물 세.방.울. 이라고 해도 말 이다. 짱이라는 넘이 이렇게 쪼잔해서야 쓰나... 쯧쯧. 선유는 혀를 차고 싶은 심정이었 다. 의외로 쉽게 사과를 하는 선유의 행동에 약간 당황한 것 같았지만, 원래 저런 놈들은 얼 굴이 두껍다. 유들유들하게 사과를 무시하며 시비를 걸어왔다. 최대일이 선유의 턱을 한 손으로 잡은 것이다. "...뭐 하시는 겁니까? 바라시는 사과는 분명히 했습니다만..." "말로만 끝낼 수는 없지. 그렇지 않아?" 그렇게 말하며 혀로 입술을 핥는 꼴이라니!! 한대 차 주고 싶을 것을 꾸욱 참으며 선유 는 최대일의 손을 매섭게 쳐 떨어뜨렸다. 탁- 참을 인(忍)... 참을 인(忍) 세번이면 살인을 면하느니라... 우욱- 정말 한대 치고 싶은 마음에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꽈악 쥐며 선유는 스스로에게 되뇌였 다. 표리부동한 인물이 되기는 싫다. 삼인조에겐 싸우지 말라고 그 지랄을 떨어놓고 자 신이 싸우면 아무래도 웃긴 꼴이 될 것 같았다. 선유가 손을 쳐 내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기세등등히 자신을 노려보는 꼴이 라니. 어째서 이런 넘들은 숫적인 우세에 모든게 좌우된다고 믿는 걸까. '일진'인 것 같은 남자가 열받은 듯 선유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우라질!! 이게 이쁘다 이쁘다 하니까... 개새꺄, 어디서 누구 손을 치는거야!! 당장 잘 못했다고 못 빌어?? 씨발.. 존나 건방진게... 계집얘같이 생겨서는..." 툭- 무슨 소리냐 하면, 이성 끊어지는 소리다. 선유가 제일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이 쁘게 생겼다' 와 '여자같이 생겼다'였다. 남자가 들어서 결코 기분좋은 말이 아닌 것이 다. 그렇게 보인다면 그냥 그렇게 받아들일 것이지 왜 그걸 말하면서 시비를 거냔 말이 다. 맹새코 자신을 도발하는 것이었다. 퍼억- 자신이 자각하기도 전에 발이 먼저 나갔나보다. 선유는 춤추는 듯 우아하게 발을 뻗어 욕설을 지껄인 남자를 걷어찼다. "우욱..." 커다란 신음소리를 흘리며 남자는 떨어져나갔다. 우아하게 보였지만 결코 만만한 몸짓 은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 삼인조들에 비해 떨어지는 파워를 기술력과 스피드로 보완했 던 선유였다. 물론 그 사실을 알 수 없는 '최대일과 똘마니'들은 단 한 방에 나가 떨어 진 일진 녀석을 놀란 듯 쳐다보았다. "...비켜." 선유의 눈은 싸늘한 기운을 뿌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 매서움에 놀란 몇몇의 똘마니들 이 움찔거리며 길을 터 주었고 선유는 유유히 그곳을 나왔다. 최대일이 순순히 보내주는 게 이상했지만.. 어쨌든 사람 많은 식당에서 일을 벌이지 않은 것만은 다행이었다. 젠 장... 더 먹고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정말 짜증나는 날이다. 짜증이 무럭무럭 샘솟는다. '선화파'라고? 웃기고 있어. 이제부 터 네놈들은 '최재수와 똘마니'다. 킥킥... - 두통으로 인해 시니컬해진 선유였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실 이건 '공'과는 관계없는 내용일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럼 여러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 karin. 혹(眩) - 아찔하다 "이런... 너무 늦었는걸." 방과 후 잠시 내기농구를 즐기다 보니 어느새 6시가 다 되었다. 윽... 만약 집에 삼인 조 녀석들이 들어와 있다면 상당히 골치아파질 것이다. 자신들은 외박도 스스럼없이 하 는 주제에 나에겐 조금만 늦어도 어딜 갔냐느니, 누굴 만났냐느니 샅샅히 캐묻는다. 거짓으로 대답해봤자 세세하게 역추적까지 해버리니 오히려 일을 꼬이게 만들 뿐이다. 처음엔 사생활 침해라며 화도 냈지만 이젠 거의 포기 상태다. 다른건 다 상관없지만 그 것만은 안 된다는데... 어쩌겠는가. 언제나 생각하지만 참 이상한 넘들이다. "어? 어디 가냐?" 성혁이 넘이 물어왔다. "수돗가. 좀 씻어야지. 넌 안가냐?" "아아, 됐다. 사내녀석이 땀냄새 좀 배인 것 같고... 뭐, 넌 땀냄새도 나지 않잖아?" 아니, 이게 어따 대고 킁킁거리나. "더러운 놈. 니놈때문에 세상 모든 남자들이 욕먹는거다." 한마디 대꾸해주곤 수돗가로 갔다. 뒤에서 성혁이 녀석이 뭐라뭐라 말을 한 것 같지만 들리지도 않았고 듣지 않아도 뻔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무시해버렸다. 수돗가는 운동장 구석에 있었기 때문에 천천히 걸어갔다. 한참 운동을 해서 덥혀진 몸에 차가운 물이 기분좋게 스며들었다. 초여름의 햇살이 상당 히 뜨거웠기 때문에 차가운 물이 더욱 반가웠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머리도 좀 감자- 라고 생각한 선유는 수돗물을 틀고 머리를 박았다. 시원한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이 짓 도 원영학원에서는 절대 할 수 없었다. 물론 이유는 고 세 녀석들이었다. 대충 몸이 식혀지는 듯하자 머리를 털었다. 교복도 좀 젖었지만 뭐 어떤가. 뭣하면 셔츠 를 벗어버리지- 라고 맘편히 생각하며 머리를 터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런, 젠장!!!' 몇 일 전 식당에서 만난 '최재수와 똘마니' 패거리다. 그중에서도 '똘마니들' 인 것 같 다. 4~5명이서 선유를 둘러싸듯이 섰다. 한여름의 햇살이 나른했다. 운동을 했더니 상당한 졸음이 몰려왔다. 어서 자고 싶을 뿐 이었다. 눈꺼풀이 감긴다. 하암- ... 도대체 이 녀석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초여름의 햇볕 탓이라 치부해 버 리기엔 녀석들의 얼굴이 지나치게 빨겠다. 이유없이 짜증이 났다. "무슨 일이야? 빨리 말하고 꺼져." 일부러 싸가지 없는 말투를 골라썼음에도 불구하고 녀석들은 버벅거리며 순진하게 대답 한다. 누가 보면 자신이 협박하고 있는 줄 알겠다. "그.. 그게.. 형님께서 너 좀 보자고..." 저거 덜 떨어진거 아냐? 거기서 그렇게 버벅대면 어쩌란 말인가. 앗- 차갑다. 머리카락 에 매달린 물방울들이 목덜미를 타고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어서 가서 머리를 말려야 하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일이 꼬이는건지... 머리카락을 잡아 손으로 물기를 가볍게 털며 말했다. "그래, 까짓것 못 볼 것도 없지. 가자구." 어차피 한 번은 끝내야 할 것이다. 이런 넘들은 상당히 끈질기기 때문에 확실히 밟아주 지 않으면(당신.. 혹시 새디스트? ^^) 계속 달라붙는다. 그렇다면 사람없고 한적한 이 시간이 적당했다. 순순히 따라가는 선유를 똘마니들이 주춤거리며 에워쌓다. 도대체 모셔가는건지, 끌고가 는건지 똘마니도 선유도 잘 모르는 형태가 되어버렸다. 똘마니들이 데려간 곳은 학교 건물 뒤의 한적한 장소였다. 그럼 그렇지. 어째서 이 녀석 들의 패턴은 매번 이리도 같은 것일까. 정말인지 한심스러워진다. "이런 이런, 나보다 먼저 손님이 와 있었군." 그렇다. 저번에 보았던 양건우란 놈이 이미 있었다. 아마도 포섭하려는 거겠지. 이미 대 치된 것으로 보아 양건우란 넘이 거절했나보다. ...내가 말을 꺼내자 - 그렇게 커다란 목소리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 시선이 나에 게 집중되었다. 뭐 못 먹을걸 먹었는지 얼굴이 붉어진다. 단체로 붉어지는 모습을 보니 꽤나 재미있다. 최대일이란 넘이 만면에 느끼한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뭐가 좋다고 웃는건지 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싱거운 놈인 것만을 틀림없다. "왜 불러?" 이미 저번 사건으로 선배에 대한 예우는 버렸고, 형태야 어떻든 나는 끌려온 것이다. 당 연히 이 넘들과 싸워야 할 것이기에 상당히 세게 나갔다. ...그런데 이해 못할 것은 이 넘의 반응이다. 이렇게 싸가지 풀파워 버젼으로 나갔는데 도 싱글싱글 웃는 꼴이라니- 입에서 침 떨어질 것 같다. 개기름이 번들거리는 얼굴이 내 얼굴에 바짝 다가오자 순간적으로 흠칫 놀랐다. "...너, 내 깔해라." -120점의 대답이군. 우선, 내가 묻는 질문과는 상관없는 대답을 한 것에 대해 -40점. 최 대일은 남자고 나도 남자이므로 나를 농락했다는 것에 대해 -40점. 언어순화가 현저히 필요하다는 점에서 -40점.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뭐... 뭘 하라고? 지금 이 넘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야? 깔? 까알? 나보고 네 놈과 사귀라는 소리냐? !!! 참을 인(忍)자 세번이면 살인을 면한다고? 차라리 살인하고 말테닷!!! 이 우라질 놈을 동강내 버리리라. 그런데 이 빌어먹을 최대일놈은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씨익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손 으로 잡았다. 어쭈우- 어디까지 가나 보자. 내가 가만있자 더욱 대담해져서는 내 입술로 손가락을 가져간다. 이미 양건우도, 최대일 의 똘마니들도 행동을 멈추고 최대일과 나를 지켜보았다. "...못 참아." 의아해하는 최대일의 턱을 갈겨주는 것으로 선방을 때렸다. "이게 어디서 사내새끼를 기집얘취급이야!! 크아아악~ 빌어먹을 자식, 너 죽었어." 나는 말 그대로 폭주했다. 정말 오랜만의 폭주였다. 최대일은 그 말에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뭐, 좋게 나가려고 하는데도 반항이군.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해야지. 야, 저 자식 잡 아." 뭐? 잡아? 잡기는 누굴 잡아!! 내가 내 몸에 손대게 놔둘 줄 알아?! 정말 오랜만에 몸 풀게 생겼다. 오냐, 내가 아~ 주 예뻐해주마. 내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가만히 서 있던 양건우도 갑자기 똘마니들 중 하나를 잡고 는 주먹을 날렸다. 당연히 선화파 녀석들은 양건우에게도 달라붙었고.. 어느새 나와 양 건우와 등을 붙이고 서 있었다. "여어- 통성명이나 하자. 양건우다. 넌... 금선유지?" "빌어먹을 쉑. 지금 여기서 무슨 통성명이야? 금선유다." "쿡쿡... 듣던 것과는 상당히 다르군." "웃을 시간 있으면 한방이라도 더 때려. 오랜만에 몸을 움직였더니 뻐근하군." 사실 그다지 몸을 움직일 것도 못 되었다. 양건우 그 자식, 고수는 고수였던 모양이다. 단 일방에 똘마니들을 차례차례 격파하고 있었다. 나도 놀고있던건 아니다. 하나하나 패 주면서 희열(?)까지 느꼈다. 내가 제일 마음에 안 들어하는 싸움 형태인 난투극은 - 정신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깔끔하게 좀 싸우면 팔목이 부러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 10분이 채 안 되어 상황 종 료, the end 상태가 되어있었다. 왠만한 똘마니들은 여기저기 널부러져 신음을 흘리고 있었고, 빌.어.먹.을 최대일과 몇몇 간부녀석들만이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몸을 지탱 하고 있었다. 최대일은 겁에 질린 눈으로 양건우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내.빼.었.다. 한마디로 튀었단 거다. 최대일이 그렇게 빠져나가자 몇몇 남은 놈들도 엉거주춤 최대일 을 따라갔다. 그다지 붙잡고 싶지도 않았던 터라 그냥 가게 놔두었다. "호오- 공주님, 센걸." 진지한 양건우란 자식의 말에 나는 발차기로 정중히 화답했다. 정말, 이 학교가 웃기긴 웃긴다. 난생 처음 남자에게 고백받질 않나, - 그것도 고백의 한 형태라면 - 공주님이 란 닭살만땅의 단어를 듣질 않나.. 예술하는 인간들은 원래 이렇게 조금씩 미쳐있는 걸까? 갑자기 선화예고가 두려워지기 시작하는 선유였다. 저 멀리서 성혁과 지성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누군가에게 내가 끌려갔다는 얘기를 들었 나보다. 그렇지만 그렇게 늦어서야 소용이 없잖아? 달려오더니 상황이 종료된 것을 알고는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는 나와 양건우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그만 봐, 이넘들아. 내 얼굴 닳아. "그렇게 볼 것 없어. 양건우가 다 해치운 거니까." 왠만하면 소문내고 싶지 않다. 오늘도 조용히 끝낼 심산으로 온 거니까. 양건우는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단지 그 뿐, 내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다행이도 조금은 눈치가 있 는 놈이었나보다. 성혁이 녀석은 주위에 뻗은 최대일의 똘마니들을 둘러보더니 휘파람을 불며 양건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휘유- 센대? 이렇게 된거 통성명이나 하자. 안성혁이다." "..한진 중학의?" "그래. 넌 휘성 중학이었지?" "아아- 그렇군.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걸." "마찬가지다." "양건우다. 반갑다." "난 한지성." 뭐가 그렇게 반갑다고 통성명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녀석들이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7시가 다 되어간다. 재빨리 짐을 챙겨 나오니 어디서 많이 본 오토 바이 세 대가 있었다. 민재, 하진, 율이였다. 내가 너무 늦어서 마중나온 거라고 한다. 조금만 더 늦게 나왔으면 학교 안으로 들어올려고 했다는 녀석들의 말에 순간 뜨끔했 다. 빨리 끝내서 천만 다행이었다. 머리도 다 말랐고... 꽤 소득이 있는 날이다. 양건우란 놈도 알고, 최대일 녀석도 해결되고. 좀 찜찜하기는 하지만... 오랜만에 몸을 풀었더니 뻐근하다. 집에 가서 물 받고 목욕이나 해야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안녕하세요. 질질 이야기를 끌고 싶지는 않지만.. 아직도 전개부분이라니... ㅠㅠ 하지만 이것도 최대한 줄인거라고 말씀드린다면... 믿어주시겠어요? 하핫- 1부... 내용만 시간상 3년이 흘러가니까... ㅠㅠ 그래도 꽤 진행된거죠? 1/6은 진 진행된거니까... ㅠㅠ 죄송하구요,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karin입니다. karin (primblade00@yahoo.co.kr) 혹(眩) - 아찔하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도련님.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생일... 아아, 그래... 오늘이 내 생일이었군... 눈을 뜨니 집사가 시중을 들기 위해 문 앞에 서 있었다. 집사의 정중한 인사말 덕분에 하진은 오늘이 자신의 생일인 것을 깨닫을 수 있었다. 사실 하진에게 있어 자신의 생일은 그다지 중요한 날이 아니었다. 자신만의 날도 아니었 고, 수천 수백만 사람들과 함께 태어난 날이었다. 어차피 인생을 살며 수십번을 겪을 날. 인간들이 만들어낸 '년'이란 개념 때문에 12개월 단위로 챙겨먹고 있을 뿐, 그것이 실질적으로 자신이 태어난 날은 아니었다. 지나간 시간을 되새기는 것 만큼 무의미한 일 도 없었다. "아니지... 나에게 무의미하지 않은 일이 있나... 쿡.." 언제부터 그랬는지, 혹은 왜 그랬는지는 자신도 모르지만 하진은 어렸을때부터 무엇엔 가 의미를 부여하고 집착하는 일이 드물었다. 아니, 아예 없었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주변에서는 항상 온갖 것이 넘쳐날 만큼 풍부 했었고, 그것들은 하진이 미처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언제나 하진의 앞에 대령되 었다. 형제도 없었기에 남에게 무언가를 빼앗길 염려도 없었다. 인간이란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야 소유욕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부족하다는 느낌 도, 필요하다는 느낌도 받아본 적이 없는 하진에게 무언가를 아끼고 사랑하라는 말은 너 무 어려운 주문이었다. "아버님께서 생일축하 메세지를 보내셨습니다. 갖고 싶으신 물건이 있으시면 최비서에 게 얘기하라고..." "아아, 됐어. 아버지는 아직 뉴욕인가?" "네. 생일날만큼은 돌아오시려고 노력하셨지만, 워낙 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이 있기 에..." "식사를 하도록 하지. 배가 고프군." "아, 네. 어떤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한식, 양식, 중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적당히 알아서 줘. 커피도." "네, 알겠습니다." 아버지의 부재에 관해 쩔쩔매면서 변명하는 집사가 불쌍해서 아침을 가져오라고 말을 바 꾸긴 했지만, 그다지 뭔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 집사도 마음씨가 너 무 좋아서 탈이었다. 5년째 같은 변명을 번복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생일이면 언제나 막대한 돈이 통장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이곳 저곳에서 보내온 선물 - 스포츠카서부터 화환까지 - 과 정중한 인사말을 담은 카드. 하지만 단지 그것 뿐 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생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꽤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하 진은 '생일'이란 날에 대해 그다지 애착이 없었다. 남궁하진. 남궁가의 성을 이어받은 자신에게 서슴없이 대하는 사람은 부모와 몇몇 비슷 한 입장의 사람들을 빼고는 없었다. 우리나라 최대의 기업이자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자산가인 '남궁'가문. 그리고 그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인 자신. 언제나 하진의 주위엔 사람들이 들끓었고, 그 사람들에겐 예외없이 가식적인 웃음만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식적인 웃음만을 보고 자라난 하진은 '웃는다'라는 행위가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게 되었다. 얼굴을 찡그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좀더 위선적이 라는 것 빼고는. 어느새 하진의 표정은 무표정으로 일관되게 되었다. '그'를 만난것은 초등학교 6학년때였다. 아니, 예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긴 했었지만 마주칠때마다 단지 신경을 거스르는 얼굴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친우이자 성화종합병원의 원장인 이성호씨의 조카였는데, 부모님이 항 공기 사고로 돌아가시면서 그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자신의 몇 안 되는 친 구이기도 한 민재는 이미 그에게 빠져서 브라더 컴플렉스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단지 몇 번 멀리서 보았을 뿐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관심도 가지 않았다. 게다가 그 집에 서 민재와 놀 때도 잠을 자는게 대부분이었다. 가느다란 흰 팔에는 언제나 링겔이 꽂아 져 있었다. 내가 '그' 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흰 눈이 소복히 쌓이던 밤이었다. 왜 일어났는지는 몰랐다. 다만, 갑자기 잠이 확 깨 버린 것만은 분명했다. 옆에서는 민 재가 새근새근 잠자고 있었다. 너무 곤히 자고 있는 터라 깨우고 싶은 맘도 들지 않았기 에 하진은 산책이나 할까 하고 가운을 걸쳤다. 민재 녀석이 자고 가라고 하는 바람에 어 쩔수 없이 머물게 되었지만, 사실 민재네의 화목한 분위기는 하진에게 이유없이 위화감 을 주었기에 피곤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바깥을 내다 보니 눈이 쌓여 있었다. 하얀 눈에 달빛이 반사되었고 민재의 어머니가 좋 아하시는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신비로운 분위기마저 연출했지만, 하진에겐 그다지 감흥없는 모습이었다. 단지 달이 떴고, 눈이 쌓였고, 꽃이 피어있을 뿐이었다. 그것 뿐이었다. 겨울, 게다가 눈까지 내렸으므로 꽤 추웠다. 현관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다시 안으로 들 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할까, 하고 주춤하는데 어둠 사이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였다. '도둑인가.' 도둑이라면 잡아야 했다. 하진은 겨우 초등학생이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경호와 신체 단 련을 목적으로 여러가지를 배웠기에 왠만한 성인 남자 서너명은 가볍게 쓰러뜨릴 수 있 었다. 혹시 몰라 총기와 나이프 다루는 법까지 배운 그였다. 그렇기에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를 향해 서슴없이 손을 내밀었다. 어둠 속의 그 물 체는 흠칫 놀라서는 도망가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조급하고 서투른 걸 보니 초짜인 모양 이었다. 왠지 모를 유쾌함을 느끼며 하진은 도망가는 이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놀랐다. 어린얘 - 자신과 비슷한 정도의 -인 것이다. 얇은 팔목을 실감하면서 하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상하게 주위의 어떤 사물도 보이지 않고 단지 그 가느다랗고 흰 손만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아이는 천천히 하진을 향해 돌아보았다. - 하진은 지금도 그 때를 기억할 수 있었 다. 천천히 돌아서면서 환상에서 실체로 변화하는 듯한 그 모습에, 하진은 난생 처음 경 탄이란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 가슴이 두근거리며 방망이질을 했다. 아무런 의미가 없 던 달과, 눈과, 매화꽃이 그 아이의 배경이 됨으로서 가슴 아플 정도로 깊이 낙인되었 다. 천사. 그것은 천사였다. 천사따위를 믿을 만한 나이도 아니었고, 믿을만큼 순진하지 도 않았다. 흔히 천사라 하는 것처럼 백금발에 엷은 하늘색 눈동자도 아니었다. 하지 만... 순간적으로 '천사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까만 머리카락이 마구 자란 모습으로 어깨위에서 찰랑대었다. 창백한 피부가 보름달에 반사돼 빛나보였다. 두 볼은 차가운 공기 탓에 분홍빛으로 엷게 채색되어 있었고 붉은 입술을 꽈악 악물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진을 사로잡은 것은 그의 두 눈, 그리 고 두 눈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었다. 짙은 푸른색의 빛나는 두 눈. 마치 사파이어같은 그 눈은 한없이 깊고, 한없이 투명했 다. 인간의 눈이 단지 '눈'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벗어나 그렇게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을 하진은 그때 처음 실감했다. 두 눈 가득히 고여 주체를 못하고 흘러내리는 눈물에 하진 은 이유없이 가슴이 벅차 올랐다. 소년은 하진이 붙잡은 팔을 빼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하진은 놓아주지 않았다. 인 간인 것 같지 않은 그 모습에 손을 놓기라도 했다간 꿈처럼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기가 발동했는지 얼굴이 시뻘게지면서까지 하진을 뿌리치려 했지만 상당히 약한 듯, 하진에겐 그리 버겁지 않았다. 그러자 눈물을 보이기 싫었던 모양인지 고개를 돌리고는 가슴을 들썩이며 얘써 눈물을 참았다.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하진은 자신도 모르게 소년에게 손을 뻗어 안아주었다. 맹 세코 그는 스킨쉽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왠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본능을 타고 기어올랐다. 몰래 울고 있었던 모양이다. 소년은 하진의 어깨를 밀 어내려 잠시 발버둥쳤지만, 이내 끅끅거리며 억제하던 울음을 터뜨렸다. 하진은 아무 말 도 하지 않은채, 소년을 꼬옥 안고는 머리를 쓸어내려 주었다. 한동안 울다가 울음을 그친 소년은 얼굴을 붉힌 채 하진의 품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쑥쓰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이며 "고마워..." 하고는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름이 뭐야?" 하진이 물었다. 그러자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살며시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 예뻤기에 하진은 갖고 싶다- 고 충동적으로, 그러나 강하게 생각하고 는 스스로 놀랐다. '갖고 싶다'니... 자신이 무언가를 '갖고 싶다'고 생각하다니... 조그만 입술을 달싹여 "금선유."라고 간단히 대답하고는, 소년은 환하게 웃음지었다. 그 웃음에 순간 멍해지며 하진은 "남궁하진이야..."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결심했 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지고 말거야...' "쿡... 그렇게 결심을 했는데 4년동안 바라만 보다니- 나도 꽤나 심약한 사람인 모양이 야..." 어쭈? 심약한 인간이 듣는다면 억울해서 가슴치고 땅파며 울겠다... -_-++++ 민재는 하진을 노려보았다. 오늘은 하진의 17번째 생일날, 율이와 선유가 클럽 하나를 빌려 준비를 하는 동안 하진이 녀석을 붙잡으라는 특명을 받고 이렇게 왔지만, 어쩌다 보니 술판까지 벌려 이 녀석의 사랑고백을 듣고 있는 것이다. '아마 4년가지고는 안 될거다' 라고 심술궂은 생각을 하며 민재는 씨익 웃었다. 남궁하진이 얼마나 무서운 인간인지, 자신은 몸서리칠정도로 뼈져리게 안다. 그런 이 녀 석이 목숨을 걸어서까지 가지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금.선.유. 그 녀석이 또 어떤 녀석인가. 천하의 남궁하진이 4년 넘게 고백도 못 하고 있으니, 그것 만으로도 대단한 녀석이다. 적어도 앞으로 2~3년은 얌전히 보기만 해야 할 거다. "큭큭..."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아마도 자신은 심각한 브라더 컴플렉스였나보다. 선유녀석 이 오면 부비부비-를 하면서 남궁하진 이 녀석 좀 골려주어야겠다.(이넘아.. 생일날까 지 심술을 부리냐...) "미쳤어, 미쳤어. 내가 얘 지키고 있으랬지, 누가 술 먹으랬어? 너네 나이가 몇인데 술 이야!!! 남궁하진, 이민재!!! 나가 죽엇!!!!" 하지만 술판을 보고는 폭주하는 선유 앞에 얌전히 무릎 꿇고 두손 모아 싹싹 비는 이. 민.재. 일 뿐이었다. 한여름 7월의 마지막 주였다. 혹(眩) - 아찔하다 부제 : 선유가 모르는 것, 삼인조가 모르는 것, 그들이 모르는 것.... 그 첫번째, 선유가 모르는 것... 08:53(pm) '으윽- 벌써 9시군... 큰일나겠는데.' 선유의 발걸음이 조급해졌다. 빌어먹을 축제 준비를 하다 보니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물론 늦는다고 고모님께 미리 말은 드려놨지만... 요즘 민재녀석이 상당히 심상치 않은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1주일을 내리 저녁에 들어오다니- 사실 자신은 돌아다니는걸 그 다지 즐기는 성격이 아닌지라 지금까지 이런 일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오늘 민재에게 걸린다면 꽤나 귀찮아질 것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도대체 자신이 왜 이리 소심해졌단 말인가... 차마 벨을 누르지 못 하고 열쇠를 꺼내들며 제발 민재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고 울부짖는 마음이라 니... 하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민재와 마주치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역 시라고 해야할지, 혹시라고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신은 선유의 편이 아니었다.(특별히 더 미움받고 있는 걸까?) 기껏 열쇠로 조용히 들어왔건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자신의 앞엔 기세등등한 민 재, 율, 하진이 서 있었던 것이다. 저, 저것 봐라. 노려보는 꼴이라니... 안 그래도 미칠 것 같은데... 엎친데 덮친 격이군. 후- 선유는 무의식중에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만 까딱인 채 2층으로 올라갔다. 오늘만은 저 녀석들을 피해야 할텐데... 재빨리 방에 짐을 내려놓고 집안에서 유일하게 녀석들의 마수를 피할 수 있는 화장실 (-_-;;)로 들어가려 했건만...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그 녀석들은 방문앞에 턱 걸쳐서 지긋이 노려보기만 하 는 것이었다. 정말인지 집요함이 지나치는 녀석들이다. 사실 좀 마음에 걸리기는 한다. - 이 넘들이 의외로 쪼잔하고 잘 삐진다는 것은 입학 사 건으로 이미 몸서리쳐지게 체험한 바 있으니 - 이 녀석들이 이러는 게 자신을 걱정하기 때문이란 것도 알고는 있다. 그러나 절대 먼저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저 녀석들의 유도심문 에 학교 축제 이야기와 공연날짜, 자신의 포지션 등을 밝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 은 선유가 죽었다 깨어나도 차마 말할 수 없는 극비사항이었기에 차라리 계속 묵비권을 행사하기로 하였다. 묵묵히 짐을 정리하는 선유에게 민재가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까지 어디 있던거야..." "학교." "...왜?" "학교일 때문에." "학교일이라는게 매일 방과 후 9시까지 해야 할 정도야?" "응." 틀림없다. 틀림없이 자신의 무성의한 대답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예리한 질문이 나올 것이기에 선유는 저 녀석들을 내보내야한다고 마음먹었다. "나 샤워해야돼." 당연히 이 짧은 말에는 - 그 일에 관해서는 그만 말해라, 나 지금 피곤하다, 더이상 얘 기하고픈 마음은 없다, 내 방에서 나가달라, 내 방문 막지 말고 비켜라 -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건만... 깡그리 무시한 채 다시 지긋이 노려보기만 하는 녀석들이었다. 저정도면 귀엽게 봐줄수 도 없는 것이다. 이것들이 정말...!! "원 율, 남궁하진. 문에서 비켜. 샤워할거야." "..." "미안하지만... 좀 물을게 있어서..." 그나마 율이는 조금 난처한 기색을 보였지만.. 남궁하진 저 녀석은 뭐란 말인가. 여전 히 자신을 째리는 저 모습이라니... 꿈에 볼까 무섭다. 지금 이 녀석들은 살기를 폴폴 풍기고 있었다. 다른 인간 같으면 분위기에 짓눌려서라 도 입을 열기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저 녀석들이랑 같이 다닌 게 벌써 몇년인가. 그게 저 녀석들의 수법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되도록 무시하려고 애썼다. ...하지 만 무섭긴 무섭다. ㅡ.ㅜ "학교 일이라는게 뭐야?" "학교 일이 학교 일이지, 뭐 다른게 있나." "진지하게 대답해, 금선유. 9시까지 해야할 학교 일이란게 뭐야?" '아니.. 이 자식들이...' 이렇게 되면 자신을 걱정해주고 자시고를 떠나서 열받는다. 이건 그야말로 딱 의처증 증 세이다. 도대체 사내자식이 9시에 들어오는게 뭐가 문제인지, 오히려 자신이 묻고 싶었 다. 요즘은 여자얘들도 10시에 외출하는 시대다. 게다가 자신들은 걸핏하면 외박에, 몇 박 몇일 무단으로 사라지기까지 하면서 9시에 들어오는 자신을 나무라다니,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 아닌가. "남궁하진, 이민재, 원 율. 너희 지금 뭐하는 거냐." 자신이 녀석들의 이름을 성까지 같이 부를 때는 상당히 열이 뻗쳐 있을 때라는 걸, 이 녀석들도 알고 있었나 보다. 약간 움찔하는 것도 같다. "내가 9시까지 들어오는게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지?" "그럼 문제가 아니야? 보통 학교일을 9시까지 할 이유가 없잖아?" "그래서? 내가 학교일을 핑계로 어디서 다른 짓이라도 하다 왔단 말이야?" "그건 모르는 일이잖아?" 정말, 정말정말정말정말정말정말정말정말~ 열 뻗친다. 너무 열을 받아서 머리의 뇌하수체가 튀어나올 지경이다. 자신이 이 녀석들과 처음 만나던 시기에 상당히 약했다는 건 인정한다. 당시의 난 내가 보아도 비에젖은 강아지 같았으니까. 한꺼번에 부모님을 잃었고, 건강상태는 최악을 달 리고 있었었다. 하지만 그건 옛날 일이다. 나도 그들과 같은 고 1의 건장한 남학생이 다. 그들이 자신을 같은 위치에서 보고 동등하게 대하는 친구가 아니라 돌봐주고, 보호 해주어야 할 대상으로 본다는 점이 선유를 자극했다. 선유가 그토록 노력을 했음에도, 이들과 자신의 관계는 평행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봐, 너희는 뭔가 착각해도 엄청나게 착각하고 있어. 나도 너희랑 같은 고 1 남학생 이야. 현재 너희가 "하고싶다"고 느끼는 것에 나도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설사 내 가 학교일을 핑계로 다른데서 놀다왔다고 쳐. 그렇지만 방과 후 친구들과 노는 건 보통 고등학생 사이에선 흔한 일 아냐? 아니, 오히려 고 1 사내자식이 9시에 들어왔으면 일 찍 귀가한거라고 봐야겠지. 내가 알기론 너희들의 평균 귀가시간은 12시를 웃도는 것 같 은데?" 선유는 싸늘히 한 마디를 내뱉고는 율이와 하진을 지나쳐 방을 빠져나갔다. 샤워를 하 고 싶었다. 열이 뻗쳐서 살벌하게 나가기는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조마조마했었다. 객관 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자신이 열이 받은것과 요즘 귀가시간이 9시라는 것은 무관한 것 이었다. ^^ 사실 그다지 말 못할 일도 없다. 보통 하는 학교 축제인 것이다. 문제는... 이번 학교 축제에서 자신이 맡게될 포지션이었다. 선유는 오늘 자신의 꼴불견을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 녀석들이 본다면 몇 년은 고 이고이 썩혀두면서 놀릴지도 모른다. 차마 못 볼 꼴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월요일 H.R시간에 왜 자신은 졸고 있었던가. 분명 자신의 자리가 창가쪽이긴 하지만.. 가을의 햇살은 너무 따뜻해 잠 잘 조건을 충분 히 만족시키기는 했었지만... 그 음모가 진행되는 한쪽에서 멋도 모르고 고이 잠들어 있 던 자신이 저주스러운 선유였다. "자, 올해 10월 말에 선화제 있는거 알지? 오늘 H.R 시간에는 그 건에 대해 얘기하겠 어." 월요일 5교시 H.R시간. 선유는 부반장인 우희의 발표에 들뜨는 반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 다. 왜 저리 축제 이야기만 나오면 들뜨는 건지... 옆에서는 지성이가 "조용, 조용히 해!"라고 외치며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지성이가 우리반 반장이었던 모양이다. (저번에 단영이가 학생총의회 간다고 했는데, 이 학교는 학급임원이 학생회일을 하는게 아니라 따로 뽑습니다. 참고로 단영이는 1학년 미술부부장입니다.) 선화고의 축제는 이 근방에서 꽤 유명한 모양이었다. 매년 '선화제'와 '체육대회'가 번 갈아가며 치루어지는데, '체육대회'가 선화고 학생들만이 즐기는 소규모 축제라면 '선화 제'는 외부인까지 초청해서 사흘 밤낮으로 열리는 큰 축제였다. 첫째날은 내부 공연, 둘째날은 개방 공연, 마지막날은 뒷풀이로 이루어져 있는데, <선화 >는 예술계 고등학교이기 때문에 써클이 없어서 각 반별로 축제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자, 우리 반은 뭘로 할까?" 지성이가 조용히 말했건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아이들에게 무참히 씹혔다. 이렇 게 되면... " ...이것들이!!! 조용히 안 해!!!" 지성이의 폭주에도 익숙해진건 자신과 성혁, 단영이 뿐인 모양이다. 저 단아한 얼굴로 폭주- 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안 어울린다. 그러나 아이들도 만만치 않게 들떠있었는지, 곧 다시 떠들어대기 시작하였다. "연극! 뭐니뭐니해도 연극이지!!" "아냐, 역시 장사는 먹을거란 말이야!!" "호스트 바 하자! 외부인 추천을 많이 받아야 뒷풀이 빵빵하게 하잖아?" "야, 그럼 호스트바는 안돼. 인물이 없잖아. 쿡쿡-" "얼씨구, 놀구 있네. 남말하지 마." "연극, 먹거리, 호스트 바... 우희야, 칠판에 적어줘. 자아- 투표한다. 손들어." 지성이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다. 자신의 얼굴처럼 깔끔하고 지적인 목소리다. 따뜻 한 9월의 햇살, 점심 시간 후의 나른한 5교시,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부는 창가자리... -그러나 이 모든것에 취해 잠이 들어 부반장 우희의 사악만땅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게 천 추의 한이었다. "자, 그럼. 선유랑 해민이가 주인공인걸로 결정 본다." "오케이-" "야아, 이번에 우리 뒷풀이 장난 아니겠는데? 기대된다." "선유랑 해민이가 있어서 다행이야." ... 눈이 번쩍 뜨였다. 아니, 이것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눈을 비비며 고개를 두 리번거리고 있는데 지성이가 다가와서는 말했다. "솔직히 네가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정말 괜찮은거냐?" 어이, 무슨 소리야? 괜찮다니, 뭐가 괜찮아? "아무리 그래도 백설공주라니.. 하긴, 너랑 어울리기는 하지만..." 뭐? 백.설.공.주? 그 얼굴 허옇고 멍청하기만 한(단지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하핫 ^^;;) 역할이라고? "무슨 소리야!!! 내가 백설공주라니!!!" "어? 아까 못 들었어?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우리 반 남녀 역할 바꿔서 연극한다고. 백 설공주에는 너, 왕자는 해민이, 이렇게 배정되었어. 나머지 역할은 제비뽑기로 결정보 기로 했고." "미쳤어!! 내가 무슨 백설공주야!! 얼어죽을, 못해! 나 안해!!!" 그러나 내가 그 말을 마침과 동시에 반 아이들은 전부 행동을 멈추더니 천천히 나를 향 해 돌며 째려보았다. 으윽- 무슨 집단세뇌에 걸린 인간들 같다. 우희가 내앞으로 달려와서는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들었다. "무슨 소리야!! 결정한게 언젠데, 안하긴 뭘 안해!!!" "난 자고 있었단 말이야. 너네 맘대로 정하는게 어디있어!!!" "신성한 H.R시간에 자고 있었던 것만으로도 네 역할은 결정났어! 누가 자래?!" "그렇지만 남사스럽게 백설공주가 뭐야? 내가 미쳤어!! 사내자식이 백설공주라니, 누가 그 해괴망측한 생각을 해낸거야?!!" "나다! 어쩔래!!" "아무튼, 난 안해. 너희들끼리 나머지 배역을 정하든 어떻게 해봐." 그러자 주위의 모든 녀석들이 나를 강제로 붙잡았다. "미안하다, 금선유. 이렇게 되면 우리도 어쩔 수 없다." "그래. 사람들의 추천을 많이 받을수록 뒷풀이 비용도 많아지잖아. 우리를 용서해라." "으악- 이 자식들!!! 뭐하는 짓이야!!! 너네 죽었어!!!!" ...정말 억지 춘향이다. 좌우로 나를 붙잡는 녀석들 몇을 패 주긴 했지만 다수의 힘에 결국은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더니 녀석들은 내 의견을 무시한 채 쿵떡쿵떡 뭔가 이야기 를 하고는 치수를 재야 하니 웃옷을 벗으라고 했다. 반항도 해봤지만 결국 억지로 옷을 갈아입을 위험에 처한 나는 어쩔 수 없이 배역을 맡겠다는 약속을 해야했다. 최우희... 네 녀석의 변태적 성향을 미리 알아차렸어야 하는건데... 예술계 여성들의 파워는 정말 만만히 볼게 못 된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여자라 때 릴 수도 없고... 사내 자식이었음 내 주먹 다발을 맞아도 벌써 한참전에 맞았을거다. 그래도.. 지성이도 배역을 맡았으니.. 덜 쪽팔리겠지...? ㅡ.ㅜ 선유는 물 속으로 머리를 담구며 고개를 저었다. 꼬로록- 아무튼, 그런 이유로 이번 축제는 극비에 붙여질 것이다. 절.대.로 저 녀석들에게 밝힐 수는 없다. 아까 그렇게까지 화를 냈는데 설마 다시 잡아다 물어보기야 하겠어? 그러나 선유가 모르는 것 하나.. 그 녀석들은 선유의 입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정보 를 알아 낼 수 있었다. 혹(眩) - 아찔하다 그 두번째, 삼인조가 모르는 것... "으음.. 저렇게 세게 나올줄은 몰랐는데?" "글쎄 말야." "할 수 없군. 자신의 입으로 듣고 싶었건만." 선유가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황급히 샤워실로 사라져 버렸기에 더 심문할 수도 없었다. 뭐 쫓던 뭐 마냥 남겨진 세 사람은 선우의 방이 마치 자신들의 방인 것처럼 편안하게(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뻔뻔하게)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선유는 모르지만... 아니, 앞으로 영원히 몰라야 되겠지만.. 사실 선유의 입이 아니더라도 정보를 캐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선유네 학교 아이 중 하나를 잡아다 물어볼 수도 있고 - 엄밀히 따지자면 협박이다 -_-;;; - 컴퓨터로 선 유네 학교 내부 정보를 뽑아 추측할 수도 있었다. - 일반적으로 해킹이라고 하는 거다 - 선유 몰래 감시자를 붙일 수도 있었고, 학교 내에 정보통을 고용할 수도 있었다. -누 가 봐도 스토킹이다 - 최악의 상황에는 선유가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비밀 일기장(옷가지에 포개서 쇼핑백 에 넣어 침대 밑에 고이고이 숨겨두었다)을 훔쳐볼 수도 있는거다. 물론 그건 최악의 상황이고, 왠만하면 사생활 침해는 하고 싶지 않았기에(지금까지 한 건 뭐냐..? -_-++) 선유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어떻게 하지?" "아마 학교일이 맞기는 맞을거다. 그 녀석은 고지식한 데가 있으니까." "음.. 그럼 학교 녀석 중 하나를 붙잡아서.." "자칫하면 골치아파져. 그녀석이 선유한테 불면 그야말로 끝장날거다." "아아- 폭주하겠군."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의식중에 그리고 무의식중에 선 유를 보호하려 한다는 것도, 친구가 아닌 보호자처럼 군다는 것도, 그것을 선유가 얼마 나 질색하는지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위험한 놈이 바로 금선유였다. 물론 그 성격과 외모가 반비례 한다는 점은 충분히 인지했다. 하지만 그 경우는 오래 사귀었을 때 얘기고, 보통은 그 외모만으로 선유를 판단했다. 여자 뿐만이 아니라 남자까지 끌여들이는 그 아름다움 때 문에 선유 모르게 자신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 지독하게 둔한 금선유는 죽어도 모를 거다. 인간이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종족이다. 일단 '미(美)'라고 판단한 것에 대해서 는 지독한 숭배심과 정복욕을 가지는 것이다. 차라리 굉장히 남성적인 미(美)를 가졌다 면 여성들에게만, 굉장히 여성적인 미(美)를 가졌다면 남성들에게만 어필했을텐데, 어찌 된 일인지 이 놈은 중성적인 미(美)를 가지고 있어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신의 매력 을 과시하는 것이다. 남들보다 페로몬이 배로 많은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중학교 시절 내내 금선유는 러브레터와, 선물에 치여 살았다. 물 론 그 녀석은 모른다. 애초에 그런데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데다가, 그 녀석이 보기 전 우리가 전부 헤치웠기 때문이다. 그것만이라면 상관없지만 힘 깨나 쓴다 하는 놈들은 하나같이 선유를 노렸고, 강제적으 소유하려고 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싸운 이유 중 절반 이상의 원인이 바로 자신이라 는 걸 당연히 모를 금선유다. 그런 얼굴을 가지고, 그런 둔함을 가지고, 그런 성격을 가진 금선유가 걱정이 되는 건 너무나 당연한거다. 물론 상당히 싸움을 잘 하기는 하지만, 왠만한 고수들이 떼거리로 몰려든다거나, 무언가로 위협한다거나, 선유에게 약을 먹여서 꿀꺽해 버리기라도 하 면....!!! 생각만 해도 피가 쏠리는 삼인조였기에 선유에게 아무리 핍박을 받는다 하더라도 절대 감시의 눈초리를 풀 수 없었다. "선화 학생회에 아는 사람이 있어." 민재가 폰을 들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마당발로 통할 정도로 사교성이 뛰어 난데다 보통 인간이 호감을 지닐만한 조건을 가진 '킹카'였으므로 서울 내 모든 학교에 아는 사람이 거의 한두명은 있었다. "어? 어, 나다. 이민재. 잘 지냈냐?" "그래, 나야 뭐... 어, 정말?" "아, 나중에 소개시켜주마. 알았어." "그 카페? 요즘 별로 안 나갔는데." "그래, 고맙다. 오냐, 이놈아." "응. 그래, 알았다니까." ... 민재의 수다가 끊길 것 같지 앉자 하진과 율의 눈동자가 점점 차가워졌다. 그 눈빛을 느 낀 민재는 "하하.. 그런데 말야, 내가 궁금한 것이 있는데..." 하고는 급히 주제를 바꿨 다. 비굴하다고 해도 할 수 없다. 저 살기는 직접 느껴봐야한다. 그나마 선유에게는 최 소한의 감정을 담아 보낸 살기였지만, 자신에게는 가차없다는 걸 알고 있는 민재였다. 몇번에 걸친 확인과 질문 끝에 "그래, 잘 있어라. 나중에 한턱 쓰마." 라고 말하며 전화 를 끊은 그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하진과 율에게 자랑스러운 듯 브이자를 만들어 보였 다. "이민재, 꼴깝떤다." "이민재, 니가 얘냐?" ...이것들은 나만 미워해. ㅡ.ㅜ "안 말한다." 저 눈빛 변하는 것좀 봐라. 으휴... "얼마 있으면 '선화제'를 하는데 선유네 반... 1학년 3반맞지? 연극을 한대. 선유가 주 인공인가봐." "연극? 귀찮은건 질색인 금선유가?" "그래, 나도 믿기진 않지만..." "제목은?" "쿡쿡... 그게... <백설공주> 패러디란다." "...유치하군." "그래서 그렇게 안간힘을 쓰며 숨기려고 난리를 피웠구나." "쪽팔리기도 하겠지. 고등학생이나 된 녀석이 초등학교 버젼 연극을 하게 생겼으니." "그럼 선유는 왕자님인가?" "...어울릴 것 같아." "아아..." "우리가 가면 엄청 화내겠지?" "하지만..." "그래..." "그렇게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수는 없잖아?" ..자고로 인간의 됨됨이를 따질려면 그 친구를 보라고 했다. 성현들의 말씀은 거의가 피 와 살이 되는 거다. 세 녀석이 동시에 말을 지껄일 정도면. 사악함이 폴폴 풍겨나오는 세 사람이었다. ...그러나 완전무결한 듯한 삼인조도 모르는 게 있었으니... 선우는 왕자님이 아니라 공 주님이라는 것이었다. (만약 공주님인 것을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지했을 거 다.) 그들이 모르는 것... "으하하하하~ 드디어 완성이다!!! 비주얼도 되고, 내용도 되고. 돈들아, 어서 굴러 들어 오거라~~~!!!" 현재 선화예고 미술부 1학년 3반 부반장 직을 맡고있는 하우희는 한손에 <백설공주>이라 는 대본을 들고는 미친듯 웃어제꼈다. 주변에서는 이미 익숙한 듯, 차마 그녀 근처에 다 가가지는 못한 채 한숨만 쉬고 있었다.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그래, 나야." "아아, 그래. 다행이 잘 해결되었어. 응, 참여시켜. 전부다." "그래, 이번에 우리가 짱이라니까. 뭐니뭐니해도 그 금.선.유.가 있잖아. 오호호호호홋 ~~ 너희 반 그 짜리몽땅이랑 비교가 안 되지. 그야말로 여.왕.님.이라구." 전화통을 붙잡고 무언가 열심히 설명을 하는 하우희에게서 검은 오라가 폴폴 풍겨나오 고 있었다. "누나 왜 저런대?" "몰라. 뭔가 마음에 드는 장난감이라도 생겼나보지, 뭐." 무심한 듯 말하는 하우희의 두 남동생들과 함께, 달빛은 은은히 그 창백미를 과시하고 있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오늘은 여기까지. 참, 늦어서 죄송했습니다. 하핫 ^^* karin (primblade00@yahoo.co.kr) 혹(眩) - 아찔하다 선화예술고등학교의 축제는 10월 22일부터 24일까지이다. 참고로 오늘은 10월 22일 금요 일. 학교 내부공연을 시작으로 드디어 <백설공주>가 막이 올랐다. 어떻게 치열한 접전 이 벌어졌던 강당의 황금 시간대를 잡아 놨는지는 모르지만 연극을 교실에서 할 수는 없 었기에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마도 지성이와 우희의 치밀한 뒷로비와 연줄 덕분일 것이다. 첫 공연 후 아이들에게 이것 저것 지시를 내리고 부족했던 점을 말하는 지성이와 우희를 보니 새삼스레 임원이란 게 느껴졌다. 선우는 재빨리 빌어먹을 드레스를 벗어버리고(차 마 뜯어버리지는 못했다. 내일도 입어야 했기에. ///) 가벼운 반팔차림으로 상자에 앉았 다. 다음 팀을 위해 아이들이 대도구를 치우느라 바삐 움직였지만 도와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얄밉다고? 치사하다고? 웃기지 마라. 이 역할 팽개치지 않고 끝까지 해 준 것만 으로도 저 놈들은 나한테 절해야 한다. 처음에 이 <백설공주> 개정판을 보고 얼마나 치를 떨었던가. 하우희의 사악함은 그야말 로 하늘을 찌르고 땅을 뚫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단순한 사악만땅 정도로는 표현이 안 되었다. 처음 부분은 자신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면 되니까 그나마 쉬웠지만... 나중 에 가서는... "어머"라든지, "발그레"라든지, "러브러브 광선-"따위를 지껄여야 했다. 기왕 이렇게 된거 원흉인 하우희의 뻔뻔함이나 무너뜨려보자고 결심하고는 개정판에 대 해 엄청난 악평을 했건만... 우희는 담담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거 3류대본 맞아. 기본도 철저하지 못하고, 내용도 없고, 초반도 썰렁 후반도 썰렁이 지. 그.치.만. 돈벌이는 되니까 상관없어. 나는 최대한 상.업.적.으로 쓴 거니까 말야. 오호호호호~" ...라고 하는데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하우희의 철면피를 무너뜨리려면 10년은 이르다 는 생각만이 마구마구 들 뿐. 그나마 나의 상대역인 해민이가 나와 같이 반대를 해서 우 희의 강력 저지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좀 소프트해졌다. 해민, 이해민이 누구냐 하면 일명 '스위트 댄디 보이'라 불리우는 우리반 최고의 미남이 며 참고로 성별은 female, 즉 여성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중성스럽게 생긴 나와, 마찬가 지로 중성스럽게 생긴 해민이는 마음이 잘 맞았다. 보통 여자와는 달리 삐지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돌봐주는 위치이기 때문에(나는 워낙 남의 돌봄만 받아서인지 돌봐주는것을 상당히 좋아한다) 나와 해민은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뭐 하냐? 이거나 마셔라. 공연 한번 했더니 지친다." 양반은 못 되는 여자군. "쿡쿡..." "뭘 헤실거려? 약 먹었냐?" "으이구, 이해민. 너 그렇게 터프해서 누가 데려가냐? 여성스러움을 강조해야지, 여성스 러움. 프리티, 큐트, 스위트, 소프트. 여성스러움의 4대 대명사를 좀 본받으라구." "우~ 닥살. 당신이나 많이 하셔. <백설공주>께서 워낙 프리티하고 큐트하고 스위트하고 소프트해야 말이지.." "죽.인.다."(-_-++++) "쿠쿠, 마음대로 하세요. 공.주.님." "아씨~ 젠장... 겨우 잊었는데 왜 다시 기억나게 하고 있어!!!" "뭐 어때. 이제 그만 좀 현실을 받아들이고 좀 뻔뻔스럽게 해. 지성이를 본받으라구." 참고로 지성이는 <여왕>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굉장히 열연 중이다. 오호호호호~ 하는 여왕 특유의 웃음소리에서부터 다중인격적 싸이코 모습까지 모든것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 우희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이는 것이다. 대부분의 반 아이들은 지체높은 집안 자손 같이 우아하고 단아하게 생긴 지성이의 외모와 그에 대비되는 싸이코적 성격- 폭주 -과 의 갭에 당황스러워하며 얘써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쯧... 삼인조 녀석들은 그날 이후 내가 집에 늦게 들어가도 아무말이 없다. 그정도로 포기할 성격들이 아닌데... 섬세라던가, 세심이라던가, 심약이란 단어와는 9층담에 바리케이트 까지 쌓은 놈들이다. 하지만 나로써는 관심만 꺼준다면 아무래도 좋다. 오늘 공연은 방금 전에 학교생들에게 보여주는걸로 끝났고... 이제 남은건 내일 한차례 의 공연. 그것만 잘 넘기면... 잘 넘기면... 에이, 귀찮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내일 공연까지 정확히 23시간 17분 13초 남았다. <선화제> 선화제는 선화예술고등학교의 자랑 중 하나인 2년 단위의 축제였다. 아무래도 예술인을 지향하는, 또 예술에 일가견이 있는 아이들을 모아놓았기 때문에 전체 작품들의 수준이 여느 학교에 비해 월등이 높았고 그러면서도 상업성과 흥미를 적절히 배치해 구내에서 가장 유명한 축제가 되었다. 청소년 잡지에서 취재를 나왔을 정도이며, 몇 년 전에는 뉴 스에도 한 번 나왔었다고 한다. 물론 <선화>가 예술계 고등학교라는 점과 학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해 준다는 점도 있지 만, <선화제>가 유명해진 가장 큰 이유는 선화예술고등학교 학생들이 <선화제>에 온갖 정성을 다 들이기 때문이었다. 고3들은 수능까지 미뤄두고 <선화제>준비에 여념이 없으 니 할 말 다 한거다. 자신들의 힘으로 뭔가를 이룩하고, 그 승패에 관계없이 보람만으로 정열적인 노력을 투 자한다고? 웃기지 마라. 요즘 학생들이 어느 학생들인데 득도 안 되는 일에 피보겠는 가. 학생들이 그렇게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선화고는 2일날 개방공연을 마치고 나면 3일날은 교실과 학교를 정돈하고 뒷풀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2일날 일반인 투표에서 점수를 많이 딸수록 그 뒷풀이 비용 이 많이 나왔기에 학생들은 목숨을 걸고 선화제를 준비했던 것이다. 뒷풀이 전체비용은 언제나 더도 덜도 아닌 500만원으로 책정되었고 이것을 1,2,3학년의 36반이 등수에 따 라 나눠 가져야 하니 치열할 수 밖에 없었다. 1등은 100만원을 받아 커다란 카페를 빌 려 뒷풀이를 하고, 꼴등(=36등)은 3만원을 받아 교실에서 과자나 뜯고 있어야 하는데 어 느 누가 필사적이지 않겠는가. 아무튼 이 야비하다면 야비한 제도로 인해 학생들은 <선 화제>에 엄청난 재능을 투자하게 되었고, 또 그로 인해 <선화제>는 유명해졌다. 10월 23일 (토) 02:00(pm) "어서오세요, 1학년 11반에서 매직 디너쇼를 하고 있답니다~" "아리따운 미인들이 시중을 드는 <요.정>으로 오세요~" "저희 부에 꼭 한번 들려주세요." "저희 부 꼭 좀 추천해 주세요. 음료 서비스로 드릴께요." 시끌벅적함 속에 선화제는 어느덧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3교시 수업을 마친 타교 학생들 이 하나 둘 구경오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선화예술고등학교의 교정은 인파로 가득 차 있 었다. 고등학교의 축제라면 공인된 사교의 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하나같 이 공들여 꾸민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세 사람 - 남궁하진, 이민 재, 그리고 원 율 - 이 있었다. 툭- "꺄아, 죄송합니다." "..." "..." "..." 세 명 모두 무언으로 일관하자 부딪친 소녀는 무안한 듯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일행으 로 돌아갔다. 잔인하고 냉정하고 싸가지 만땅인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절실히 이해가 갔 다. 그들은 세기도 귀찮을 정도로 많은 - 민재가 14번까진가 세다가 관둬버렸다 - '부딪 침을 가장한 신체접촉과 인사'를 당한 것이다. "휴우, 저것도 왠만큼 해야 속아줄 기분이 나지..." 민재는 한숨을 쉬었다. 선유의 연극을 보기 위해 축제에 참가하긴 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이런 곳에 익숙하지가 않아서인지, 하진이의 기분이 엄청 나빠보였다. 쯧쯧... 그러게 누가 사서 고생을 하래. 뭐, 자신도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 중이니까 뭐라고 할 처지는 안 되지만, 사람 많은 곳 이라면 질색하는 남궁하진은 그야말로 주제도 모른 대가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부딪침 을 가장한 신체접촉과 인사'를 하는 10명의 여성중 8명은 하진에게 몸을 내던졌기 때문 이었다. 말도 없고, 표정도 없고. 폭발하기 일보직전이라는 뜻을 여실히 보여주는 하진이었기에 재빨리 끌고 2학년 몇반인가가 하는 카페로 들어갔건만...!!! 5초도 안 되어 도로 나와버렸다. 울룩불룩 근육맨들이 세라복에 스커트를 입은채 가발 을 쓰고는 "어서오세요~♡"따위를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으로서 봐줄만한 광경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민재는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그것을 본 하진은 엄청난 저기압이 되어서는 "건.들.지.마." 표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비위가 약한 율이는 올라올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하, 미안하다. 저런 곳인줄 몰랐어." "...죽어." "이민재 죽어, 새꺄." 그래, 내가 죄인이다. 죽여라, 죽여. ㅠ.ㅠ 험악해진 분위기를 돌리기 위한 뭔가를 두리번두리번 찾던 중, 민재는 시계를 보고는 놀 라며 외쳤다. "어, 야!! 지금 2시 50분이야!!" "뭐? 벌써?" "연극 시작이 3시였지? 분명히.." "...연극 전엔 볼 수 없겠군." "선유? 끝나고 보면 되지." "그나저나 빨리 가지 않으면 자리가 없겠는걸?" "앞장서, 눈깔 삔 이민재." 못볼 걸 봐서인지 녀석들의 말투가 거칠어졌다. 착한 내가 참아야지, 사악한 니들이 참 겠니- 라는 생각을 하며 민재는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녀석들의 주위로 시선이 모여 든다. 저 녀석들, 물건은 물건이었다. "시작하기 몇 분 전이야?" "5분." "으악~ 미치겠네. 지금이라도 안 하면 안 되냐?" "금선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알았어, 알았어. 그냥 해본 소리다. 됐냐?" "다 갈아입었으면 빨리 나오기나 해. 얘들 모두 너 기다린단 말야." "네,네. 하우희 마녀님." "순결을 잃고 싶지 않으면 신속히 행동하시죠, 백설공주님." 빠직- 역시 하우희의 말발에는 못 당하겠다. 새삼스레 저런 하우희를 잘 요리하는 지성 이가 존경스러워진 선유였다. 지금 선유는 무대 뒷쪽에 임시로 마련한 드레스 룸에서 옷 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나중에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없기 때문에 속에 드레스를 입고 위에 넝마를 걸쳐야 했다. 이 놈의 드레스... 끝나면 기필코 불태워버리리라 맹새하면 서 선유는 드레스 룸의 커튼을 걷었다. "..." "하... 이, 이것참..." "와아..." "////" ...뭐지? 이 반응은 뭐지?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무엇보다 굉장히 기분나쁜 반응에 선유의 표정이 묘해졌다. 다른 배우의 의상을 점검하러 무대 반대쪽에 갔던 우희가 선유를 보더니 달려왔다. "오~ 금선유, 정말... 장난 아닌데?" "나 지금 엄청 기분 나쁜거 알지?" "왜? 예쁘구만. 안그래, 얘들아?" "그... 그래, 예뻐. ///" "여자임을 포기하고 싶어... ㅡ.ㅜ" "너무... 예뻐.///" 이것들이 정말!!! "저 반응이 기분 나쁘다구!!!!!" 무대는 막을 올리기 3분 전, 배우들은 의상을 입고 분장을 한다. 무대는 막을 올리기 2분 전, 배우들은 각자 제 위치에 서서 발걸음을 가누고 다시한번 대본을 들여다본다. 무대는 막이 올리기 1분 전, 스텝도 배우도 각자 눈과 눈으로 긴장된 호흡을 나누며 옷 매무새를 고친다. 그리고... 막이 오른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안녕하세요, karin입니다. 어어... 이야기가 좀... 어디로 흘러갈지.. 하핫- 드디어 <백설공주>가 막을 올립니다. 쿠쿠... 좀 허접하지만... 그래도 이쁘게 봐주세요. ^^* karin (primblade00@yahoo.co.kr) 혹(眩) - 아찔하다 안녕하세요, karin입니다. 사실, 처음엔 <백설공주>의 대본을 따로 올릴 생각이 없었는데... 제가 소설을 써 보니 아무래도 패러디한 내용인지라 제대로 한번 올린다음 소설을 진행시키지 않으면 아무도 내용을 알지 못할 것 같더군요. 그래서.. 허접하지만... 생각하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우희 말대로 눈요기에만 치중 한거니까.. 부디... 저를 버리지 마시와요.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에헤야~(...숙면부족으로 폐인이 된 karin이었습니다. 이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백설공주> 개작 : 하우희 등장인물 : 중성적인 인물로 남녀 역할 모두를 순조롭게 해 낼 수 있는 사람 금선유, 이해민 (채택) 다소 뻔뻔하며 카리스마와 다중인격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사람 하지성, 이 영 (채택) 그 외 파티에 참석한 인원(남녀 5~7쌍 정도), 루이지엔 마리안 필립 후작부 인, 왕, 서쪽 숲의 마녀 체르나 체레스, 마녀의 제자 셀트, 해설자 등 무대 : 캄캄하고 어둡게. 조명과 음향 : 해설자에게로 스포트라이트. 약간 암울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배경음악 해설자 : 옛날 옛적 어느나라에 피처럼 붉은 입술과, 눈처럼 흰 피부와, 숯처럼 까만 머 리카락을 가진 공주가 태어났습니다. 불행히도 공주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의게 됩니다. 왕은 백설공주를 위해 새로 왕비를 맞아들이고, 백설공주는 아 름답게 자라나 어느덧 17살이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여러분들도 익히 들어 아 시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 하는 것은 <백설공주>의 또 다른 이야기, 숨겨져버린 이 면의 백설공주입니다. 자, 그럼 여러분. 재밌게 보시기를. 조명 : 스포트라이트 꺼짐. 5초 후 전체 조명(대파 2개) - 약간 어둡게 무대 : <왕비의 방> - 엔틱한 거울, 가구, 카펫 등을 이용, 최대한 중세 분위기로. 음향 : 약간 빠른 템포의 음악. 긴장, 두려움을 주는 음악. 해설자 : 아름다운 왕비님께서 거울을 보고 계시는군요. 왕비 : (스스로에게 도취된 듯)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거울 : ... 왕비 : (약간의 시간 경과 후 애원하듯)거울아, 제발 대답해 보렴. 거울 : ... 왕비 : (드레스 자락을 올리고 거울을 발로 차며)젠장할 빌어먹을 거울아!!! 말 좀 하라 고!!! 이거 싸구려 아냐!!! 뭐 이딴 게 다 있어!!!" 해설자 : 하핫.. 왕비님은 사실 다중인격자였나 봅니다. 자, 그럼 이쯤해서 백설공주도 나와야겠죠? 조명 : 전체조명.(대파 3개) - 밝아짐. 백설공주 - 커텐 뒤에서 등장. 왕비는 여전히 거울을 밟느라 알아차리지 못함. 백설공주(이하 백설) : (기둥에 기대며 건달투로)왕비 당신, 바보 아냐? 거울이 어떻게 대답을 해?" 해설자 : 네, 말투가 정말 싸.가.지.바.가.지. 로군요. 게다가 터프합니다. 입고 있는 옷은... 오오, 이런! 한나라의 공주가 더벅머리에, 간편한 티셔츠와 엉망이 된 바지를 걸치고 있군요. 얼굴에는 때국물이 묻어나오고, 장화는 흙으로 범벅 이 되어 있습니다. 백설왕자였냐구요? 아닙니다, 틀림없는 백설공주예요.(백설 공주 - 패션모델처럼 포즈를 잡음) 왕비 : 백설!! 내가 어머니라고 하라고 몇번을 말해야 하닛!!! 백설 : (심드렁하게)나 참, 귀찮게 무슨... 그나저나, 왜 부른거야? 앙? 왕비 : (울화가 치미는 듯)백설!! 제~ 발 예법좀 지켜서 조신조신하게 좀 말해!! 누가 널 여자로 보겠니!!! 허구헌날 남자같은 말투에, 남자같은 행동에... 응? 이건 또 뭐야? 꺄아아아악~~~~~ 쥐다!! 백설 : (쥐 꼬리를 잡으며)뭐 이런 걸 가지고 그래? 귀엽기만 하구만.(쥐를 내던진다) 왕비 : 백설공주!!! 흑흑.. 내가 정말... 미쳐... 남들은 전부 딸하고 같이 드레스도 고 르러 가고... 보석도 고르러 가고... 오후면 티타임에... 같이 놀고 그러는데... 너는 어째서 맨날 사냥이나 나가고.. 넝마주머니나 걸쳐 입고... 흑흑...(가녀리 고 애절하게) 백설 : (여전히 심드렁하게)당신이 얘야? 나랑 놀게. 왕비 : (갑자기 분노하며)뭐얏!!! 으아아아악~ 처음에 폐하의 청혼을 받아들이는게 아니 었어!!! 이런 딸인 줄 몰랐다구!!! 돌아가신 왕비님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고향으 로 도망치는건데, 젠장!!!"(아무 가구나 발로 찬다) 해설자 : 왕비님께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를 합니다. 이런, 왕비님께서는 폐하께 거 의 속아서 결혼을 하신거로군요. 왕이니 <사기결혼>으로 이혼을 걸 수도 없 고.. 오늘도 왕비님의 속은 검게 타들어가는 모양입니다. 백설 : (조금 놀란듯)어이, 어머니. 진정해. 왜 불렀어? 왕비 : (다시 우아한 어조로)아, 그래. 내가 잠시 체면을 잊었구나. 호호호~ 이걸 보 렴, 백설.(백설공주에게 카드를 보여줌) 해설자 : 다중인격자의 면모를 확실히 보여주는 왕비. 0.005초 사이에 얼굴표정이 마수 에서 우아한 귀부인으로 바뀝니다. 상당한 수련을 요하겠는데요. 백설 ; (카드를 읽는다. 손이 부들부들 떨림)뭐야 이건? 북쪽나라 백설공주와 @@왕국 세 실 왕자와의 약혼식??? 으아아악~ 장난해!!!" 왕비 : (즐거운 듯)미안하지만, 장난이 아니란다. 네 소문에 나라 안에 다 퍼져서 이미 이 나라 안에서는 네 신랑감을 찾을 수 없어. 그래서 폐하와 고민끝에 결심한거란 다. 사실은 결혼도장부터 찍고 나중에 어떻게 되든 물리는 일이 없었으면 하지 만... 아무리 그래도 네가 일단은 공주잖니? 약혼은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백설 : 미쳤어!!! 나 안해! 못해!!! 왕비 : 오호호호홋~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내가 그렇게 놔 둘것 같 니? 이봐라!!(병사들 몰려 나온다) 병사1 : 네, 왕비마마. 왕비 : 어서 백설공주를 포박하거라. 왕께서 허락하셨으니 보이는 곳에 상처내지만 않는 다면 상관없다.(어깨를 올리고 고개를 저으며. 불량스런 포즈로) 백설 : (병사들에게 잠시 저항하나 결국 묶인다)젠장~ 그러고도 당신이 어머니야~ 마 녀!!! 조명과 음향 : 어둡게(실루엣만 보인 정도) 전체조명. 활발한 음악. 해설자 : 이래서 새 왕비에게 마녀란 별명이 붙여졌나 봅니다. (왕비, 잠시 백설공주를 보고는 무대 밖으로 나감.) 백설공주는 반항하지만 노련한 시녀들은 아랑곳하 지 않고 공주를 치장합니다. 그리고 몇일 후...(백설공주 - 관객을 향해 등을 보인다. 몇몇 시녀들이 공주를 치장한다 ; 미리 해 놓은 화장, 넝마주머니 벗 김, 가발 바꿔 씌움) 왕비 : (재등장)자, 백설. 오늘 세실 왕자 일행이 온단다." 백설 : 젠장!!! 젠장젠장젠장젠장젠장~~~~~~(천천히 관객쪽으로 돌아본다) 해설자 : 이런!!! 정말, 뭐라 할 말이 없군요. 아름답다고밖에는... 흑단같은 머리카락 이 아름답게 흘러내리고, 그와 대비되는 하얀 피부는 보호본능을 마구마구 유발 하고.. 블루 사파이어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촉촉 히 젖어 있습니다. 붉은 입술은 사람을 유혹하고.. 목에는 공주의 눈과 같은 사 파이어의 목걸이가, 그리고 하얀 피부를 돋보이게 해주는 검은 우단옷을 입었군 요. 역시 사람이란... 옷.이. 날.개.입.니.다. 아무튼, 정말 사랑스런 공주님 탄생입니다. 백설 : 죽어버려!!! 빌어먹을 마녀야!!! 그딴 왕자랑 결혼하고 싶으면 너나 하란 말이 야!!!! 젠장할~~~ 해설자 : ...이런,이런. 입만 막는다면 말이죠. 그렇지만 왕 세라믹초강력울트라메가톤 버젼업100%인 왕비님의 피부는 공주님의 발악을 빙판에 미끄러지는 파리마냥 미끄럽게 흘려버리는군요. 정말 대단합니다. 여러분, 기립 박수를- 아, 장대한 나팔소리가 들립니다. 21방의 예포가 울리는군요. 세실 왕자 일행 이 도착한 모양입니다. 그럼 세실 왕자를 잠시 옅보도록 할까요?(나팔소리) 조명 : 전체조명 꺼짐. 3초후 스포트라이트 켜짐 무대 : 장면전환. 하지만 배경은 그대로 두고 스포트라이트로 조절. 그동안 파티장으로 대도구 바꿈. 세실왕자(이하 세실) : 흑흑... 이모님... 흑흑... 전... 흑... 정말.. 흑... (팽~) 흑 흑... 정말... 어흑... 어흐흐흑... 장... 훌쩍, 장가... 가기.. 흐흑... 싫어요... 우앙~~~ 해설자 : 휴... 말 한마디 하는데 정말 오래걸리는 공주로군요. 그러면서도 할짓 다 하 네요. 슬픔에 복받쳐 울기도 하고, 코까지 풀고... 후작부인 : 세실 왕자!!! 제발 그만 좀 울어요!!! 사내자식으로서 그거 달고 있는게 부 끄럽지도 않습니까!!! 해설자 : 아, 저 분은 세실 왕자님의 이모님이신 루이지엔 마리안 필립 후작부인이시군 요. 자, 잠깐... 그, 그럼... 지금 울던 가녀린 공주는 바로 세실왕자님이란 소 리가 되는데요. 후작부인의 노골적인 말에 되려 얼굴을 붉히며 "어머~" "발그 레"따위의 소리를 내고 있는 분이??? ...이건... ...정말... ...천.생.연.분. 입니다!!! 배경음악 : 세레나데. 사랑의 인사. 해설자 : (이어서)와아~ 드디어 백설공주님도 공주님에게 맡는 짝을 찾았군요!! 이건 정 말 놀라운데요? 이런 성격의 왕자가 있으리라고는... (삐질^^;;;) 그렇지만 짚 신도 짝이 있고 나막신도 짝이 있는데 공주라고 짝이 없겠어요. 조명 : 스포트라이트 2개 배경 : 대도구 바꿈 음악 : 급박감이 넘치는 음악(심벌즈, 큰북이 들어간 것) 해설자 : 아무튼, 결혼식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옵니다. 백설공주는 발광을 거듭하야 찢 겨진 드레스가 무려 열벌을 넘고, 세실왕자는 너무 울어서 눈이 팅팅 부어 쓰 인 얼음만 한 바가지라는군요.(백설, 세실 판토마임으로 연기) 그리고 드디어 결혼식날, 두 사람은 첫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조명 : 전체조명. 매우 밝게 무대 : 장면전환. 파티장으로. 가운데는 왕좌가 놓여져 있다. 음향 : 가벼운 왈츠음악 세실 : 흐엉~ 싫어요, 이모님... 전 정략결혼따위는... 훌쩍, 싫단말이에요...!!! 후작부인 : 다행입니다, 세실 왕자. 태어나서 지금까지 해 본 말 중 가장 강력한 것이네 요. 안타깝게도, 이건 정략결혼이 아니랍니다. 세실 : (당황한 듯)그... 그럼?? 후작부인 : (즐거운 듯)호호호호~ 이른바 폐.기.처.분.이죠. 아, 저기 백설공주님이 보 이네요. 어서 가까이 가세요. 이제부턴 왕자님의 약혼녀가 되실 분 아닙니 까.(왕자, 백설공주를 바라봄. 공주, 세실왕자를 바라봄. 서로 눈을 마주침) 조명 : 스포트라이트(백설공주와 세실왕자만 비춤) 음향 : 베토벤 '운명' 해설자 : 네, 맞았습니다. 맞았어요. 한눈에 눈이 맞았습니다. 빠라빠라빰~~ 이거야말 로 천생연분이군요.(백설과 세실, 서로에게 천천히 한발자국씩 따라감) 조명 : 백설과 세실을 따라 스포트라이트 움직임. 스포트라이트 2개 만남 음향 : 베토벤 '운명' 백설 : (세실의 손을 꼭 쥠)한눈에 반했어, 세실 왕자. 세실 : 저도 그래요, 공주님.꺄아- 해설자 : 우욱- 넘어옵니다. 어쨌든, 나름대로 잘 어울리는 커플이로군요. 모든 사람들 이 놀란 가운데 두 사람은 왈츠, 아니 탱고를 추기 시작합니다. 오호~ 세실 왕 자님, 허리 유연한데요!!!(다른 커플들도 탱고를 추기 시작.) 그야말로 파티가 절정에 이르렀군요. 그때!!! 조명 : 전체조명. 스포트라이트 끔. 환하게. 음향 : 탱고음악. 마녀 : 오호호호호호호호호홋~~~" 해설자 : 마녀가 등장했군요!! 검은 후드로 얼굴을 가린 전형적인 마녀!!!(역시 어쩔수 없는 유치뽕짝 어설픔 극치의 이야기라 하셔도 할 말 없습니다.) 마녀의 등장 에 사람들은 놀랍니다... 가 아니군요.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하던 일을 마져 하 네요. 마녀 : (당황한 듯, 한층 더 큰 목소리로)오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호~~ 해설자 : ...여전히 아무도 안 봅니다. 오옷- 드디어 백설공주&세실왕자의 탱고가 막바 지로군요.(탱고춤, 더욱 더 빠른 템포로) 마녀 : (쓰고있던 모자를 패대기치며)이것들아!!! 여기좀 보란 말이야!!! 그렇게 크게 웃었으면 한번쯤 보는게 예의 아니야!!! 젠장할, 이 망할 것들!!!(음악 꺼짐. 모 든 사람들이 마녀에게 가까이 감. 백설공주와 왕자만 가까이 가지 않음) 마녀 : 나는 서쪽 숲의 마녀, 체르나 체레스. 왕 : (난처한 듯 쭈볏거리며)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무슨 일로... 마녀 : (화가 나고 기가 찬다는 듯)무슨 일? 무슨 일이냐구? 오호호홋~ 감히 무슨 일이 냐고 나에게 물어? 그건 너희들이 더 잘 알지 않나? 왕 :...(모르는 듯 여러 사람을 쳐다보지만 모두 모른다는 제스쳐를 취함) 해설자 : 아무도 이유를 모릅니다. 마녀가 말을 잇기를 기다릴 수밖에... 마녀 : 오늘이 공주의 생일인데... 쿡쿡... 다른 모든 존재들을 초대하면서... 모든 요 정과, 모든 마녀를 초대했으면서... 감히 나를 빼놓아!!!! 으아아아아악~~~ 해설자 : ..오늘은 백설공주와 세실왕자의 약혼식 날입니다. 백설공주의 생일은 아닌데 요. 게다가 초대받아온 사람들은 모두 사람뿐입니다. 요정이나 마녀는 초대한 적이 없어요. 왕 : 저, 저기... 마녀 : ... 왕 : 서쪽 숲의 마녀... 마녀 : ... 해설자 : 아까 무시당한걸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나봐요. 쪼잔한데요. 왕 : 오늘은 공주의 생일이 아닌데... 마녀 : 무슨 소리야!! 오호홋~ 초대 안한 걸로도 괘씸한데 감히 거짓말까지???!!! 왕 : (당황하며)아니, 그... 그게.. 마녀 : (화가 난 듯)나를 우습게 봤다, 이거지? 오, 그래? 그렇다면 대가를 받아야겠 지. 너!!!(백설공주를 지목함) 해설자 : 백설공주는 묵묵히 서 있을 뿐입니다. 사실 탱고를 춘 후라 힘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 뒤를 세실 왕자가 받치고 있네요. 비주얼쪽으로는 완벽한 두 사람 입니다. 조명 : 백설과 세실에게 색조명 마녀 : (고개를 끄덕이며)오호호호~ 그래, 네가 그렇게 완벽한 여성이란 말이지? 그 뒤 의 사내녀석은 보나마나 완벽한 남성이겠고... 그래, 흐흠, 좋아. 호호홋- 너희들 이 날 조롱한 대가는... 조명 : 전체조명 꺼짐. 색조명 꺼짐. 마녀에게 강한 스포트라이트, 백설과 세실에게 약 한 스포트라이트. 음향 : 어두운 음악 마녀 : (음산하게)왕자와 공주의 성격을 100% 뒤바꿔주지. 오호호호~ 공주의 몸을 한 왕 자와, 왕자의 몸을 한 공주를 자알~ 모셔보라고!!! 오호호호호~~ 조명 : 깜빡임을 빨리 함. 음향 : 천둥소리. (마녀는 주문을 외움. 사람들, 압도당해 꼼짝도 하지 못함. 백설공주와 세실왕자를 비추 는 스포트라이트, 점차 강해짐.) 백설과 세실 : (주저앉음) 시녀 1 : 공주님!!! 시녀 2 : 왕자님!!! 왕 : 백설공주!!!(사람들, 백설공주와 왕자에게로 다가감. 마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조명 : 스포트라이트 꺼짐. 전체조명 켜짐. 해설자 : 놀란 사람들이 다가가는군요. 다행이 외관상으로 별 이상은 없어보입니다만... 백설 : (울먹이며)흑흑... 백설공주는.. 공주는 싫어요... 저 무서운 사람이 싫어요... 세실 : 뭐야, 저자식은!!! 왜 갑자기 지랄하고 난리야!!! (놀란 사람들, 마녀와 공주, 왕자를 번갈아 쳐다본다.) 해설자 : 그러고 보니... 마녀가 건 주문은 본래 성격을 100% 바꾸는 것이었군요. 마녀 는 백설공주와 세실왕자를 각각 이상적인 여성과 남성으로 알고 주문을 걸었습 니다만...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요, 세옹지마라고 해야 하나요. 덕분에 공 주와 왕자는 외모에 걸맞는 성격을 가지게 됩니다. 세실 : 백설공주. 아아- 첫눈에 반했소. 백설 : 저두요, 왕자님. 해설자 : 발그레해진 백설공주와 씩씩한 세실왕자는 어느새 러브러브모드로 돌입했군요. 마녀 : 이런... 이럴리가 없는데...(놀란 듯) (검은 망토를 둘러쓴 소년 하나가 입장. 마녀에게 다가감) 셀트 : 마녀님, 마녀님!!! 마녀 : 셀트? 너, 내가 먼저 와서 사전조사 해 놓으라고 했잖아!!! 어딜 싸돌아다녔길 래 나보다 늦게 오는거야!!!(화난 듯) 셀트 : 마녀님, 그게 아니에요. 그곳은 동쪽 나라라구요. 여기는 북쪽 나라잖아요!!! 마녀 : (믿기지 않는다는 듯)뭐!!! 그, 그럴리가... 셀트 : 애초에, 갓 태어난 아기가 약혼식하고 있을리가 없잖아요!!! 여기는 그 유명한 개.망.나.니. 백설공주의 나라라구요!!! 해설자 : 뭐라 반박할 말이 없군요. 진실이란 무서운 법이니까요. 그러나 저러나, 원래 마녀의 목적지는 백설공주의 나라가 아닌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나라였나 봅니 다.(사람들, 마녀에게 다가감) 마녀 : (당황한 듯)하하,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헤헷- 제가 요즘 좀 나이가 들어 서 말이죠... 그게... 헤헷- 아, 약혼식이라고 했나요? 이거, 천생연분이십니다. 헤헷-(비굴하게) 사람들 : ...(점점 마녀에게 다가간다) 마녀 : 아, 그렇지! 저 두분께 건 저주(?)도 다시 풀어드리죠. 왕 : (갑자기 당황해 손을 내저으며)아! 됐소, 됐소. 그것만은 그만 둬 주시오. 마녀 : (의아한 듯)네? 하... 하지만... 왕 : (마녀를 밀어내며)그냥 놔둬도 됩니다. 뭣하러 그렇게 힘든 짓을. 그냥 어서 떠나 시죠. 보아하니 동쪽 나라로 가셔야 할 것 같은데. 마녀 : (밀려나면서)아, 네.. 하지만 제가 저지른 일은 책임져야.... 왕비 : 우리가 책임질테니 빨리 사라지라고 했잖아!!! 이 마녀야, 저주 풀면 너 죽을 줄 알아!!! 조명 : 전체조명 꺼짐. 해설자에게 스포트라이트. 해설자 : ...이래서 왕비님의 별명은 마녀로 굳어지는군요. 확실히 후세에 전해지기에 는 오해가 많은 발언입니다. 저주를 풀면 죽인다니... 뭐, goodthing is g ood, 좋은게 좋은거죠. 모든 이야기는 happy ending. 행복하게 끝난 아름답고 가녀린 백설공주와 늠름하고 씩씩한 세실왕자와의 이야기랍니다. 자, 그럼 여 러분. 백설공주의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명 : 밝은 전체조명 음향 : 결혼행진곡 (백설공주와 왕자, 결혼식을 치루는 분위기. 마지막에 키스하며 막이 내려간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핫... 허접... ㅡ.ㅜ 기승전결이 있게, 재미있게, 굴곡이 있게 만들려고 했지만... 그렇게 하려면 너무 시간 이 오래걸리고... 또... 내용이 길어져서... (네에, 맞습니다, 여러분. 변명입니다.) 사실 더 올릴려고 했는데.. 백설공주를 끝내니 진이 빠지네요. 죄송하구요, 다음에 더 많이 올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karin (primblade00@yahoo.co.kr) 혹(眩) - 아찔하다 강당에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대충 잘 보일만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 아있자니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종이쪼가리들이 궁금해졌다. 민재는 종이를 들어 읽어보 았다. 연극 <백설공주>와 주인공, 배역 설명인 것 같았다. 그런데... 자, 잠깐!!! 금선 유 - 백설공주라고? ...그럼 선유가 백설공주역을??? "푸하하하하하하하!!!" 라고 웃고 싶었지만... 그건 옆에 있는 이 넘들, 특히나 남궁하진이 없을 때 이야기다. 나야 단순히 웃으며 넘길 수 있지만... 이녀석에게 선유가 여자역을 맡아서, 여장을 하고 나온다는 말을 했다간 그 여장 시킨 넘들이 반쯤 죽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게다가 너무 열받아 아무 소리도 안 먹히는 상태가 되면 선유를 강제로 덮쳐버리는 최악 의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하진이가 많이 자제를 하고 있다는 건 안다. 금선유 그 놈은 워낙 눈치가 없는 놈이라 시도때도 없이 유혹 모드로 끌고가는 것이다. 뭐, 자기야 아무 생각없이 하는거지만 받 아들이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걸. 좋아하는 사람이 앞에서 웃통을 벗고 있는다거나, 촉촉 히 젖은 머리카락으로 빤히 쳐다본다거나 한다면 누구라도 설 거다. 그런데 그 멋모르 는 금선유가 남궁하진을 자극한다면!!! 그야말로 생각하기 싫은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 남궁하진이... 자제력을 잃을수도 있 지. 다른 일 같으면 이런 가능성은 생각도 안 한다. 남궁하진이 이성을 잃는 모습따윈 상상이 안 가니까. 하지만 언제나 예상외의 변수가 있는 법. 그리고 남궁하진에게 그 변 수의 핵은 바로 금선유라는 것 쯤, 민재는 너무나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확신 할 수 있었다. 맛이 간 남궁하진이... 금선유를 먹어버릴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까지 는 그래도 최악은 아니다. 어차피 그가 결심했다는 건 4년에 걸친 세월동안 충분히 이해 했으니까. 좀... 섭섭하긴 하겠지만 말이다. 문제는 그 후였다. 금선유, 그 녀석은 '소 년적인 결벽증'을 가지고 있다. 깨끗하다- 에 대한 자신감과 노력.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호된 질책과 굽히는 대신 꺽어지는 것을 택하는 드높은 자존심. 그런 그가 '억지 로 당하다'는 사태를 용납할 수 있을까? 적어도 민재가 볼때, 그 가능성은 희박하기 짝이 없었다. '더럽혀졌다'라고 생각하겠 지. 평소에 워낙 '깨끗하다'에 대한 결벽증을 가진 녀석이니까, 자기 자신을 용납하지 못할거야. 그리고... 아무 미련없이... 세상을 버릴지도... 아니, 그렇게 생각 자체를 하지 말아야겠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말 로만이라도 계속 '괜찮을거다'라고 지껄여대면 정말 언령의 신이 도와줄지도 모르지. ...하진도 최악의 상황을, 그리고 가장 가능성이 높은 상황을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러 니까 저 놈이 저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거겠지. 어쨌든, 이 넘들을 어떻게 끌고 나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얘들아, 화장실 가자." "뭐야? 마렵냐?" "빨리, 같이 가자니까." "너나 갔다 와. 계집얘도 아니고, 무슨 화장실을 같이 가냐? 쪽팔리게." 우욱- 원 율, 너 정말 이렇게 나올래? 왜 이렇게 눈치가 없는거야? 너 그래서 사회생활 어떻게 할래? "그, 그럼... 우리 뭐라도 먹고 오자. 점심 제대로 못 먹었잖아." "가지가지 한다, 배고파?" 원 유울~~~ 민재는 자신의 앞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배고파?" 따위를 묻는 덩치를 그야말로 원없 이 차고 싶었다. 어떻게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을까...가 아닌가보다. 율이 의 손에 <백설공주>라고 적힌 종이가 들려 있는 것을 보면. 아아- 즐거워 하는거군. 사 악한 놈. "조용히 해라. 시작한다." 뭐, 뭐!!! 그러고보니 조명이 점차 어두워진다. "아아, 실례하겠습니다. 아아-" 하는 목 소리가 흘러나오고... 조명이 완전히 꺼진다. "지금부터 1학년 3반의 연극, <백설공주>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십시 오." ...망했다. 율이를 돌아보니 씨익 웃고 있었다. 짜식, 그래 안다, 알아. 내심 기대되는 거지? 선유의 드.레.스.차.림. 뭐, 나도 그러니까... 할 수 없지. 그나저나, 남궁하진 이자식이 포효하면 어떻게 말리지? 지금부터 포박이라도 하고 있어야 하는거 아닐까? 아 니면 가스총이라도.. 이대로 마취를 시키던가... ...순수하게 고민하는 민재였다. ...? 선유가 백설공주? 분명히 해설자가 "백설공주가 등장해야겠죠?" 하고 말했는데, 등장한 것은 선유였다. 뭐, 정말 굉장한 몰골이었다. 넝마주머니를 하나 걸치고, 커다란 장화에, 일부러 삐치 게 만든 것 같은 가발. 그것도 귀엽다면 내 눈이 삔걸까? ...고민하지 말자. 이 녀석들도 몰랐을까? 하진은 옆의 민재와 율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그나저나 선유가 백설공주라니, 위험할 뻔 했다. 여장했다면 저녀석에게 반할 수많은 무리들을 어쩌란 말 인가. 다행히 백설공주의 성격은 정말 녀석의 성격 그대로라 드레스를 입고 귀여운 척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과연... 그럴까요 ^^*) 그러나 안심했던 것도 잠깐, 점차 내 안면 근육이 씰룩이기 시작했다. 백설공주랑 빌어 먹을 왕자가... 첫눈에 반해? 누구 맘대로!!! 게다가 선유는 그 멍청한 놈(하핫... 호칭의 변화에 주목!!)과 함께 탱고까지 추는 것이 었다. 정말, 당장 뛰쳐나가 연극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걸 꾸욱 참으며 계속 중얼거렸다. 손바닥을 꽉 쥐어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것 같았지만 아픔도 고통도 느끼 지 못했다. 금.선.유... 이래서 말 안 한거란 말이지... 두고보자... 그렇게 열받은 마음을 추스렸건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얼토당토않은 마녀의 마법 으로.. 선유의 성격이 변하더니... 그 얼굴로... 그 옷으로... 울먹이는거다. "으드득-" 이 가는 소리가 민재에게까지 들렸나보다. 민재가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지금 나 는 그에게 신경써줄 정도로 관대하지가 않다. "백설공주, 아아- 첫눈에 반했소." 그래? 그렇다면 내가 죽여주지. 나의 '그'에게 반했다면, 나에게서 '그'를 빼앗아 가려 고 한다면 우선 나부터 상대해야해. 내 모든것을 걸고 기꺼이 싸워주지. "저두요, 왕자님." ... ... 한낱 연극이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줄은 몰랐다. 선유가 연극이든, 진실이든 남자에 게(하진은 해민이 남자인 줄 압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다니. 그가 현실에서 남성에게 그렇게 말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이기에, 선유에게 고 백할 경우 저런 답변은 기대도 할 수 없다는 걸 아는 나이기에, 그리고 온 몸과 마음이 상처투성이가 되어도 그를 얻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이기에 비.참.했.다. 너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그렇게 거짓으로도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가치 밖에 안 되는가? 나는, 나는, 나는!!! ...너에게 그 말을 하기위해 지금껏 4년을 기다렸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하지 못해... ...너의 반응이 두려워서, 자칫하면 너를 잃을까봐... 너를 못보게 될까봐... 두려워 서... 차마 꺼내지 못해... ...가끔씩, 네가 보고싶어 미칠 때마다... 스치듯 중얼거리는... 그 말 한마디에... 혼자 웃고 우는데... 연극이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이 안 난다. 다만 내 머리속에 각인된 건, "사랑한다"는 왕 자의 고백에 홍조를 띄는 선유와 마지막의 키스신. 커튼이 내리고, 지옥같은 순간들이 끝났다. 나는... 다만 아직도 두 손을 움켜쥐고 있을 뿐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크윽.. 불쌍한 하진넘... 하지만.. 원래 공주의 사랑을 얻는 용사는... 죽을 고비까지 넘기니까... ...사악한가요? 헤헷^^* 혹(眩) - 아찔하다 ...연극이 끝났다. 정말인지... 신의 도움이었다고밖에 할 수 없다. 중간에 대사를 까먹었기 때문이다. 아 니, 대사만 까먹은 것이 아니라 머리속이 새하얗게 되었다고나 할까? 어제는 하지 않던 긴장을 오늘에서야 하게 됐냐고? 아니다. 나는 원래 얼굴에 철판을 깔아놓고 사는 타입인데다가 실전에서 긴장하는 순진무구한 모 습은 옛날, 그러니까 5살 이전에 집어친 뻔뻔한 놈이다. 그럼 왜냐고? ...그 원흉 첫번째, 바로 저기 앞자리에 앉아 두 눈을 부릅뜨고 나만 노려보는 남궁하 진. ...그 원흉 두번째, 즐거운 듯 입을 쩌억 벌리며 쳐다보는 이민재와 원 율. ...그 원흉 세번째, 저~ 멀리 서서 역시 나만 노려보는 서단영. 이렇게 축약할 수 있다. 젠장할... 삼인조가 왠일로 순순히 물러나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역시 만만 히 볼 놈들이 아니다. 저 능글맞은 웃음들을 보라. 평생동안 두고두고 써먹을 껀수 하 나 잡았다고 좋아하는 꼴이란... 이민재, 이 녀석아. 입이 늘어나다 못해 머리 위에서 리본 묶어도 되겠다. 그만 좀 웃어라. 야아, 원 율. 파리 들어가겠다. 입 좀 다물어. 뭐, 이런 반응들이야... 이 녀석들의 얼굴을 무대 위에서 봤을 때부터 예상했던 거지 만... 마음에 걸리는건 하진이다. 뭘까, 그 반응은. 얼굴 표정으로 보나 뭘로 보나 상당히 화가 나 있다는건 알겠는데... 으음... 이유를 모 르겠다. 그나저나 생각해보니 괘씸하네. 화가 났으면 화가 났지, 왜 날 노려봐? 종로에 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격 아냐. 그리고 서단영. 남궁하진과는 좀 다르지만... 역시 나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다지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는데... 노려보는 것보단 주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를 본 게 아니라 연극을 본 걸 수도 있고... 단영이가 사시일 수도 있지만... (장난하냐? -_-;;;) 아무튼, 그 두 놈의 집요한 시선 때문에 계속 버벅댔다. 그나마 망치지 않을 수 있던건 전부 해민이 덕이다. 몰래 가만가만 대사를 일러 주었던 것이다. 에구, 착한 것. "왜 그랬어? 너 실전에서 긴장하는 타입 아니잖아?" "아, 땡큐-" 지성이가 뜨거운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으흠- 맛있어. 난 자판기든 뭐든 뜨거운 건 다 잘 먹는다. 입맛이 보통사람과는 다르게 까다로운 편이라고 할까? 예를 들어 싼거, 비싼 거는 안 가리지만 찬거, 뜨거운거는 가린다던가... 미각이나 후각보다 촉각에 의존해 좋 고 싫음을 판단한다던가... 민재 말로는 단순히 성격이 지랄맞은 거란다. 남말하지 말라 고 쏘아붙이기는 했지만, 나도 인정하긴 인정한다. 개같은 성격 때문이다. "빌어먹을 녀석들이 와서 말이야." "빌어먹을 녀석들?" "응, 있어. 4년간의 끈질긴 악연을 자랑하는 놈들." 피식- 어, 웃네. 한지성, 내 말을 안 믿는거냐? "꽤나 친한가 보구나?" "...어떻게 해석해야만 그런 답이 나올 수 있는거지?" "넌 모르는 사람일수록 예의를 지키잖아. 반대로 친해질수록 말이 거칠어지는 타입이 지. 한마디로 자기 마음 속을 잘 표현해 내지 못하는 인간상의 표본이랄까?" "...우리 나라 말 맞지?" "대한민국 말이야. 참고로 표준어지." 이 녀석 역시 만만히 볼 놈이 아니다. 저 웃는 얼굴 뒤로 저런 모습이 있을 줄 누가 상 상이나 했겠는가. 게다가 다시 생각나는 그 웃음소리... "오호호호호호호호홋~~~" ...한순간 경직되었다. 한.지.성... 뭘 하는거야, 싸이코 녀석. "...연극은 끝났다, 한지성." "아, 나도 알아. 하지만 얘들 반응이 워낙 재미있어서 말이지. 너는 그래도 좀 덜하다. 경직이 풀리는데 5초밖에 안 걸렸군. 가장 심한 놈은 30초 걸렸어." "누군데?" "양건우." "어라? 그 놈이랑 친해진거냐?" "...그렇게 됐어." 좀 쑥스러운가보다. 저번 선화파 사건 이후로 그 놈이랑은 꽤 친해져서 가끔 매점에 같 이 가는 사이가 되었다. 건우는 현재 선화파를 영입해 일명 '짱'이 되었는데, 이 녀석 실력이 내가 본 것 이상인 모양이다. 예술계 얘들 데리고 싸움하기가 쉽지 않을텐데 어 떻게 야금야금 구역을 늘려가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거 보면 말이다. 어쨌든 내가 지켜 본 바로는 쉽게 친해지는 타입은 아닌데... 건우도 그렇고, 지성이도 그렇고... 뭐, 좋 은게 좋은거지. 사내자식들은 하루아침에 의형제도 맺는걸... 이런, 커피가 식어버렸다. 난 차가운 커피는 싫어하기 때문에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였 다. 남기기는 아까운데... 아, 이제 옷 갈아입어야지. "아아, 나 그만 갈아입는다." "응? 아, 우희가 잠시 갈아입지 말라던데?" "왜? 지가 하라는 연극 다 했으면 땡이지." "모르겠지만.. 좋은 일이 있다면서 갈아입지 말라고 했어. 잠시만 기다려 봐." 무슨 일일까? 이 옷을 입은 채로 삼인조 녀석들을 만날 수는 없는데... 어쨌든 우리 학 교 축제에 온데다 이미 볼거 못볼거 다 봤으니 같이 구경이나 다닐려고 했더니만, 하우 희 고 여우가 꼭 뒷덜미를 잡는다. 할 수 없이 쭈그리고 앉아 식은 커피를 홀짝댔다. 응? 해민이군. "여어- 이해민, 아까는 고마웠다." "뭐, 별말씀을. 근데 왜 그랬어? 어젠 잘 했잖아?" "응? 아아, 원수같은 놈들때문에." "원수같은 놈들?" "나중에 소개시켜줄께. 아, 그렇지. 내가 멋있는 놈 소개시켜줄까? 아까 일 보답으로." 사실 삼인조들 성격이 사악해서 그렇지 인기는 많은 놈들이다. 하긴, 외모수려 . 성적우 수 . 운동만능 . 집안출중 . 이 네가지 토끼를 다 거머쥔 녀석들인데... 그 녀석들이랑 같이 번화가를 다니다 보면 모델이나 탤런트로 스카우트 제의도 많이 받 는다. 물론 녀석들은 단번에 거절이다. 나? 난 기회만 되면 해보고 싶지만...(돈을 많 이 벌 수 있으니까) 나한텐 그런 기회가 오지 않는다. 할 수 없지, 뭐. 나야 남성으로 서 열성종자인걸. 현실에 순응하고는 있지만 생각하면 상당히 열 받는다. 친구가 킹카라는 건 어쩌면 상당 한 스트레스와 두통을 요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자신감 결여에 성격파탄까지 말이다. "아, 아니 됐어. 난 괜찮아." 해민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음, 그것까지 마음에 든다. 여태껏 그 녀석들 소개 시켜달라고 들러붙는 여자는 많았지만 그 녀석들 소개시켜준대도 거절하는 여자는 처음 이거든. 하지만 그 녀석들... 정말 아까운 녀석들인데... "어, 내 친구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 녀석들 정말 괜찮아. 한번 만나보지 그래?" "아... 아니... 사실,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얘도 여자긴 여자인가 보다.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고개 푹 숙이고 말하는 꼴이라니. 뭐,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원래 사랑에 빠지면 제 눈이 안경이고, 눈꺼풀에 콩깍지 쓰 인다고 하지 않는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킹카라도 소용없겠지. 하지만 누군지는 궁 금하다. "누구야? 우리학교?" "...응." "그래? 이름은? 비밀이야?" 해민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남의 프라이버시를 캐묻는 악취미는 없다. 비밀이면 비밀인거지. "그럼 뭐, 잘 해 봐라." 해민이의 어깨를 탁 쳐 주고는 일어났다. 빈 종이컵을 버리고 우희나 찾아야겠다. 왜 아 직도 내가 이꼴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이유나 알자. 해민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천상 여자다. 후훗- "이상하네, 인간들이 안 빠져나가는군." 민재는 율이에게 중얼거렸다. 하진이는 뭐하냐고? 여전히 "참을 인(忍)... 참을 인 (忍)... " 이렇게 듣는 사람 등골 오싹해질 정도로 중얼거리고 있다. 아- 두 눈에서 레 이져가 뿜어져 나올 것 같군. 주변 사람들도 하진의 기에 억눌려 하나 둘 떠나고... 흐음, 하진이 녀석 주위로 딱 여 덟 자리만 비어있다. 한마디로 전부 하진이 녀석 한칸 건너서 앉았단 말이지. "이 녀석아, 다른 사람들에게 폐가 되잖아!!" ...하고 소리칠 배짱이 나에게, 내가 안된다면 율이에게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지 금 녀석을 건드리면 곧바로 황천길인걸 알고 있는 민재에게 그런 배짱이 있을리 없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빨리 신에게 빌수밖에. 저 빌어먹을 녀석 갱생 좀 시켜달라고. 아까 분명히 자신과 눈을 마주쳤으니 이쯤 되면 선유가 나올 법도 한데, 아직 나오지 않 는다. 이 녀석, 도대체 뭘 하고 있는거야. 그 녀석이라도 있어야 그나마 남궁하진이 제 어되는데... 휴우- 나오는 건 한숨이요, 말하는 건 욕이다. 그나저나, 왜 전부 그대로 앉아있는거지? 물론 자신과 율이야 저~ 기서 꼼짝 안 하는 남 궁하진때문에 그런 거라고 해도, 나머지 녀석들에게까지 그 여파가 미치지는 않을텐데? 여기는 가로 100미터, 세로 150미터정도 되는 강당이다. 호오- 그렇다면 남궁하진의 살 기가 500명이 넘는 인간들을 위축시킨단 말인가? 버젼 업이군. 축하한다, 남궁하진. "아아- 마이크 테스트중. 아아-" 아까 연극 시작을 알렸던 목소리다. 흐음, 그렇다면 뭔가 이벤트가 또 있나? "그럼 여러분, 지금부터 <백설공주> 주인공과의 1일 데이트권 판매가 있겠습니다. 참석 하실 분들은 자리에 앉아 정숙해 주십시오." 순식간에 좌석이 가득 차고 시끄럽던 강당안이 조용해졌다. 자, 잠깐... <백설공주> 주 인공과의 1일 데이트권이라고??? 그럼 선유도... 팔린단 말이잖아??!! 말이 좋아 1일 데이트지.. 노예팅이나 다름없다. 저런 걸 그 자존심 센 금선유가 순순 히 받아들였을리는 없는데...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너, 뭐하는 거야!!! 하우희!!!!!" ...하고 외치는 선유의 목소리가 커튼 밖으로 삐져나왔다. 역시, 그럼 그렇지. 그러나 강제적으로든 어떻게든 선유를 이만큼이나 요리할 수 있다니, 대단한 여자다. 하우희라 고? 흠... 민재는 슬쩍 하진을 바라보았다. 하진도 사태를 깨닫았는지 가만히 늘어진 커텐을 응시 할 뿐이다. 뭐, 있는거라고는 돈이요 남는거라고는 지폐인 녀석인데, 어찌보면 신이 하 진에게 준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이 녀석아. 네가 선유를 사면 되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살기좀 폴폴 풍기지 마!!! 씨잉...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혹(眩) - 아찔하다 "...난 안해." "금선유!!!" "시끄러워, 하우희. 안한다면 안하는거야." "과연 네가 그럴 수 있을까???" "죽.어.버.려." "미안, 선유야. 진심으로 사과해. 하지만... 난... 역시... 돈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 구나. 오호홋~~~~" ...미치겠다. 정말 미치겠다. 저 인간 좀 누가 어떻게 해 줄 수 없나? 망할놈의 하우희 같으니라구. 저 여자 꽁꽁 묶 어서 비닐봉지 안에 넣어 박스에 처박은 다음 항공편이든 배편이든 베트남이나 저 벌리 북극해에 가져다 버려주는 인간에게 영혼까지 바치마. 선유는 애꿎은 자신의 머리를 계속 긁어댔다. 옆에선 지성이가 굳은 얼굴로 서 있을 뿐 이었다. 지성이도 몰랐다면... 그렇다면 이건 돈에 미친 하우희가 독단적으로 만들어낸 이벤트라 이거군. 아아- 해민이가 팔려나갔다아~~~ 다행이 여자가 산 것 같다. 이해민 자식, 기집얘가 기집얘한테 인기가 있어서 어쩌자는 건지... 해민이는 이미 포기한 듯, 여자얘에게 다가갔다. 보아하니 아는 사이인 것 같 다. 나는 누가 사게 될지... 젠장할!!! 돌아버리겠다. 삼인조 녀석들... 음... 과연 나 에게 돈을 써 줄 것인가... 어떻게든 아는 넘에게 팔려가야하지 않을까? 이쁜 여자애라면 좋겠지만... 그건 거의 가 능성이 없고. 누가 나를 비싼 돈 치루고 가져가겠냔 말이다. 거저준다고 해도 버릴 나 를... ㅡ.ㅜ "자, 다음은 아리따운 백.설.공.주. 금선유군입니다. 5000원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돈독이 오른 하우희.. 누가 저넘을 말릴 수 있을까... 어김없는 노예상인의 면모를 과시 하는 저 인간을 보아라... 역시 전생은 있는거고, 환생은 있는거다. 그리고 저 녀석의 전생은 100% 노예상인이다. 아아, 악덕 군주도 괜찮겠군. 이왕 이렇게 된거 어쩌겠는가, 팔려나가야지. 선유는 터덜터덜 무대를 향해 나갔다. 최 대한 불량스럽게, 껄렁하게 발걸음을 옮겼지만 드레스에 가려(아직 안 갈아입었죠^^;;)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걸 모르는 선유였다. 선유가 나가자 무대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는 하우희. 그리 고... 무대는 폭주하기 시작하였다. "오천원!!" "칠천원!" "만 원!!" "만 오천원!!" "...이만원." ...어디서 이런 할일없는 새끼들만 긁어 모아놨을까. 옆에서 하우희의 좋아하는 모습에 밸이 꼬일려고 하는 선유였다. 선유는 가만히 10명정도로 줄어들은 자신의 주인님 후보 (?)를 관찰하였다. 오호라, 남궁하진. 저 녀석도 경매에 참가했군. 뭐, 삼인조 중 하나 가 참여할 거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긴 했지만... 저 녀석이 참여할 줄은 몰랐는데. 엑!! 서단영? 저 녀석은 왜 경매에 참여한거지? 저 녀석도 재벌이었나? ..보아하니 불쌍한 친 구 구제해 주려는 모양인데, 저러다 알거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만 오천원!!" "삼만원!!" "사만원!!" "사만 천원!!" "사만 천 오백원!!" "...오만원." "유...육만원!!" "육만 오천원!!" "..십만원." 모두 제정신이 아니군, 제정신이 아니야. 도대체 같은 사내새끼가 뭐가 좋다고 이십만원 이나 부르는건지... 그나저나, 남들은 모두 손을 부르르 떨며 천원단위로 가격을 올리는 데 조용히 내뱉으며 순식간에 가격을 올려버리는 저 녀석은... 아무튼 얄미운 놈이다, 남궁하진. 가격이 십만원대로 올라가자 약 세 녀석이 남았다. 남궁하진, 서단영, 그리고... 모르 는 변태 하나. 저 변태녀석도 어지간히 부자이거나 할일없는 놈인가보다. 둘이서 가격을 무한대로 끌어 올리려고 한다. 가만 두고 보자니... 상당히 열 받는다. 나 지금 여기 왜 있는거지? 지금 저 녀석들... 나 사려고 저렇게 난리피우는 건가? 내가... 왜 팔려야 하지? "십 일만원!!!" "...십이." "십 이만 천원." "윽... 십 삼만원!!!" "십오." "젠장!! 십육만원!!!" "이십." 정말.. 열받는건 왜일까. 누가 나를 사고 파는거지? 누가 나를 물건 취급하는거야? 나는 엄연히 정신을 갖고 사고를 하는 인간, 금선유다. 어떤 이유에서건, 내가 왜 저 놈 들에게 팔려야 하는거지? 이건 내 자존심이 용납을 안 한다. 어쭈, 저 녀석들 보게. 경매는 거의 클라이막스에 다다랐다. 가격은 육십만원까지 올라가고, 단영이는 포기. 남 은건 남궁하진과 한마리 변태녀석뿐. "우라질!! 이십이!! 더이상은 못 내!!" "...이십오." "미친놈!! 너 변태 아냐!! 아무리 예쁘다지만 사내새끼한테 이십 오만원을 들이다니!!" ...변태가 더이상 돈이 없나보다. 포기하더니 열이 받는지 하진이에게 엄청 욕을 퍼부었 다. 뭐, 거기까진 상관없다. 나한테 하는 욕이 아니지 않는가? 난 싸움 구경을 좋아하 는 데다가 내가 아는 남궁하진은 상당히 화끈하게 싸우는 타입이라 멀뚱히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놈이 돌아서더니... "호모새끼 같으니라구. 어디 남자를 꼬시는거야? 잘 해 보시지, 이십 오만원. 비싸게 팔 려서 즐겁냐?" ...죽었어, 저자식. 하진이가 열받았는지 녀석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남궁하진, 그 녀석 건드리지 마. 내 가 처리할거야. 죽었다 깨어났다 다시 죽어도 내 몫이야, 그녀석. "남궁하진, 싸우면 너 죽어. 나하고 약속한게 있을텐데?" 다행이다, 하진이가 멈췄다. 무대 위의 내가 한 말이 어떻게 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하 진이의 귀까지 도달했냐고? 간단하다. 난 우희의 마이크를 잠시 빌렸을 뿐이다. 소란스러운 강당이 조용해졌다. 하진이는 민재와 율이를 양팔에 매달았고 - 지들 딴에 는 말리는 폼이라지만... 누가봐도 양 옆을 호위하면서 같이 싸우는 폼이다. - 그 변태 새끼는 나를 노려보았다. 눈가와 삐죽 올라간 입꼬리가 비웃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네가 네 명을 단축시키는구나. "이봐, 너. 이리 와 보지 않을래?" 할 수 있는 최대한 웃어주며 변태새끼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랬더니 그 놈은 비웃 음이 가득하던 얼굴을 헤벌레한 웃음으로 가득 채우며 나에게 다가왔다. 우희에게 다시 마이크를 건네주고는 가까이 온 녀석에게 쭈그리고 앉아 말을 걸었다. "무대로 올라와? 아님 내가 내려갈까?" 내려가려는 나를 만류하며 녀석은 급히 무대로 기어올라왔다. 변태녀석의 패거리들이 좋 아라고 휘파람을 불어대며 야유를 보냈다. 그래그래, 좀 조용히 해라 아가들아. 이 녀 석 먼저 처리하고 네 녀석들과 놀아주마. 녀석이 느물느물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흐흠... 그래, 한 세 발자국만 더 가까이 와... 한 발자국만.. 됐어. "퍽-" 나는 녀석에게 가차없이 주먹을 날렸다. 녀석은 코피를 흘리면서 비틀비틀 일어서려고 했지만 내가 거시기를 지긋이 밟아주자 그대로 눈깔을 뒤집었다. 뭐야, 이 녀석. 하진이 에게 덤벼들길래 믿는 구석이 있는 줄 알았더니만, 영 젬병이잖아? 내가 때린 걸 신께 감사하라구. 하진이였음 넌 국물도 없었어. "어디서 재섭는 소리를 하고 자빠졌어, 이 새끼가. 사람들이 모두 너같은 줄 알아? 왕싸 이코 변태새끼. 돈 없으면 조용히 꼬리 내리고 사라져, 개자식아." 아아- 시원하다. 역시 하고싶은 말을 마음속에만 담아두는 건 정신건강상 안 좋은 것 같 다. 이렇게 입증되지 않았는가. 옆에서는 우희가 벙 쪄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희뿐 만이 아니다. 삼인조를 제외한 거의 모든 녀석들이 내 움직임을 따라 눈동자만 같이 움 직이며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사람을 겉으로 판단하지 말라니까. 그래, 맞아. 이걸로 끝나는게 아니지. 역시 내 자존심은 '팔.려.간.다'라는 사실을 받아 들일 수 없어. 나는 물건이 아니야. 돈이 좀 아깝긴 하지만 프라이드에 금이 가는 것 보 다야 낳겠지. 그러고보니 언젠가 해본 심리테스트가 기억난다. 사막에서 잡아먹는 동물 순으로 자신이 지키려는 것을 알아보는 거였는데... 기억하건데 내가 끝까지 지킨 동물 은 사자, 자존심이었다. 나는 멍하니 있는 우희의 손에서 다시 마이크를 가져왔다. 그리곤 음성을 깔 수 있는 데 까지 낮게 깔아 말했다. "삼십만원."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우희와 인간들은 무슨 뜻이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하우희, 삼십만원 낸다." "뭐?!! 하, 하지만.. 네가 돈을 걸 수는..." "경매에 나온 사람은 경매에 참여할 수 없다- 고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만... 잠깐, 선유야!!" "다시는 이런짓 하지 마.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사람 갖고 노는거다. 삼십만원은 지금 낸다." 내가 삼십만원을 스스로에게 걸자 강당안의 녀석들은 놀란 것 같다. 그리고 그 와중에 도 하진이 녀석이 돈을 더 걸려는 것을 발견했다. 징한 녀석- 이번 한번만 좀 져주면 어 디가 덧나나. "남궁하진, 지금 나한테 돈 걸면 너 죽을 줄 알아." 손을 올려 돈을 걸려던 녀석이 멈칫 하더니 이내 손을 내린다. 고맙다, 친구야. 나는 삼인조에게 손짓을 했다. 녀석들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무대로 가까이 왔다. "왜?" 하진이 녀석이 퉁명스럽게 말을 걸었다. 하긴, 돈을 떠나서 이 녀석에겐 그리 반가운 상 황이 아닐거다. 무엇에서도 그다지 져 본 적이 없으니... 게다가 정말 능력이 없어서 진 게 아니라 억지로 경매를 그만두게 했으니까. 하지만, 친구가 뭣보다 중요한 걸 지켜야 한다잖니. 좀 도와주고 나중에 천당에서 복 많 이 받으렴. "돈." "뭐??" 민재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뭘 그렇게 놀래? 내가 지금 삼십만원이 어디있겠냐? 당 연한 거 아냐. "돈. 돈 빌려달라고." "뭐야, 너 돈도 없으면서 30만원 내겠다고 했단 말이야?" "집에가서 줄테니까 빌려줘." "허, 참..." "어... 나도 현금은 얼마 없다. 20만원 있는데..." "됐어, 내가 낸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려는 율이를 막으며 하진이 수표를 세 장 꺼냈다. 새삼스레 아까운 마음이 마구마구 들었다. 우욱- 피같은 내 돈... 하지만 미련을 잘라버리고 우희의 손에 십만원권 수표 세 장을 고이고이 쥐어주었다. 돈이 보이자 우희는 정신을 차렸는지 마이크로 발표를 한다. "아, 네. <백설공주> 금선유군은... 사상 최대 금액인 삼십만원에 스스로에게 팔려갔습 니다!!!" 뭔가 어감이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군. 재빨리 갈아입을 옷을 챙겨 삼인조들과 함께 밖으로 나오며 선유는 미소지었다. ...역시 선유다, 라고 해야 하나. 돈으로 그를 살 수 있다고 잠시라도 생각한 내가 너무 안일했다. 그는 자유로운 사람, 그리고 누구보다 프라이드가 강한 사람이다. 남에게 팔린다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겠 지. 하지만.. 나에게라면 상관없을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뭐, 어쩔 수 없다. 선유는 지금 내 등에 업혀있다. 술에 취해 홍알대는 것이다. "흐으... 하진아... 하진아 미안해..." "피식-" 옆에서 민재가 웃는다. 알긴 아는군, 나에게 얼마나 못할 짓을 했는지. 물론... 그는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겠지만. 바람이 센지 율이가 선유에게 스웨터를 덮어 주었다. 녀석이 이래서 오토바이도 못 타 고... 야마하가 이슬에 젖겠지만 그래도 할 수 없는거다. "아아- 금선유 다웠어, 정말." "그래. 선유다웠어." "쿡..." 아무리 열받았다지만 자기 자신을 사려고 돈을 걸다니. 노예팅 사상 그런 건 처음일거 다. 사회자인 그 여자도 어지간히 당황한 것 같더니만... 아마 내일이면 남몰래 피눈물 흘리면서 사라진 삼십만원을 아까워하겠지. 귀여워, 금선유. "어이, 하진. 너 선유한테 돈 받을거야?" "아니." "이 녀석, 빚 지고는 못 살텐데." 안다, 금선유가 어떤 녀석인지. 나에게 어떻게든 그 돈을 갚으려고 아둥바둥 할거라는 걸. 하지만 아까 스스로를 산 게 선유의 자존심이라면, 돈을 안 받는것은 나의 자존심이 다. 이렇게 되면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내가 그를 산 게 되니까. '난 너를 산 거야, 금선유. 너의 평생을 내가 샀어. 그러니까 그 백만원은... 절대로 못 받아.' 난 천사를 삼십만원에 샀다. 굉장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안녕하세요, karin입니다. 드디어 백설공주 파트가 끝나고.. 어느덧 소설상으로 10월이 지났군요. 호홋- 역시 세월이 빨리 가니 좋네요. 그럼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 karin (primblade00@yahoo.co.kr) 우리모두 카린님께 감상을..... 혹(眩) - 아찔하다 "에고... 도대체 내가 왜 이 생고생을 해야하는거야..." "누가 아니래... 쟤들 좀 말려봐..." "야, 니네는 안 드냐!!! 하우희!! 이해민!!!" "놔둬... 우이독경이 별거냐... 포기했다." 한숨짓는 불쌍한 이 시대 사내들을 보라. 그들은 바로 금선유, 한지성, 안성혁, 서단영 이었다. 기말고사도 끝나 느긋하다면 느긋한 12월의 23일의 이 황금휴가기를 도대체, 왜, 어째서, 저 여자들의 짐꾼이 되어 보내야 한단 말인가!!! 말 그대로 네 명의 손에는 짐들이 가득가득 들려있었다. 물론 두 사악한 여인 - 하우 희, 이해민 - 의 손은 따뜻한 장갑이 끼워진 빈.손.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하우희의 제안이었다. 방학 후 집에서 빈둥거리던 선유에게 난데없이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시간 있냐고 묻는 하우희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같이 크리스마스 쇼핑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사실 선유는 남들과 함께 쇼핑하는 것을 싫어했다. 우선 사람이 복작거리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데다가 남들과 쇼핑을 가면 쉬고싶은 때 쉬지도 못하고, 보고싶은 것 보지도 못 하고 계속 눈치보면서 따라다녀야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삼인조 녀석들이야 필요한 것 만 카드로 긁고 나머지 시간은 선유의 편의에 따라 맞춰주기 때문에 편했지만... 다른 인간들이 모두 삼인조 같지는 않기 때문에 괜히 힘빼면서 물건사고 싶지는 않은 선유였 다. 그리고 매년 크리스마스 쇼핑은 삼인조들과 함께 했었기 때문에 거절하려던 선유 는, 이내 마음을 바꿔 승낙했다. 삼인조 녀석들 모르게 살 물건이 있었던 것이다. 선유가 사는 크리스마스 선물 목록은 매년 비슷했다. 고모님 내외분과 삼인조의 선물 - 보통 원하는 것을 물어보고 그에 따라 사 줬다 - ,어린 사촌들의 선물 - 선유는 아이들 을 매우 좋아했기에 하나하나 챙겨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내주었다 - , 반 친구들에 게 보낼 카드 정도. 하지만 올해는 사야할 물건이 하나 더 생겼다. ...부모님 영정에 바칠 국화 다발. 선유의 부모님은 크리스마스 바로 다음날 돌아가셨다. 선유의 아버지께선 그 방랑벽 끝 에 사진작가가 되셨는데, 물론 방랑벽을 버리지 못하고 틈만 나면 부부가 세트로 촬영 을 다니셨다. 선유도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곧잘 따라다녔다지만 그다지 기억에 남 는 추억은 없고, 어쨌든 당시 초등학생이던 선유는 학교를 빠질 수 없던 관계로 고모댁 에 맡겨졌었다. 선유는 지금도 그 날을 자세히 기억할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의 들뜬 분위기 속에 한달 전 어머니의 모국 러시아로 떠났던 부모님이 돌아온다는 전언은 얌전했던 선유를 들뜨 게 만들었다. 부모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부모님 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선유가 그렇게 가지고 싶어하던 '전자동식 장난감 차'를 사오시기 로 했기 때문이었다. '전자동식 장난감 차'는 상당히 비싼 물건이라 부모님도 망설이셨 지만 평소 조용하던 선유가 상당히 떼를 쓰자 돌아오는 길에 사 오겠다는 약속을 했었 다. 나름대로 부모님의 입국을 환영하는 선물도 만들었었다. 그래.. 조그만 천사였지. 한 손가락 크기만 했던가? 금빛 날개와 링을 가진...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 행 복한 미소를 짓는 천사였다. 크리스마스 당일날, 부모님이 늦겠다는 전화를 하셨다. 선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던 '전 자동식 장난감 차'가 러시아에서는 구할 수가 없어 잠시 미국에 들려 사오겠다고 하셨 다. 선유는 '전자동식 장남감 차'를 가지고 싶은 나머지 하룻밤 정도는 참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하룻밤은... 영원한 밤이 되었다. 미국에서 귀국하시던 부모님은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셨고, 선유는 그대로 고모님 댁에 머물게 되었다. 모든 것은 '전자동식 장난감 차' 때문이었다. 아니, 욕심을 부렸던 자 신 때문이었다. 어린 마음에 스스로를 자책하였다. 말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그렇게라 도 하지 않으면 참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남들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깊은 밤 혼자 입을 악물고 흐느꼈다. 그렇게 두어달을 링겔로 연명 했던 것 같다. 다시 보통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계기는 하진이었다. 눈이 쌓인 밤, 부모님 생각에 다 시 눈물이 났지만 자신을 돌보다 곁에서 잠드신 고모님 때문에 울 수가 없었다. 혼자 울 기 위해 몰래 정원으로 나갔고... 그곳에서 하진에게 붙.들.렸.다. 달리 표현할 수가 없다. 그야말로 도망가던 자신을 하진이 붙잡았기 때문이다. 눈물이 이미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 놔 달라고 소리쳤지만 하진은 무시했었다. 화 가 나 하진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소년의 손은 생각보다 완력 이 강했다. 부모님 생각으로 센티멘탈해진데다 화까지 나자 남이고 뭐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거의 앙탈부리듯 우는 자신을 하진은 안아주었다. 좀 창피한 느낌도 있었지만, 오랜만에 안겨보는 남의 품은 너무 따뜻했었다... 올해는 하진네 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가 있다고 한다. 내일 저녁부터 25일 저녁까지 하 는 파티니 아무래도 부모님 묘소에는 내일 아침에 다녀와야겠지... 26일이 기일이니 26일날 갈수도 있지만... 그때는 세 녀석이 붙을 것이다. 26일이 부모 님의 기일인 것은 세 녀석 다 알고 있었고,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에 세 녀석 모두 부모 님 산소까지 따라왔었다. 하지만 올해는 혼자 가고 싶었다. 녀석들이 부담스럽다거나 싫다는 건 아니었다. 오히 려 매년 기일에 받는 배려 - 기사 아저씨를 부르는 하진과, 벌초를 해주는 율이와, 이 것 저것 음식 준비를 해 주는 민재 - 는 지나칠 정도여서 언제나 세 녀석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세 녀석이 함께 가면 자신도 나름대로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다. 그래도.. 혼자 가야 할 것 같았다. 남에게 의지하는 아들이 아닌, 홀로 선 아들을 보여 드려야 할 것 같았다. 고등학생 주제에 무슨 술이냐며 삼인조들을 다그쳤지만... 올해는 소주 한 병을 들고 가 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쿡... 그런 이유로, 세 녀석 몰래 국화와 소주를 사가지고 가야 했다. 녀석들이 알면 당연하다 는 듯이 따라올 것이기에... 미안하긴 했지만 올해는 우희네들과 같이 쇼핑을 나온 것이 다. "브랜드 커피." "저두요." "아메리칸." "난 마운틴 듀." "체리에이드." "에? 춥지도 않아?" "덕분에 노동을 많이 해서 끄떡없다네." "그래? 그럼 더 돌아다녀도 괜찮겠네?" "웃기지 마, 하우희. 내가 미쳤냐?" "음.. 난 녹차." "뭐야, 금선유. 할아버지처럼 녹차가." "맛있으면 장땡이지. 난 중국차가 좋아. 커피보다는." "너 커피도 잘 마시잖아?" "뜨거운 건 뭐든지 잘 마셔." "엑- 역시 늙은이 같아." "하우희, 노인을 공경하도록 해. 늙은이가 뭐야, 늙은이가." "아, 정정하지." 계속 횡설수설하는 일행을 보다못한 종업원이 재확인을 했다. "브랜드 커피 두 잔, 아메리칸 커피 한 잔, 마운틴 듀와 체리에이드, 그리고 녹차. 맞습 니까?" "네." 날씨가 추운 탓인지 붉어진 종업원의 얼굴이 사라지자 다시 떠들썩해졌다. 크리스마스 쇼핑을 나온 사람들이 꽤 많은 탓인지 번화가의 커피숍은 가득차 있었다. "와- 이 사람들 좀 봐라. 정말 징그럽다." "우리나란 인구밀도가 너무 높다니까." "자네도 거기 일조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안성혁군?" "금선유군, 자네도 마찬가지라네." "여기까지 와서도 말싸움이냐? 이젠 나도 지겹다." 한숨짓는 지성이를 보며 단영이가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종업원이 음료를 내오자 모두들 피곤한지 간간히 대화를 나누며 밖을 내다보았다. 12월 23일의 거리는 쌍쌍의 연 인들, 친구들, 각종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아아, 난 사람 많은 건 질색인데." 선유가 한숨지었다. 익숙하지 않다 보니 사람이 너무 많으면 의욕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다. 아니, 그것을 넘어서 두통까지 밀려왔다. "여전히 노인같군요." 지성이의 지적을 받아들여 '늙은이'를 정정한 우희가 우습다는 듯 말했다. "선유는 얘늙은이 같은데가 있지." 해민이도 거든다. 아니, 내가 뭐랬다고 단체로 시비야, 이것들이. "그나저나, 너희 필요한 건 다 산거지?" "응. 이젠 남자들 거 사러가면 돼." "에휴- 다시 쇼핑이냐..." "오늘은 얼마 안 남았다구. 어서어서 움직여야지." "하우희!! 너, 커피 다 마셨다고 그러는게 어디있어!! 난 아직 반이나 남았단 말야." "단숨에 마셔. 느리기는." 고모부의 선물로는 크리스찬 디올의 넥타이를, 고모님의 선물로는 아쿠아스쿠텀의 스카 프를 골랐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주려고 항상 노력하시는,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 을 걱정해 주시는 분들이기에 선유는 두분의 선물을 고를 때 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았 다. 친구들에게 보낼 크리스마스 카드도 골랐다. 친구들과는 선물을 주고받지 않고 카드 로 해결했다. 돈 없는 학생들 나름대로의 해결법이다. 하지만 삼인조 녀석들의 선물은 사야 했다. 그 녀석들이 매년 자신의 선물을 가져오기 때문이었다. 받기만 하고 안 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게다가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 습 관처럼 굳어져 있기에 고모님 내외의 선물을 고르자 곧바로 삼인조의 선물에 생각이 미 쳤다. 언제나 세 녀석들에게 주는 선물은 - 다른 것을 주면 왠지 차별받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 기 때문에 - 같은 종류의 색깔만 다른 물건이었다. 그래서 매년 고를 수 있는 것이 한정 되어 있었다. 게다가 자신보다 부자인 녀석들이기에 왠만한 걸 선물해서는 오히려 짐만 될 것 같았다. 덕분에 본의아니게 녀석들의 선물은 매년 선유의 중요과제이자 난제였다. 작년에는 색깔만 바꾼 펜을 선물한 것 같은데.. 올해는 뭘 해야 할지... 망설이던 선유 는 가볍게 목도리로 낙찰보고는 민재를 위해 붉은 색 목도리를, 율이를 위해 남색 목도 리를, 그리고 하진을 위해 검은색 목도리를 골랐다. 문양이 있는 것보다 단순한 게 낳 을 듯 싶어 단색으로 샀다. 종업원에게 포장해 달라고 말하고 나니 지성이가 보석점 앞에서 망설이는게 보였다. "뭘 봐?"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왜? 누구 악세서리 선물하려고?" "아, 그래..." 좀 내키지 않는 듯 대답하는 지성이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기에 놀리고 싶었지만, 예수 님 탄생일을 이틀 앞두고 착한 일 좀 하자 싶어서 묻는 걸 관뒀다. "뭐 사게? 반지?" "모르겠어. 난 이런 건 잘 몰라서..." "하긴, 나도 잘 모르는데..." 중얼거리면서 보석을 훑어보았다. 색색의 보석이 조명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 다. "와아.. 예쁘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붉은색의 루비가 찬연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단순하지 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혹적인 분위기에 취했다. "응? 아, 이건 루비 피어스야. 옆의 조그만 건 다이아몬드. 이래뵈도 진짜지." 주인인 듯한 아저씨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선유 너 귀걸이 사려고?" "아..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너무 예쁜 보석에 마음이 끌렸다. 몸에 상처내는 건 싫지만.. 이건 너무 예쁜데... "어쩌지? 귀 뚫을까?" "뭐야, 네가 하고 싶은 거였어?" "이쁘잖아. 갖고 싶어." 그 말을 하자 지성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흐음, 그렇다면 사는 게 좋을 듯 싶은데." "왜?" "넌 집착을 하지 않으니까. 좋고 싫음은 구별하는 것 같지만... 단지 그 뿐인 것 같아 서 말이야. 그런 니가 갖고 싶다고 할 정도면 꽤나 마음에 들었다는 거잖아." "...그래?" 내가 집착을 안 한다고?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지성이의 말은 나를 더욱 더 부 추겼다. "으.. 고민된다. 아픈건 싫단 말이야." "요즘은 안 아파. 귀 뚫는건 초등학생도 한다구."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다. 음... 더 고민되잖아... "에라, 모르겠다. 뚫어주세요. 아프면 그때가서 어떻게 되겠지." "허허.. 얼굴은 예쁘장한 학생이 말은 과격하게 하네." 예쁘다는 말이 거슬리긴 했지만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해서 기분이 좋았다. 잠시 따끔한 느낌이 들더니 어느새 내 귀에 붉은 루비가 박혀있었다. "얼마예요?" "학생에게 상당히 비쌀 텐데..." "괜찮아요. 집만 팔아먹지 않으면 되겠죠. 얼만데요?" "삼십만원." "에엑!! 그렇게나 비싸요? 말도 안 돼!!!" 왜 말이 다르냐고 비난하지 마라. 학생에게 삼십만원이 어디 싼 돈이냐. 백날 땅 파봐 라. 십원이 나오나. 하지만 주인 아저씨는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말했잖아. 저거 진짜라니까, 게다가 크기도 꽤 크고. 좋은 물건이야." "우웅... 아저씨, 고민되잖아요. 잠깐만요." "그래." 어떻게 하지... 물론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하긴 했지만... 백만원이라니. 나 요즘 돈을 너무 쉽게 쓰는 거 아닌지 몰라. 축제때도 삼십만원 썼는데... 그러고 보 니 하진이 녀석에게 돈을 못갚았다. 그야말로 못 갚은거다. 녀석이 죽어도 안 받으려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주겠는가. 이유를 물어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음... 이거 하진이 녀석한테나 줘버릴까? 삼십만원 대신. 우선은... 너무 맘에 드니까... 나중에 하진이 녀석한테 주더라도... "카드로 계산해 주세요." 아아- 나는 충동구매를 해서 탈이라니까. 별 수 없다.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놈인걸, 뭐. 지성이는 내가 귀를 뚫는 사이 재빨리 귀걸이 한 쌍을 골랐다. 보여달라고 졸랐지 만 죽어도 안 된다며 급히 감췄다. 도대체 누굴 주려고 저러는건지... 내가 귀를 뚫은 모습을 보자 우희와 해민이가 뛰어왔다. 나와 어울린다느니, 참 잘 샀다 느니, 칭찬을 했지만 그들 손에 가득 들려있던 봉지를 나에게 넘기기 위한 정책인 것 같 아 입맛이 썼다. 의외로 성혁이도 별 말 하지 않았고, 단영이는 예쁘다면서 자기도 사야겠다고 아저씨에 게 같은 물건을 찾았다. 하지만 루비는 더 없다는 말에 입맛을 다시며 파란 색 사파이 어 피어스를 샀다. 단영이도 물론 귀를 뚫었다. 내가 귀를 뚫은 모습이 상당히 괜찮았나보다. 단영이 녀석이 냉큼 따라 뚫는 걸 보 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안녕하세요, karin입니다. 으윽- 머리가 아파요.. 두통이... ㅠ.ㅠ 세월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크리스마스네요. 아아.. 어서 12월이 왔으면... 할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졸려요... 우에엥... 그럼, 허접글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혹(眩) - 아찔하다 높은 천장에는 시가 몇백만원에서 몇천만원을 넘나드는 샹들리에가 간격을 두고 매달려 있었다. 조그만 크리스탈에 비친 불빛이 찬란하게 반짝였다. 비싼 고급 드레스와 턱시도 로 무장한 사람들. 온 몸을 감싼 색색의 비단에 눈이 부셨다. 테이블마다 캐비어와 푸와 그라, 송아지 연뇌 찜이라던가 연어 뮈네아르등 이름도 모르는 비싼 음식들이 가득 채워 져 있었고, 붉고 흰 와인과 각종 술들이 반짝이는 유리잔과 함께 놓여 있었다. 여기저기 서 제복을 갖춰입은 시중인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모두가 즐겁게 웃으며 <남궁>가에서 주최한 파티의 호화로움에 감탄했다. 보석에 관한 이야기, 유명 브랜드에 관한 이야기, 최신 스포츠카에 관한 이야기... "짜증나." 선유는 조용히 읍조렸다. 한쪽 손에는 반짝이는 크리스털 글라스를, 또 한쪽 손에는 새 우 카나페를 든 선유는 연회장 한쪽 구석에 기대서 파티를 지켜보고 있었다. 검은색 정 장을 차려입고 귀에는 붉은 루비를 단 그의 모습은 은연중 색기를 풍기고 있었다. 당연 히 근처의 사람들은 힐끔힐끔 그를 쳐다봤지만 원래 남의 시선에 무관심한 - 다른이들 은 둔하다고도 표현하는 - 그인지라 알아채지 못했다. 평소 창백한 선유의 두 볼은 취기로 인해서인지 붉어져 있었다. 크리스털 글라스 안에 는 자주빛 액체가 담겨 있었고, 그는 술쟁반을 들고 다니는 시중인이 곁을 지나칠 때마 다 글라스를 바꾸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술을 즐기거나 잘 마시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평소의 선유는 그 쓴 맛을 왜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며 눈을 찌푸렸고, 그의 주량은 소주 반 병 정도였 다. 게다가 그는 고지식한 사람이었기에 고등학생이 술을 마신다는 것을 <나쁜 짓>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오늘만큼은 안 마실 수가 없는 것이다. 삼인조 중 한명이라도 있다면 그를 말렸겠지만, 그는 조용히 파티장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민재나 율, 하진은 그가 왔 는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정말... 마음에 안들어... 뭐가 자신을 이렇게 미치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자제력을 잃고 이유업 이 화를 내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아.. 이유가 없는건 아니지... 오늘 아침, 삼인조 녀석들 몰래 부모님 산소에 다녀왔다. 잡초를 뽑고, 절을 드리고... 산소에 소주 몇 잔을 뿌리고 나도 마셨다. 알딸딸한게 기분이 좋았다. 술맛에 마시는 게 아니라 술기운에 마시는 것이었나보다. 쿡... 덩그러니 놓여있는 부모님의 묘를 보니 새삼 원망스러웠다. 현재 자신의 상황에 불만스 러운 것이 아니다. 분명히 자신은 고아의 처지에 있는 다른 수많은 아이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하하... 내가 어떻게 두 분을 원망하겠어. 애초에 두 분이 미국행 비행기를 타시게 된 건 나 때문이었는데... 어찌 보면 내가... 이 내가... 아니, 부질없는 생각이다. 선유는 감상적이 되려는 자신을 추스렸다. 울고 싶었다. 하지 만 울 수 없었다. 혼자 오는건 아무래도 너무 이른 선택이었나보다. 삼인조 녀석들과 함 께 왔을 땐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없었는데.. 아아... 이건 외로움이구나... 평소 주량을 넘어서는 소주 한 병을 비우고서야 겨우 자리를 뜰 수 있었다. 몸은 제어 가 힘들었지만 어서 누군가를 보고 싶었다. 나를 이해해주는 누군가를... 삼인조 녀석들이나, 고모님.. 그래, 해민이나 다른 녀석들도 괜찮겠지. 아무나, 아무나 라도 좋아. 나에게 어깨를 빌려줄 수 있다면... 외로워, 외로워, 외로워... 집으로 향했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하진이네서 크리스마스 파티 가 있었다고 했던것 같군... 오랜만에 와보는 남궁가의 대저택에 위축될 법도 했지만, 술기운은 선유에게 호승심과 평소에 깊이 숨겨져있던 악마적인 내면을 드러나게 했다. 악마적이라고 해도 그다지 나쁜 뜻은 아니다. 좀더 차갑고, 좀더 싸늘하고, 그리고 좀 더 매혹적이다... 라고 해야 하나? 도발적이고 서늘한 그 아름다움이 선유의 표면을 장 식하고 있었지만 선유의 내부는 타오르는 불처럼 뜨거웠다. 외로워를 남발하다보니 이유없이 짜증이 났다. 그냥 모든것에 짜증이 났다. 그리고 화 가 났다. 이런 기분..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어. 그래, 언제였더라.. 생각하는 것 자체도 싫다. 나를 건드리는 것도 싫다. 누군가에게 화라도 내고 싶어. 울 고 싶어. 짜증내고 싶어. 부글부글 타오르는 마음을 술로 가라앉히려고 메독산의 붉은 와인을 3잔째 마시고 있었 지만 그것도 잠시뿐, 계속 속에서 무언가를 폭발시키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사람들이 거는 말 한마디에 폭발할 것 같아 되도록이면 혼자 있으려고 일부러 삼인조에 게 알리지도 않았는데... 아무래도 틀린 모양이다. 자신의 앞에서 비웃는 표정으로 서있는 이상한 사내녀석을 바 라보며 선유는 한숨을 쉬었다. "무슨 용건이 있으십니까?" 지금 상태로는 예의고 나발이고 필요없다. 저 놈이랑 시비가 붙으면 자신은 틀림없이 폭 발할 것이다. 그랬기에 최대한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제는 저놈이 그런 걸 알아챌 만한 눈썰미가 없다는 거고. "혼자서 뭘 하고 있지? 보아하니 제대로 차려입지도 않은 모양인데." 그래서 뭐가 문제라는 거야. 물론 자신이 제대로 차려입은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이곳 에 있는 최상류층 인간들의 관점이고, 지금 자신의 차림은 일반적으로 정장이라 부르는 것이다. 부모님 산소에 다녀오느라 일부러 검은 색을 입었기에 특별히 예의에 어긋난것 도 아니었다. 아무튼, 선유의 앞에 선 남자는 선유의 옷차림을 보고 선유가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집 의 아들이라고 판단을 했는지 아무 거리낌없이 반말을 해댔다. 사소한 일 하나까지 짜증 이 나서인지, 그 반말이 매우 거슬렸다. "그래서?" "응?" 자신을 노려보는 선유의 눈동자가 예상 밖이었는지, 기세좋던 사내는 잠시 멍청히 되물 었다. "무.슨. 용.건.이.냐.고." 한마디씩 알아듣게 딱딱 끊어 말해 주었건만,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다. 화난 표정이 되 는 것을 보니. 그래그래, 네녀석에게는 너무 고차원의 대화였구나. 한 놈이라 그래도 떼로 몰려다니는 겁장이 놈은 아니네... 라고 생각했건만. 왠걸? 그녀 석의 표정이 바뀌자마자 주변에서 몇명의 계집얘들과 몇명의 사내녀석들이 나온다. 혹시가 역시고 역시가 당연이지... "뭐야, 얘는? 제대로 차려입지도 않았잖아?" 이 놈들에게는 옷만이 세상의 모든 기준일까? 왜 자꾸 옷가지고 시비거는거야? 뭐, 특별 이 할 말도 없었기에 계속 글라스를 만지작만지작 거리며 붉은 와인을 목구멍으로 넘겼 다. 씁쓸하면서도 여운있는 뒷맛이.. 지금은 좋다. 아아, 세상이 돈다, 돌아. 쿡쿡... 쿡... 헤실헤실 웃는 나에게 모두들 굳어져서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다. 누가 그랬잖은가. 웃 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라고. ...내 기분은 점점 침체되었지만... 민재 녀석과 율이 녀석은 점심시간쯤에 도착했다. 우리집에서 여는 파티지만 그다지 관 심도 없고, 어차피 내가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해서 한가했기에 일부러 녀석들을 불러들 였다. 그런데 민재녀석이 혼자 온 것이다. 선유의 행방을 묻자 자신도 모르겠다며 웃는 녀석의 얼굴을 진심으로 한방 치고 싶었다. 선유의 사촌만 아니었으면 정말 쳤다. 이맘때의 선유는 누가보아도 아름답다. 평소의 약간 냉정한 이미지 대신 좀 아슬아슬하 고 슬픈듯한 모습에 모두들 매혹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선유의 아픔에서 나오는 부산물이라는것을.. 안다. 선유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12월 26일이면 선유는 언제나 우리들과 함께 산소를 찾는다. 가서는.. 아무말도 안하고,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다만 무덤의 풀만 쓸어내리다... 그렇게 돌아온다. 그러나 그가 가슴속으로 많은 절규를 하고 있다는걸... 안다. 알지만 그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 아니, 그것을 받을 그가 아니다. 그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파티가 시작되자 민재와 율이 녀석은 인사만 하고는 별채로 들어가 게임에 빠졌다. 나 는 선유가 도착하면 같이 들어가겠다면서 연회장에 남았다. 이상하게.. 선유가 왔다는 연락이 오질 않는다. 왠지 불안해서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는 집사를 불렀다. "선유는 아직인가?" "네? 아니요, 아까 오셨습니다만..." "뭐? 그런데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지?" "선유 도련님께서 직접 찾으시겠다며 괜찮다고 하셔서..." 그런데 왜 아직까지 나와 마주치지 못했을까? 계속 파티장을 누비고 다녔건만... 그렇게 생각했을때 파티장 한 구석에서 약간 소란스러운 기미가 보였다. 바라보니 윤석 이 패거리들이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맙소사... 이윤석이란 녀석은 대산그룹 부회장의 아들이다. 부모의 지위를 믿고 날뛰는 녀석- 이라 는 말로 압축할 수 있는, 머리는 텅 비고 주머니엔 돈밖에 없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 을 온 몸으로 표현하는 인물. 아마 옆에 있는 인간들도 같은 부류일 것이다. 상관하고 싶진 않지만 어쨌든 우리 가문에서 주최한 파티이므로 소란을 방지하기 위해 그쪽으로 갔다. 그런데.. 녀석들이 둘러싸고 있던 것은 선유였다. 왜 선유가 한 구석에 그렇게 처박혀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는 위태로워 보였 다. 공중곡예를 하고 있는 사람처럼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그렇게 위태로워 보였다. 하 지만 그만큼 아름다웠다. 언제 뚫었는지 귀에는 붉은 피어스를 하고 있었다. 흰 피부에 검은 정장이 대비되어 어 울렸고, 몸에 맞는 양복은 그를 가녀리게 만들었다. 더이상 생각하고 자시고도 없었다. 그에게 가야한다. 저 상처입은듯한 눈을... 달래줘야 한다. "선유야." 내가 다가가자 윤석이 패거리들이 놀라며 길을 터 주었다. "어, 하진형. 아는 사람인지..." "왜 너희들이 선유를 둘러싸고 있는거지?" "놔 둬, 하진." 술에 취해서인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아니... 그게 아닌가보다. 손을 잡아보니 열이 있다. "선유야, 너 열 나." "괜찮아. 쿡쿡..." 그가 웃자 윤석이 패거리들이 남녀 가릴 것 없이 얼굴이 빨개져서는 그만을 바라보았 다. 더 이상은 용납하지 못할 것 같다. "이리 와." "괜찮데두.. 헤헷... 하진아... 하진아..." 실실 웃는 그가 보기 싫었다. 아니, 남들 앞에서 실실 웃는 그가 보기 싫었다. 재빠르 게 그의 손에서 와인잔을 빼앗아 들고 그를 번쩍 들었다. 이미 다리가 풀려있었는지 아 무런 반항없이 내 가슴으로 고개를 묻었다. "하진아... 하진아..." 슬프다고, 울고 싶다고 그렇게 온몸으로 표현하는 그를 보니 화가 났다. 매년 그럭저럭 넘겼는데.. 올해는 그게 안 될 모양이다. 그를 데리고 내 방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 를 낳았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의 부모님을 존경하지만, 이맘때는 얄미워지기까지 한다. 이제 그만 그를 놓아주었으면... 한다. 놓지 않는것이 그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원망할 수 없기에 얘꿎은 그의 부모님을 원망할 뿐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안녕하세요, karin입니다. 너무 늦었죠? 저도 고의가 아니랍니다.(진짜??) 에헤헷... 변명이 어설퍼도 이쁘게 들어주시길. 혹(眩) - 아찔하다 "만취했군." 하진은 침대에 나를 내려놓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 취했어... 나 취했어... 그래 서... 그래서... "쿡쿡... 하진아.. 하진아..." 잠시 나를 내려다보던 하진은 이내 내 곁으로 와 타이를 풀러주었다. 단추를 두어게 푸 르자 한결 편했다. 그리고는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어보았다. 왠지 모르게 그 행동 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내 얼굴은 이미 취기 때문에 붉어져 있었기 때문에 하진은 그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쿡쿡... 하.. 하하하... 하하하하..."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정말 웃고 싶었다. 모든게 즐거웠다. 이 파티도, 하진이도, 나도. 웃겨서 견딜 수가 없었다. 유쾌했다. "휴우..." 그런 나를 바라보며 하진이 한숨을 쉬었다. 왜 그래? 뭐 고민되는 일이 있어? 한숨쉬지 말고 웃어. 나처럼. 그럼 기분이 좋아질거야. 틀림없이. "...울고 싶으면 울어. 그렇게 처량하게 웃지 말고." "하하... 하.. 하...?" 처량하게 웃는다고? 내가? 울고 싶다니, 누구에게 말하는 거야? 이 방에 하진이와 나 이 외에 또 다른 사람이 있나? 내가 왜 울어. 아니, 내가 울고싶은 얼굴을 하고 있는거야? 설마. 내가 어떤 사람인데,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표정을 짓겠어. 내가 어떤 사람인 데... "울어. 마음껏 울어." 이상하다. 내 얼굴에서 물기가 묻어났다. 왜 이럴까? 내가 침을 흘렸나? 그런데 왜 침 이 아래로 흐르지 않고 위로 흐르는 거지? 눈가까지 젖어있는 걸 보면... 내가 거꾸로 누워있는거야? 아, 취했구나. 취해서 그렇게 느껴지는구나. 그렇지? 그런거지? "내가.. 내가 왜 울어.. 울기는.. 내가.. 왜..." 하진이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그래, 이 느낌도 언젠가... 아!! 기억이 났다. 이 느낌... 하진과의 첫 만남. 눈이 쌓였던 그 밤에 나를 안아주던 하진. 남의 품에서 마음껏 울었던 그날. 그렇구나. 이제껏 느꼈던 짜증스러움이 생소하지 않았던 건... 이미 예전에 한 번 느꼈 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마음껏 매달려서 앙탈부리고, 짜증내고, 어리광부리고 싶었 기 때문이었다. 이미 예전에 한 번 해서인지, 나는 더욱 더 하진이에게 매달렸다. 마치 오늘이 아니면 어리광을 부릴 수 없다는 듯, 아기처럼 흐느끼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런 나를 하 진은 꽈악 안아주었다. 내 등을 받치는 그 강한 팔을 느끼자 마음이 편해졌다. "흑... 으흑... 너.. 너 때문이야..." "응, 나 때문이야." "흑.. 오늘.. 부모님 산소에 갔어.. 풀이 많이 나 있었어.. 그것도 너 때문이야..." "응, 그래. 나 때문이야." "소주를 마셨어. 너 때문이야..." "맞아, 나 때문이야." "부모님이 돌아가신것도, 내가 화내는 것도, 전부 너 때문이야!!" "알아, 나 때문이야." "내가 우는 것도... 너 때문이야.." "그래. 나 때문이야. 모두 나 때문이야." 잠자코 내 투정을 받아주는 하진이에게 나는 마음껏 어리광을 부렸다. 하진은 내 억지에 도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나는 한동안 그의 품에서 울먹거리다가 잠들었 다. 잠결에 무언가 따뜻한 것이 내 얼굴을 스친 것 같지만,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눈가를 스치는 빛에 아침이라는 걸 알았다. 부시시한 상태로 일어나던 선유는 자신이 왠 커다란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과, 잠옷으로 갈아입었다는 것, 그리고 그 잠옷이 상당 히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긴 하진이 방이군. 어제 하진에게 부렸던 추태를 생각하니 새삼 얼굴이 빨개졌다. 하진이 녀석, 상당히 황 당했을 것이다. 갑자기 땡깡부리는 친구를 추스리랴, 투정 받아주랴... 그 녀석은 내가 우는데 상당히 약한가보다. 아니, <운다>라는 행위 자체에 약한 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녀석에게 상당히 미안하고... 고마웠다. "일어났군." 하진이가 욕실에서 나오며 나를 보았다. 샤워가운 사이로 탄탄한 가슴이 보였다. 그 남 성스러움의 극치에 얼굴이 붉어졌다. 혹시 나 변태인가? 저 녀석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하는데... 윽... 차마 입에서 말이 떨어지질 않는다. 평소에 그런 말을 하지 않던 친한 사이여서 더욱 쑥쓰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정말 고마웠다. 나도 모르게 하진에게 어리광부리는 걸 즐긴 모양이었다. 그에 게 2번이나 그런 투정을 하다니... 쿡... 그러고 보면 하진이 자신에게 특별하긴 특별한 존재였나보다. 누구보다 믿을 수 있고.. 절대 날 배신하지 않을... 절대 날 버려두지 않 을.. 인생에 몇 없는 그런 친구. 어제밤, 자신의 억지를 다 받아주며 자신을 안아주던 그가 생각나자 왠지 웃음이 났다. 평소의 남궁하진의 성격으론 절대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이다. 저 뻔뻔스러움과 퉁명스러 움이 철철 넘치는 녀석의 어디를 보고 그런 따스한 행동을 상상할 수 있겠냔 말이다. 그만큼 자신을 생각해 주었다는 말이다. 남들이 모두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자 신의 기분을 알아챌 만큼... "고... 마워." 이런 때도 쑥쓰러움을 타는 자신의 성격이 원망스럽긴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 고.. 할 수 없이 거의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하진은 들었다 고 생각한다. 아니, 그는 내 말을 들었다. 몸을 돌려 드레스 룸으로 향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어제와는 달리 기분 좋은 아침이다. 매년 12월 26일을 기점으로 그 날이 다가올수록 내 기분은 저하되었었는데, 올해는 다를 것 같다. 내일 다시 녀석들과 부모님 산소에 다녀 와야겠다. 이번엔 아주 홀가분하게 다녀올 수 있을 것 같다. karin (primblade00@yahoo.co.kr) 혹(眩) - 아찔하다 "추웟!!!" "...선유야. 그럼 더 춥지 않냐?" "몰라! 추워! 춥다구!! 춥단 말야!!!" 오늘은 2월 18일. 봄방학인 오늘 내가 왜 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안내 데스크에 앉아 추 위에 떨고 있어야 하는건지, 저 망할 인간들에게 물어봐라. 구정때 우리반 모임이 있었었다. 축제때 1등을 먹고 학교에서 받은 상금 중 남은 돈으 로 노래방도 가고, 카페도 가고 재미있게 놀았다고 한다. 그때 난 뭐했냐고? 집에서 독 감에 시달려야 했다. 체질이 체질인지라 워낙 감기를 많이 걸려 웬만한 증세에는 끄떡없 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감기때는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열이 상당히 많이 올라 몽롱 했으니까. 덕분에 겨울방학동안 어디 하나 제대로 다녀온 데가 없다. 하진이랑 율이넘이 놀러와 주 긴 했지만... 거의 1달을 집안에서만 꼼짝없이 생활해야 했다. 게다가 이때다, 하고 나 온 고모님의 수많은 건강식품들!!! 생식이니, 홍삼이니, 웅담이니... 정말 듣도 보도 못했던 많은 식품들이 냉장고에서 쏟 아져 나왔다. 그리고 난 고모님의 필살 째리기에 못 이겨 눈물을 머금고 그것들을 다 먹 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억울한데, 이 놈들이 구정때 내가 안 나간 것을 핑계로 졸지에 나를 <임 시 학생회 위원>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임시 학생회 위원>이 뭘 하느냐 하면, 남들 전부 따뜻한 방구석에 기어들어가 귤이나 까먹고 있을 2월에 학교에 나와 이렇게 오들오들 떨면서 신입생 입학 안내를 한다. 하지 만 솔직히 말해 건물과 동떨어져있는 저 무식한 강당을 못 알아볼 사람은 없다. 결론은 '구색 맞추기'라는 거다. 아니... 제대로만 한다면 구색 맞추기는 아니군... 이른바 '어린얘 뒤치닥거리'를 맡은 거잖아. 선유는 친절하게 안내를 하고 있는 단영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다른 학교들처럼 춘삼 월 꽃피는 계절에 입학식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그깟 여행때문에 입학식을 2월 중반으 로 당기다니!! 선유가 '그깟 여행'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선화예고의 입학여행은 꽤 유명하다. 선화 예고는 시험을 봐서 들어오는 학교라 - 워낙 작가가 게을러 표현을 안 하긴 했지만 엄연 히 예.술.학.교. 이다. - 12월 중반이면 이미 신입생이 웬만큼 정해진다. 보통 학교와 달리 신입생들은 거의가 다른 학교에서 왔고, 때문에 친한 사람이 한명도 없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그래서 바보같은 대머리 아저씨 - 이사장 - 이 생각해 낸 게 바로 이 입 학여행!! 이사장 소유의 회사 명의로 되어 있는 어느 사원 연수장에 가서 1주일동안 같 이 지내며 친목을 쌓는 것이다. 첫번째 학교 행사인지라 이사장도 배려를 많이 해 주기 때문에 시설도 좋고 지낼만 하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때문에 입학식을 다른 학교 보다 10일정도 빠르게 하는 것이다. 생각해 봐라. 수학여행 명목으로 가는것도 아니다. 수학여행은 2학년때 따로 가게 되어있다. 졸업여행은... 당연히 아니다. 도대체 '입학여 행'이라는 것에 어느 교육부가 헬렐레 팔렐레 하면서 "오냐, 갔다 와라" 하고 허락해주 겠는가. 아무리 막나가는 국가라지만 우리 나라에도 '수업 일수'라는게 있다. 1주일동 안 전교생이 무단으로 결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당연히 미리 입학식을 하고, 남들이 봄방학을 즐기는 때 단체로 여행을 떠나야 한다. 단 체로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선유는 작년에도 고역을 치뤘다. 물론 그때 얘들과 친해지 긴 했지만...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깟 일 때문에 겨우 감기가 진정된 자신을 밖에 서 덜덜 떨게 만들었단 거다!! 선유는 솟구치는 화를 내리누르며 코트를 여몄다. 우희가 장갑을 빌려줘서 다행이었다. 좀 색깔이 이상야릇하긴 했지만 - 끈으로 이어져있는 벙어리 장갑에 핑.크.색. 앙고라털 로 덮여 있었다. - 따뜻하다면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 평소에도 아무거나 다 걸치는 자신 아니었던가. 그나저나, 저 녀석은 꽤나 익숙하군. '보모' 노릇에 말이다. 선유 자신은 안내 데스크 에 앉아 CDP를 연결해 음악을 들으며 쉬고 있지만 - 좋게 말하면 휴식하는 거고, 바르 게 말하면 직무유기를 범하고 있다 - 단영이는 쉴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신입생들을 안내해주고, 안내 책자를 나눠주고, 학부모를 안내하고, 사진을 찍어주 고... 저것이 이른바 '학급 위원의 피'인가, 하고 선유는 남몰래 웃음지었다. 언젠가도 말했지 만 단영이는 1학년 미술부 부장이다. 그나저나, 너무 춥다. 나중에 민재녀석한테 연락해서 데리러 오라고 할까? ...내가 미쳤 지, 한겨울에 빨갱이 탈 생각을 하다니. 민재 녀석은 스피드광이다. 게다가 한겨울에 오 토바이 타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귓가를 스치는 바람은 가히 살인적인 것이다. 그래서 난 겨울에는 절대 오토바이 안 탄다. "그렇게 추우면 들어가지 그래? 아니면 내 코트 줄까?" "아냐, 됐어. 너한테 미안하다. 사악만땅 마녀 - 하우희 - 잘못이지, 니 잘못은 아닌 데. 나도 도울께." "하하...(^^;;;) 그래라.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게 더 따뜻할거야." 단영이는 내 만류에 다시 코트 단추를 채우며 나에게 <신입생 안내 책자>를 주었다. 흐 음... 이걸 신입생들에게 주면 되는거지? 한 10분동안 지나가는 신입생에게 나눠주었으나 별로 운동이 안 되어서인지 춥기는 마찬 가지였다. 짜증이 마구마구 난다고 써 있는 내 얼굴을 보며 단영이는 난처한 듯 웃었 다. 미안하다, 서단영. 네가 친구를 잘못 만난거라고 생각하거라. "곧 이어 1997학년도 신입생 여러분의 입학식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본교에 계신 학 부모님과 신입생 여러분들은 속히 강당에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 겠습니다. 곧 이어..." 신의 농간인지 도움인지, 입학식 시작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그 방송을 듣자마 자 난 짐을 챙겨들고 - 그래봐야 CDP 하나밖에 없다 - 재빨리 강당에 뛰어들어가려고 했 으나, 단영이가 내 코트자락을 잡았다. "왜?" "미안한데... 선유야, 우린 10분정도 더 있다가 들어가야해. 약간 늦는 학생이 있을지 도 모르거든." 크아아아악~~ 어쩌겠는가, 성스런 학생위원의 피가 그를 인도하는데. 별수없이 다시 안내 데스크에 앉 아 시계를 보며 정확히 10분을 쟀다. 지금부터 오는 신입생 녀석들... 쿡쿡... 나한테 찍혔어... 1년 내내 괴롭혀 줄줄 알아라... 2분 17초가 되던 때 손을 꼬옥 잡은 2명의 여학생이 입장했으며, 3분 54초가 되던 때 한 명의 남학생이 헐레벌떡 교복 자켓 단추를 여미며 뛰어들어갔다. 자신들도 지각인걸 알 았는지 묻지도 않고 강당을 향해 날라갔기에 별다른 불편은 없었다. 그 후로 지각생이 없었기에 10분이 되자 나는 단영이를 채근했고, 단영이도 주섬주섬 정리를 하기 시작했 다. "...단영아." "응?" "...저거, 사람이지?" "...응." "...저 사람, 오토바이 탔지?" "...응." "...오토바이 타고 강당까지 직행할 것 같지?" "...응." 세상에 삼인조 같은 녀석들이 또 있군. 난 모터타고 등교하는 미친 인간들이 그놈들밖 에 없는 줄 알았는데. 오토바이 한대가 교문을 거쳐 강당쪽으로 맹렬히 달려가고 있었 다. 폼도 멋있었고, 상당히 잘 타는 것 같긴 한데... 초록색이라니. 게다가 밝은 연두 계통의... "푸하하하하핫...."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입학식에 늦어서 오토바이 타고 개폼 폴폴 날리며 들어오기엔 색깔이 너무 안 맞는다. 그런데 그 모터에 탄 녀석이 내 웃음소리를 들었는 지 잘 가던 길 놔두고 우회해서 나에게로 돌진하는 거다. 게다가 가까이 올수록 멈추기 는 커녕 속력을 더 올렸다. 피할까- 생각하던 나는 귀찮기도 하고 또 어차피 놈도 머리 가 있으면 치진 않겠지, 란 생각에 가만히 그 모터를 바라볼 뿐이었다. 단영이는 나를 보며 피하라고 했으나 내가 피하지 않자 내 앞에 와서 나를 가렸다. 단영아.. 눈물나는 친구애(愛)긴 한데... 너 오버야... 내가 가만히 있자 녀석을 할 수 없이 급정지를 했다. 정지한 후 보니 녀석과 단영이의 거리가 약 50미터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호오- 이녀석 또한 오토바이에 일가견이 있는 녀석인가? 상당히 잘 생긴 녀석이다. 몸도 좋은데? 아, 나를 변태로 치부하지 말아라. 미술학도로 써 꼭 해봐야 하는게 누드화다. 사람의 몸을 보면 먼저 그림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판 단하는 버릇이 잡힌 것이다. 투철한 직업정신 정도로만 치하해주었으면 좋겠다. 염색을 했는지 머리 색깔이 노랗다. 귀는... 어이구, 많이두 뚫었군. 양쪽 귀를 합해 10 개정도는 되는 것 같다. 교복은 입긴 했지만 힙합으로 거의 변형시켰고... 예술학교라서 그나마 괜찮은거지, 보통 학교였으면 첫날부터 반성문 쓰게 생겼다. 그나 저나, 눈매는 사나워 보이는데? "누가 웃었어?" "..." "난데." 단영이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자 내가 단영이의 뒤에서 말했다. 참고로 녀석은 지금 내 모습이 안 보인다. 단영이 녀석이 장막으로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단영이는 그 녀석 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내내 주시하고 있었다. 단영이가 이래뵈도 카리스마 짱인데... 그런 단영이의 눈을 맞받아치며 질문하는 녀석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뭐야, 너. 비웃더니 내가 돌아오니까 겁나냐? 뒤에 가서 숨게? 쿡..." 음... 내가 뒤에가서 숨은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나? 녀석의 말투를 수 긍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골똘히 생각하는 나를 대신해 단영이가 입을 열었다. "그보다 먼저 오토바이 처리해라. 교내에서 금지야. 게다가 입학식 늦었다." "호오, 그렇군. 선배신가? 선배면 선배답게 가만히 앉아있어. 나 괜히 건들이면 죽을 줄 알아." 빠직- 안그래도 추워 죽겠는데.. 뭐라고? 이봐, 신입생. 내가 누구 때문에 추위에 시달 려야 했는데. 자네가 나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섭섭하잖아? "말은 제대로 할 것. 언어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밖에 더 되나? 첫 째, 선배 맞아. 그러니까 존경심은 갖지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 둘째, 선배 답게 가만히 있으라는건 말이 안돼. 원래 선배란 존재는 가만히 있어야 하는건가? 답 게- 란 표현은 맞지 않아. 셋째, 나 너 안 건들였어. 웃은건 미안하지만." "너!! 거기서 쫑알대지 말고 이리로 나와!!" 그렇게 말하며 녀석은 단영이를 밀치고 내 멱살을 잡았다. 찰나간에 이루어진 일이라 단 영이도 그냥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녀석이 이상했다. 멱살을 꽉 잡고 한대 칠 듯 바라보던 것이... 멱살을 스스스 놓고는... 눈을 부릅뜨 고... 다시 눈을 감았다가... 부릅뜨고... 한걸음 뒤에서 바라보더니... 믿을수 없다는 표정을 하는 것이다. 녀석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한동안 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단영이는 무슨 생각인지 - 내 가 맞는 줄 알고 보호하려고 그러나? - 녀석을 노려보면서 나를 뒤에서 꼭 껴안았다. 단 영아, 저 녀석... 별로 날 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니 그만 이것 좀 놓는 게 어때? 뭐, 따뜻해서 좋긴 하지만... "...이름이 뭐냐?"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라니까." "...이름이 뭡니까?" "네가 알 필요 없어." 단영이가 말을 끊자 녀석은 단영이를 노려보았다. 단영이도 마주 노려보고... 결과적으 로 나를 사이에 두고 둘이 맹렬히 눈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추워." "그래? 그럼 들어가자." "응." 단영이가 내 손을 이끌자 녀석은 내 손을 잡았다. 이것들이, 강강술레 할 일 있나!! 왜 양쪽에서 잡아당기고 난리야!! 쯧쯧... "왜?" "이름이 뭐냐니까요?" "금선유." "금선유..." "그래, 금선유. 보아하니 신입생인것 같은데 어서 들어가라. 식 거의 끝나가겠다." "...선배, 내 이름은 한우석이에요." 뭐라하겠는가. 자기 이름이 한우석이라는데. 대답없이 말똥말똥 쳐다보자 녀석은 나를 지긋이 노려보았다. 내가 뭐 잘못했냐? 녀석이 물어달라는 전파를 마구마구 보내길래 할 수 없이 한마디 해 줬다. "...그래서?" "꼭 기억해요. 아니, 기억해야 되요. 꼭이에요, 선배!!!" ...날쌔어라, 바람돌이. 나 참, 그렇게 외치고서 강당을 향해 달려가는 놈이란... 정말 황당한 녀석이었다. 흐음... 왠지 마음에 드는데? 오랜만에 들어보는 '선배'란 단 어도... 어감이 좋아. 내가 실실거리자 단영이는 화가 났는지 굳은 얼굴로 내 팔을 끌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저 녀석... "푸하하하하하핫...." 한우석, 그 녀석... 생긴거와 다르게 얼빵이인것 같다. 운동장 한가운데에 초록색 오토 바이 한대 덩그러니 버려두고는 튀었단 말인가. 나 참, 누가 훔쳐가면 어쩌려고. 뭐, 이미 교문은 닫힌 상태였고 외부인이 들어올 것 같지는 않았기에 신입생 안내석 옆 으로 옮겨놓고 단영이와 강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안녕하세요, karin입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혹(眩) - 아찔하다 "늦었잖아." "누구 때문인데!!" "금선유, 말은 바로해라. 솔직히 니가 일했겠냐? 보나마나 단영이가 다 했겠지." "알면서 왜 시켰냐? 바보같은 하우희." "굼벵이. 노인네." "어리군. 훗-" "으아아아아악~ 내가 미쳐, 저 놈의 금선유!!!" 우희의 폭주를 뒤로 하며 줄 지어 앉은 신입생들을 바라보았다. 지성, 성혁, 단영, 그리 고 우희와 건우 -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절대 이런 일을 할 녀석이 아니었으니까 - 가 함께 강당 한 구석에 서 있었다. 떠드는 신입생들에게 주의를 주는 녀석들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쿡쿡... 그러고 보니 작년 입학식 땐 지성이가 신입생 대표였었지? 성혁이 놈은 떠들다가 걸리고... 그런 놈 들이 주의를 주다니.. 정말 세월 빠르군. 어느새 1학년이 끝나고 2학년이 시작된다라... 좀 씁쓸한 감도 없잖아 있다. 그나저나, 이 녀석들... 삼인조만큼은 아니더라도 정말 튀는걸? 하긴, 성혁이나 건우, 단영이 놈은 누가 봐도 킹카이다. 이른바 우성 종자지. 남자인 내가 봐도 부러운 놈들이 니... 물론 생.긴.거.만 그렇다는 거다. 설마 내가 성혁이 놈의 대가리를 부러워 하겠 어? 우희도 입만 다물고 있으면 귀여운 얼굴이고... 학기 초에 저 얼굴에 속아 부반장으로 뽑았었다. 물론 반 얘들 모두가 뼈저리게 후회하는 중이다. 그런 만큼 여기저기서 힐끔힐끔 보는 눈들이 꽤 많다. 에휴... 부럽다. 나도 어서 커야 할텐데. 아니, 키야 이정도면 됐다 하더라도... 근육이라도 키워야... 하다못해 피부라 도 태워야 하지 않을까? 요즘 여자들이 부드러운 남자를 좋아한다지만, 그거 순 개뻥이 다. 아직도 여자들에겐 카리스마 만땅의 남자가 넘버원 순위이다. 저 눈들을 보면 알지 않는가. 그나저나, 하우희... 인기 많네? 꽤 많은 수의 사내녀석들이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걸 보면. 쿡쿡... 어린 놈들. 이 녀석의 본성을 파악하지 못하다니. "아, 그럼... 지금부터 신입생 대표의 입학 선서를 듣겠습니다." "응? 왜 입학 선서를 지금 해?" "아, 신입생 대표가 지각했거든." 지성이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나 참, 어느 놈인지... 신입생 대표씩이나 되어서는 지 각을... 으악!!! 저 놈!!! "단영아, 초록색 모터 끌고 온 놈이지?" "...그렇군." 단영이는 말을 하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응? 눈빛이 통했나? 한우석이라는 그 녀석도 이 쪽을 쳐다보았다. 아니.. 아예 노골적으로 바라보는군. 뚫어져라하고 이쪽만 노려보다 니. 단영이랑 그 놈은 3대에 걸쳐 원수진 인간처럼 선서가 끝날때까지 서로를 노려보았 다. 와아~ 눈싸움이다, 눈싸움!!! ...좋아할 때가 아니잖아!! 갑자기 단영이가 나를 자기 쪽으로 끌었다. 멋모르고 끌려가보니 어느덧 단영이가 나를 감싸안은 것 같은 포즈가 되었다. 이 녀석이 왜 이러는지... 뭐 잘못 먹을걸 먹었나? 우희도, 지성이도 단영이와 한우석을 번갈아 쳐다보더니만 이해가 된다는 듯 끄떡거렸 다. 그리고는 성혁이와 건우에게 소근소근거리며 뭔가 얘길 하더니만 나와 내 뒤에 선 단영이를 둘러싼 형태로 섰다. 이봐들... 따뜻하긴 하지만... 왜 이러는지... 결과적으로 내 뒤에 단영이, 내 양 사이드로 우희와 지성, 대각선상으로 건우와 성혁이 녀석이 자리를 잡았다. 넓은 자리 놔두고 왜들 이래!!! 입학 선서를 하던 한우석은 그런 모습을 보자 얼굴을 있는데로 팍팍 찡그리며 선서를 마 쳤다. 그러더니.. 박수소리와 함께 녀석이 내려오는 모습을 기다리던 학생들에게... 녀 석은... 그 빌어먹을 녀석은... "금선유 선배님, 첫눈에 반했습니다. 저와 사귀어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게 아닌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정말... 저녀석, 내가 남자라는 걸 알고는 있는건가? 저렇게 까지 무대포로 나오면 치고받고 싸우기도 전에 전의를 상실해 버리는 것이다. 선생님들 은 당황해서 어떻게든 무마시키려고 녀석을 끌어내렸고, 신입생들과 학부모들은 그 사태 를 재미있어하며 '금선유'를 찾느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처럼 <임 시 학생회 위원>인 많은 인간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배를 잡고 웃어대고 있었다. 젠장!! 이제 학교는 다 갔군!!! 그나저나.. 정말 열받는다. 저 녀석... 아까 왜 멱살을 쥐었다가 그냥 놨나 했더니 만... 내가 여자라고 생각한건가? 그래서였나? 훗... 남성으로서 같은 남성보다 뒤쳐진다는 사실이 얼마나 열받는 일인지는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더이상 생각하기가 싫었다. 녀석을 쳐다보기도 싫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 지랄맞은 일을 당해야 하는건데!!! 내 기분이 엉망이라는 걸 알아차린 주위의 녀석들은 단지 조용히 침묵을 고수하고 있을 뿐이었다. 선생님에게 쫓겨나다시피 내려온 그 녀석은 자기 자리에 가 앉더니 씨익- 하 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내게 보냈다. 주변의 녀석들은 휘파람을 불어대며 녀석을 격려했 다. 짜증난다, 짜증나... 역시 이래서 사람은 안하던 일을 하면 안 되는 거다. 성격에 안 맞 게 봉사 좀 했더니 이런 봉변을 당하지 않았나. 더이상 입학식이고 뭐고, 딱 사라졌다. 얘들에게 짤막한 인사를 건넨 후 강당을 빠져나왔다. 강당 안에서는 한창 교장의 잔소리 가 이어지고 있었다. 평소같으면 한마디 했을 우희도 상황을 파악하고는 고이 보내주었 다. 걸음을 빨리 해 나오니 녀석의 방정맞은 초록색 모터가 보였다. 그대로 돌려차기를 시도한 나는 모터를 있는 힘껏 한대 차 주었다. 퍽- 모터는 옆으로 쓰러졌지만 개의치 않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제발 더이상 아무 일도 없어 라. 더 이상은 나도 책임 못 져. 더 이상은... "금선유." 다행이다. 내 신경을 긁는 녀석이면 어쩌나 했는데. 지금 한번 터지면 제어가 안 될거라 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뭐, 하진이 녀석이라면... 기사가 딸린 차를 놔두고 껌둥이(검은색 야마하)를 끌고 왔다. 겨울에 오토바이 타는 건 질색이지만... 지금은 달리고 싶다. 달리면서 이 짜증을 떨쳐버리고 싶다. "하진아..." 녀석의 어깨에 잠시 머리를 기대고 서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식혔다. 하진이 는 말없이 어깨를 내주었다. 쿡쿡... 이 녀석이 내 친구라서 정말 다행이다... "...무슨 일이냐." "그냥. 좀 짜증나는 일." 내가 말하기 싫어한다는 걸 깨닫은 하진은 그대로 몸을 돌려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 다. 그리고는 나에게 말없이 헬멧을 내밀었다. "무거워서 싫어." "써 둬. 혹시 모르는 거니까." 알듯 모를듯 배려해 주는 녀석이 정말 좋았다. 덕분에 아까의 그 재수없는 녀석을 잊을 수 있었다. 역시 오토바이는 지랄맞은 연두색보다야 검은색이 제격이지. 흠흠... "왜 왔어?" "데리러 왔다. 민재가 학교에 갔다고 그러더군." "어디 가게?" "아아, 오랜만에 나갈까 하고. 너 감기 때문에 제대로 놀지도 못했으니까." 그래...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하진이 덕분에 솟구쳐올랐던 감정이 어느정도 정 리가 되었다. 헬멧을 머리에 쓰고 하진이의 뒤에 타려고 하는데 저쪽에서 누군가가 달려 왔다. 단영이었다. "금선유!! 선유야!!" "어, 단영아..." "그렇게 나가면 어떻게 하냐. 걱정했잖아." 하진이가 단영이를 뚫어져라 보는게 느껴졌다. 하진아, 그거 실례야... 하긴, 단영이도 하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니까... 피장파장인가? 이 놈들, 혹시 닮은꼴? "이 쪽은 서단영. 그리고 이 쪽은 남궁하진." "아, 안녕." "..." "남궁하진!! 기껏 소개시켜 줬는데 씹으면 어떻게 해!! 미안하다. 이 녀석 원래 이런 놈 이야." "...남궁하진이다." "내가 너한테 뭘 더 바라겠냐. 기껏 하는 말이 '남궁하진이다'라니. 으휴, 너 그 성격 고치랬지?" "...안 갈거냐." "아, 그래. 단영아, 나 간다." "으응... 잘 가라..." 모터가 부앙- 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내 마음을 아는건지, 아니면 이 녀석도 심 란한건지.. 평소보다 운전이 좀 거칠었다. 하지만 덕분에 쓸데없는 생각은 싸악 날라가 버렸다. 오늘은 노는데 집중해야겠다. 하진이 말대로 모처럼 나온거니까. 그 녀석 때문에 내가 짜증을 낼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냥 미친놈 미친소리 하는거라고 생각하지, 뭐. 하진이의 등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썼더니 졸린 것 같다. 도착하면 깨우라고 하진이에게... 말... 해야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헷- ^^ 갑자기 12월 후반에서 2월 중반으로.. 건.너.뛰.었.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길... 개월수마다 채워넣으면 너무 많아질 것 같아서요. 변명이기도 하지만... 점점 비축분이 사라집니다... 슬포요... ㅡ.ㅜ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karin (primblade00@yahoo.co.kr) 혹(眩) - 아찔하다 시간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모양이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입자 고 운 모래처럼 그렇게 스르륵 흘러가고, 그것을 깨닫을 땐 이미 비어있는 손.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느냐면, 어느새 4월이란 말이다. 입학식이 있고, 개학식이 있 고, 새 반에 새 친구들에게 익숙해지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1달이 지나갔다. 오늘은 3 월 31일. 내일부터 4월달이 시작된다. 추운 날씨도 어느정도 진정되었는데, 나에겐 정말 다행이었다. 물론 내 주변에 있는 사 람에게도 다행이었을 거다. 내가 추위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전부 주변사람들에게 풀어버 렸기에 피곤했을 테니까. 겨울만 되면 안그래도 모난 사람이 더 날카로워 진다고, 누군 가에게 들은 기억이 난다. 뭐, 아무래도 좋아. 이제 완연한 봄이다. 곧 봄비가 내리고, 꽃이 피고, 날씨가 따뜻해 지겠지. 그에 따라 내 성격도 조금은 둥글어질테고. "뭐 하냐?" 아아, 또 이녀석이군. 오랜만에 조용히 보내나 했더니만... "야!" 왠만하면 지성이랑 놀지 그래? 너 아니라도 날 피곤하게 만드는 인간은 많단 말이다. "야-아!!!" ...시끄러워서 더이상 못참겠다. 선유는 책상에 엎드려 있는 상태에서 고개만 살짝 들었다. 선유의 앞에 겨울방학동안 더 자라 180을 넘는 거구의 떡대가 버티고 서 있었다. 위압감이 느껴진다면 느껴지는 모 습이었지만, 선유는 개의치 않고 핀잔을 날렸다. "...지겹지도 않냐, 안성혁."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표정을 짓는 저 녀석을 봐라. 얼굴과 표정과의 미스매치 - 보는 이의 가슴에 돌덩이가 우수수 떨어진다. "니 멋대로 옮겼음 잘 적응할 것이지, 무슨 중학교 계집얘도 아닌 것이 쉬는시간마다 찾 아오는거야." "우씨- 불만이냐?!!" "그래, 불만이다. 와서 조용히 있으면 또 몰라. 잘 자는 사람 깨워가지고는..." "빌어먹을!! 내가 다시 니 놈을 아는 체하면 성을 간다, 성을 갈아!!!" "어떤 성? 성별의 성(性)을 바꿀거야, 아니면 이름의 성(姓)을 바꿀거야?" "크아아아아악~~~"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야수의 외침을 흘려들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기왕 잠 깬거, 그 만 눕고 일어나야지. 책상에서 몸을 웅크리고 잤더니 허리가 아프다. 남자의 생명은 허리인데, 쩝. 새 학년이 되면서 성혁이와 다른 반이 되었다. 아니, 다른 반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과가 되었다. 이 녀석이 디자인쪽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뭐, 디자인과 미술은 거의 비슷 하다고 할 수 있는 만큼 편입이 쉽게 이루어지니까. 문제는 이 녀석이 옮기기 직전까지 우리에게 함구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덕분에 요즘 무 던히도 많은 구박을 받고 있다. 녀석도 지 잘못을 알긴 아는지 그 수많은 구박을 묵묵 히 받아내고 있지만. 아, 잘못을 아는게 아니라 아예 구박받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음.. 아무래도 후자의 가능성이 더 크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겠는걸. 지성, 단영과는 같은 반이 되었다. 미술부라고는 3반밖에 안 되니 섞여봤자 거의 아는 놈들이고. 우희는 옆 반, 해민이와도 같은 반이다. 그럭저럭 붙은만한 인간들과 다 붙었 으니 편하다. 양건우는 성혁과 같은 반이다. 그 녀석이 그 몸으로 디자인을.. 쿡쿡... 건우는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 패거리에 들어와 있었다. 뭐, 성혁이나 지성이, 단영이와도 많이 친해지고. 성혁이같은 경우는 건우가 영입한 선화파의 부짱으로 들어앉아 버렸다. 곰같 은 놈이니 무조건 힘으로 밀어붙이겠지만 그래도 꽤 날리나보다. 하긴, 건우 녀석과 성 혁이 녀석... 처음 만났을 때 이름을 듣고 서로를 알아봤으니까. 나에게도 제의가 오긴 했지만 거절했다. 내가 뭣하러 그 귀찮은 일들을... 건우도 내 성 격을 아는지라 그 이상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냐?" "쳇, 아무 일 없으면 오면 안 되냐?" "오는 건 상관없지만 아무일도 없이 날 깨웠다면 대가는 톡톡히 치를거다." "아, 스톱!! 아무일도 없긴. 무슨 일이 있으니까 너를 깨웠지." 우두둑 주먹을 쥐며 일어나는 나를 성혁이가 황급히 제지하더니 재빨리 말을 이었다. "오늘 싸움이 있어." "근데?" "우리 좀 도와주라." "싫어." 내 간단명료한 대답에 성혁이는 입을 쩍 벌렸지만, 개의치 않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 다. 음, 정말 날씨 많이 좋아졌군. "어, 야!!! 그렇게 매정하게 거절하는게 어디있냐?" "그럼 매정하지 않게 거절해주지. 싫~어." "그러지 말고, 이번 한번만 도와줘라. 이번엔 정말 센 놈들이란 말야." "너, 저번 그 사건 이후로 계속 나한테 빌붙는거 아냐?" "그거야... 그렇게 좋은 실력을 썩히긴 아깝잖냐. 그러니까 한번만..." 저번 그 사건이란, 빌어먹을 1학년 쉑을 때려눕힌 사건이다. 이름이 한우석이었지? 입학 식날 그렇게 전교생 앞에서 프로포즈(?)를 한 녀석은 1주일간의 입학여행 후 첫 등교서 부터 날 찾아 난리를 쳤다. <임시 학생회 위원>들의 싼 입 덕분에 이미 소문이 퍼질대 로 퍼진 상태에서 그 녀석까지 난리를 치니 버텨 낼 제간이 없었다. 게다가 무대뽀인 그 녀석을 은근히 지지하는 인간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절대 안 된다는 인간들, 난 금선 유가 아니므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인간들이 짬뽕이 되어 나를 설득한다, 저지한다 난 리를 피워대니 안그래도 추운 겨울날 내 인내심이 남아날리 없었다. 또 한우석 그 녀석이 질기긴 얼마나 질긴지... 그렇게 알아듣게 말했는데도 한 귀로 흘 려버리고는 다음날 또 찾아와선 "선배님~♡" 하는데... 그 덩치로 얘교부리는 건 정말 다른 인간들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법으로 금지시켜 야 한다. 처음엔 귀엽게 봐줬지만(언제?) 결국 안되겠다 싶어 녀석과 담판을 짓기로 결 심했다. 그 녀석에게 만약 나와 싸워서 이긴다면 사귀어 주겠다고, 대신 내가 이기면 더 이상의 빌어먹을 짓거리는 그만하라고. 그랬더니 녀석이 하는 말은 가관이었다. "선배의 진심이 없다면 사귈 수 없어요!!" 웃기고 있네. "그럼 관둬. 난 평생 가야 너한테 진심이 안 생길 테니까." "그럼 선배, 왜 저랑 사귀겠다고 하신 거예요?" "니 마음대로 말 바꾸지 말아라. 난 니가 이기면 너랑 사귀겠다고 했을 뿐이야. 왜 그랬 냐고? 너무 귀찮으니까 어떻게든 결론을 보고 싶어서. 지금 너 하는 꼬락서니를 계속 보 다간 내가 먼저 돌 것 같으니까." "...정말 너무하네요, 선배." 너무하다고? 냉정하다고? 웃기지 마라. 친절한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한우석이 남선 유를 좋아하던 말던 그건 한우석의 생각이니까 한우석의 몫이지만 그 생각을 나에게까 지 강요할 권리는 없는거다. 좋아하는 마음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 그건 양방향으로 이 뤄졌을때 말이고, 이런 일방적인 애정은 강요받기도, 강요하기도 싫다. "남말하지마. 어쨌든, 난 너에게 선택의 기회를 줬어. 기회의 폭이 너무 좁다고 투덜대 지 마. 나로선 이것도 상당히 양보해 준 거니까. 둘다 싫다면 지금까지의 행태를 계속해 도 좋아. 대신 내 행동은 지금까지와 다를테니까 그 정도는 염두에 두고 있으라구." "...알았어요, 선배." "뭘?" "어쨌든 선배를 이기면 된다는거죠? 하지만... 솔직히 선배가 훨씬 불리한거잖아요?" "남 걱정하기 전에 네 걱정이나 해." 확실히 겉으로 보기엔 녀석이 훨씬 우월했다. 이 학교에서 내 싸움실력을 알고 있는것 은 건우뿐으로, 지성이나 성혁, 단영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니, 단지 말할 기회가 없었다고 해도 괜찮겠다. 옛날에 최대일 일파가 건드렸을 땐 일부러 숨겼으니까 아예 기 회가 없던 건 아니지만... 그거야 조용히 학교생활을 즐기고 싶은 생각에서 우러난 화이 트 라이(선의의 거짓말)였으니까. 한우석 그 녀석은 첫 날 오토바이를 끌고 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상당한 싸움꾼이었 다. 새로 들어온 1학년들 중에서 제법 쓸만했는지 건우가 넌지시 귀뜸을 해 주었다. 비 싼 오토바이 끌고다니는 걸 보면 그럭저럭 사는 집안 아들일거고... 이 학교에 들어온 이유는 대학진학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상당히 정직한 녀석이었다. 단순히 쉬운 진학을 위해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악기 다루는 실력이 상당해 -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도 바이올린을 켠단다 - 입학식날 신입생 대표를 한 녀석이기도 하고. 아무튼,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그 동안 얌전히 지낸 나지만 그것 때문에 더 귀찮은 일을 맡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지성이와, 차라리 자신을 대역 으로 부르지 그랬냐는 성혁이를 뒤로 하고 학교 뒷담으로 갔다.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 지 꽤 많은 인간들이 담을 치고 있었다. "이거 네가 부른거냐?" 우석에게 묻자 씨익 웃으며 "그래야 선배가 나중에 딴 말 못하죠." 라고 대답하였다. 쿡쿡... 그래... 나중에 딴 말 못하게. 어떻게 꼬셔왔는지 건우가 서 있었다. 그 녀석이야 내 실력을 아니까 빙긋 웃는 것으로 대신했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은 나보다 덩치가 크고 소문난 싸움꾼인 우석이가 이길 것 을 점치고 있었다. 학생회 운영때문에 바쁘게 돌아다니던 단영이는 헐레벌떡 달려와서 는 당장 그만두라고 소리쳤다. 내 만류에 결국은 건우옆에서 눈을 부라리며 조용히 관전 하는걸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선배, 갑니다. 아무리 선배지만 지금은 못 봐줘요." 니 걱정이나 해, 임마. 옆구리가 비잖아. 퍽- 먼저 펀치를 먹인것은 나였다. 녀석과 인간들의 놀라는 모습이라니. 오랜만에 몸을 쓰려 니 좀 뻐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운동 좀 할걸. 빠각- 뻑- 몇대를 쳤더니 녀석도 호승심을 버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탐색했다. 좋은 눈이다. 하지만 하진이와 율이에게서 개인지도까지 받은 나를 이길 실력은 아냐. 호흡을 가다듬고는 주먹을 날리는 녀석의 바로 앞에서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밑으로 파 고들었다. 그리고 당황하는 녀석이 손을 쓰기 전에 재빨리 턱을 가격하였다. 그때부터 내 싸움실력은 전교에 퍼져나갔고, 선화파의 부짱인 이 놈은 일이 터질 때마 다 나를 부르는 것이다. 성혁이 녀석도 상당하긴 하지만 나머지 똘마니들은 별로 실력 이 없기 때문에 단체 싸움에서는 불리할 때가 많다. "건우는 오늘도 결석이냐?" "그래, 덧붙여서 지성이도 결석이다." "알아, 아침에 담임이 말했으니까. 독감이란다." "그래? 쿡쿡..." 성혁이넘이 불손하게 킥킥댔다. 뭔가를 공모하는 듯한 웃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 지만, 아무튼 기분나쁘다. "왜 그렇게 웃어? 지랄맞게." "너, 정말... 말 좀 어떻게 할 수 없냐?" "이것도 충분히 가려서 한거야. 내 도움이 필요없나보지?" "으악~ 내가 미쳐죽지...!!" "필요 없어?" "아니, 필요해." 건우가 안 나왔다면... 내가 가 줘야할까? 선화파는 건우와 성혁, 1학년 몇명이 끌고 나 가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미우나 고우나 이 놈은 친구다. 그리고 선화파는 아무래도 건우가 맡고 있고. 학교 내에서야 상관없지만 다른 학교에 지는 건 마음에 안 들기도 하 고. "알았어. 언제야?" "오늘." "뭐? 그런데 왜 지금 말해?" "건우가 갑자기 연락을 끊었잖아!!" "우석이는?" "그 녀석도 나갈거야." 우석이 녀석은 나에게 지자 충격먹었는지 곧바로 선화파에 들었다. 원래 재능이 있는 놈 이라 차기 짱으로 키우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사내답게 나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해서 꽤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말만 포기한거지, 그 녀석이 하는 짓은 예전과 다를바가 없다. 휴... 어쨌든 포기했다니 뭐라 하기도 그렇고... "알았어. 방과후에 보자." "그래, 부탁한다." "물질적인 대가를 줘보시지?" "헹, 친구좋다는게 뭔데?" "웃기고 있네." "그래, 고맙다." 능글맞은 놈... 종 치는 소리에 녀석은 자기 반으로 뛰어갔다. 그나저나, 오늘 싸우게 될 놈들은 얼마나 강할까? 기왕 이렇게 된거, 성혁이 녀석에 대한 분노를 몽땅 쏟아주 지. 우후훗- 삼인조에겐 좀 미안한 마음이 든다. 녀석들에겐 절대 싸우지 말라고 했는데 정작 말한 나는 이렇게 싸움질이나 하고 돌아다니고. 싸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맛있는거라도 사 갈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안녕하세요, karin입니다. 오랜만이죠? ...죄송합니다. 흑흑... ㅡ.ㅜ 여러분이 죽이신다면... 고요히 죽어드리리... @/////@ 그래도.. 설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헷... ^^* 혹(眩) - 아찔하다 "선~~~~~배!!!" "...당장 이 손 치우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하늘보고 누울 줄 알아라." "에이, 선배. 이 얼굴로 그런 살벌한 말을 하면 매치가 안 되잖아요." 니 녀석 몸뚱이랑 행동이 더 미스매치잖아!!! 다른 의미에서지만, 정말 이 놈은 만만히 볼 놈이 아니었다. 처음의 그 똥 폼은 단순한 그냥 똥 폼이었는지, 아니면 내 앞에서만 이 지랄을 떠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녀석 은 나에게 진 이후로 이렇게 아양을 떨어대는 것이다. 계집얘는 그나마 귀여우니 보는 맛이라도 있지, 다 큰 사내녀석이 얘교 부리는 꼴이라니... 쯧쯧. 게다가 말로는 포기했다 하면서 행동은 전보다 더 집요해졌다. 뭐라고 할라 치면, "선배, 저 선배 포기했다니까요. 단순히 후배로서 선배가 너무 좋아서 이러는 건데, 너 무하세요." 하고 시치미를 떼며 우락부락한 얼굴 가득 수심을 채우는 것이다. 으드드득- 저 녀석, 그래도 입만 다물고 있으면 킹카중의 킹카 아닌가. 아닌게 아니라 1학년 여자 얘들을 위시해 2학년 여자얘들까지 은근히 저 녀석을 노리고 있다. 그런데 그 모습으 로, 그 얼굴로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이라니!!! 그렁그렁!!! 정말 꿈에볼까 무서운 모 습인 것이다!!!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나도 녀석에겐 꽤나 관대한 모양이다. 가끔 지성이가 "늦동이 동생 돌봐주는 것 같다." 라고 웃음을 참으며 말하는 걸 보면. 하지만... 어찌 되었든 저 녀석은 나에 대해 진심 이었던 것 같다. 그게 과거형일지 현재진행형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아무리 냉정하 다고는 해도 한 사람의 진심을 외면해야 하는 상황에서까지 모질게 대할 수는 없는 것이 다. 그래서 내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몇가지 사항을 제외하고는 녀석에게 맞춰주려 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저 징글맞은 녀석의 모습이었다. ...후회된다, 쩝. "어디서 모이는거야?" "뒷담에서요." "너네, 아예 거기다 터 잡았냐? 왜 허구헌날 뒷담이야?" "편하잖아요. 가기도 쉽고." "너네가 장악하니까 얘들이 무서워서 다가가질 못하잖아." "하핫... 저희 별로 안 모이는거 아시면서. 짱이 기강 무너졌다고 다시 잡는다고 해도 배째라- 하고 있는데요, 뭘." "건우 우습게 보지 마라. 그녀석 화나면 너네 끝나." "알아요. 그래서 가끔가다만 개기는걸요. ^^" "그래, 자랑이다." 우석과 함께 뒷담에 가니 성혁이를 비롯한 선화파 녀석들과 단영이가 있었다. 싸울 준비 를 마친 - 경찰에 대비해 사복으로 갈아입는다 - 몇몇 녀석의 인사에 고개만 까딱이고 는 성혁이에게 다가가는 우석을 보며 이 녀석도 표정 변화가 심하구나, 라는 생각을 했 다. 어느새 예의 그 똥.폼. 으로 돌아가 있던 것이다. 그나저나, 단영이는 왜 여기 있는 거야? "단영아? 너 왜 여기 있어?" 사실 물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단영이는 나를 끌어다가 자기 옆에다 고이 모셔두 었다. 우석이는 똥폼에 얼굴을 찌푸리고선 곧바로 내 옆에 와서 섰다. 이게 뭐 하는 짓 거리냐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서단영 vs 한우석' 놀이(?)라는 거다. 학기 초부터 서로 만 보면 으르렁대더니만, 그게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어쩌다 보니 내가 가운데 끼어서, 단영이는 우석이만 보면 나를 자신의 1m 거리 이내에 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고 우석이는 또 우석이대로 단영이만 보면 나에게 엉겨붙어서 피 터지는 눈싸움을 해댔다. 뭐, 서로가 상극이라니까 어쩔 수는 없지만... 이것들아, 나 를 가운데 두고 놀지 말란 말이다!!! ...할 수 없이 한쪽에는 단영이를, 다른 한 쪽에는 우석이를 꿰어 찬 나를 보며 지옥 불 구덩에 떨어져도 시원찮은 성혁이 녀석은 킬킬대었다. "오늘은 누구랑 붙는거야?" 짜증이 나 퉁명스런 목소리로 성혁이에게 물었다. "음.. 몰라." "뭐!! 장난하냐!!" "아니, 장난이 아니라.. 원래 거의 알려진 게 없어. 알려진 사실은 현재 우리와 건현상 고와 함께 서울지역을 3분하고 있다는 것, 나타난지 2달정도밖에 안 되었다는 것, 짱이 세 놈이라는 것 뿐이야." "나 참, 고등학생 주제에 무슨 비밀이라고..." "이유는 모르지만 모든 사항을 숨기고 있어. 소수정예제인것 같고... 소문을 듣자하니 짱들의 싸움솜씨가 장난이 아니라는군." "그런데 날 부르면 어떻게 해? 건우자식이나 불러." "연락이 안 된다니까!!" "내가 지면 어쩔거야?" "너 버리고 오지, 뭐. 넌 얼굴도 반반하겠다..." 그러나 평상시와 비슷한 성혁이의 헛소리에 대해 평상시와 비슷한 내 반응 - 지랄한다, 라던지... - 이 나오기도 전에, 두 목소리가 성혁이를 짓눌렀다. "안성혁, 무슨 소리야!!!" "이짱!!!" 나 참, 이럴 때만 짝짝꿍이 잘 맞는군. 살벌한 단영과 우석의 기세에 성혁은 쫄아들었 다. 그런 성혁을 난 마음껏 비웃어 주었다. "괜히 헛소리나 지껄이니까 대가를 받은거다. 킥킥..." "우씨.. 그만 웃어, 금선유!!" "일대일? 아니면 단체?" "일대일로 삼판 이승제.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얘들도 끌고 가야지." "흐음..." 성혁이 녀석의 감탄이 섞인 주절거림을 줄여보자면, 2달전에 갑자기 나타나 서울 강남쪽 을 중심으로 장악하기 시작했다는 것, 삼두정치(三頭政治)를 행한다는 것, 소수정예제이 며 특히 짱 놈들은 굉장히 세다는 것, 이쪽과는 땅따먹기 싸움때문에 처음 만났다는 것 이다. 그냥 싸우기만 하는 건 정말 힘밖에 없는 놈들이 하는건데.. 짱이 세 명이라면... 세 놈 을 이간질 시켜도 되지 않을까? 음... 어렵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빨리 분산될텐 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씨익 웃는 선유의 미소에 그 의미도 모르면서 다시한번 반해버린 단영이와 우석이었다.(그들에게는 선유에게서 폴폴 풍겨나오는 암흑의 오라가 보이지 않 는걸까? -_-;;;) 선유는 교복 배지가 달려있는 마이를 벗고 대신 성혁이에게서 뺏은 남방을 걸쳤다. 성혁 이 녀석도 떡대가 있어서인지 남방이 헐렁했지만 원래 크게 입는 선유에게는 문제가 되 지 않았다. 성혁이 녀석이 오늘 얘기했기에 옷도 준비하지 못한 것이다. 오늘 늦는다는 연락을 하기 위해 민재의 폰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왠일인지 받지 않았 다. 통화음도 들리지 않고, 아마도 밧데리 자체를 빼 놓은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는걸 까? 사실 녀석들이 한가하다면 도움을 요청할까, 생각도 했었는데. 그 녀석들, 싸움에서만 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니까. 음... 건우라면 상대가 되겠지만, 나머지 녀석들은 비교 가 안 돼. 선유는 공사장 터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오후 6시 55분. 나지막히 어둠이 깔리 기 시작하는 무렵이었다. 번화가에서 좀 떨어진 이 공사장은 조용하고 넓어서 이렇게 세 력 다툼을 하기에 더나할위없이 적절한 장소였다. "몇 시 약속이야?" "7시. 어, 민우야. 얘들 절반정도는 따로 배치시켜. 함정일 가능성도 있으니까." 성혁의 얼굴은 소년다운 호승심에서 나오는 긴장감과 기묘한 흥분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능성들을 하나씩 점검하는 그를 보니 부짱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었다. 우석이도, 단영이도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둘 다 이런 싸움판은 처음인 모양이었다. 단 영이야 고수긴 하지만 언제나 심판 아래 일대일로 붙었을 테고, 우석이는 고등학교 올라 와 처음이라 중학교와 스케일의 차이에 놀라는 것 같았다.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앉아, 다들 앉으라구." "...선배 정말 뭐였어요?" "뭐가?" "얼굴을 보면 초모범생인데, 이런데서 익숙하다는 듯 행동하고..." "아, 원래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있어." "그래도..." "빌어먹을 인간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다닌거야. 사실 난 별로 싸우지도 않았어." 그렇다. 내가 좀 싸울려고만 하면 삼인조들이 상황을 종료시켜 버리는데, 어떻게 싸운 단 말인가. 덕분에 난 3년 내내 오토바이 뒤에서 사탕만 물고 싸우는 녀석들을 바라보아 야 했다. 왜 처음부터 안 나갔냐고? 안 나갔긴. 세 녀석이 나를 앞과 양 옆으로 감싸버려서 주먹 한 번 못 휘둘러 봤단 말이 다. 아무튼, 오랜만에 보는 싸움판이다. 나도 흥분감을 제어하며 냉정해지려고 노력했 다. 하진이 녀석에게 들은 거지만, 싸움에서 이기는 제 1원칙은 냉정의 유지라나? 맞는 말 같긴 하다만... 그게 어렵다는게 문제지. ...뭔가가 께림찍하다.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다. ...불안해, 불안해, 불안해. 내 안의 모든 세포들이 곧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위험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안녕하세요, karin입니다. 이게 말이죠... 원래 이 편이... 1편이나 2편정도 예상이었는데... 갑자기라고 해야할지, 늘어나 버렸습니다. 으흑 ㅡ.ㅜ 난 도대체 언제서야 콘티 짜 놓은대로 올릴려나... 변덕이 정말 극과 극을 오가는 karin입니다. 그런 고로 여러분, 지겹더라도 조금 더 봐주시기 바랍니다. 하핫... ^^;;; 자, 선유가 예상하는 위험이란 뭘.까.요? 알아맞추시는 분께는 karin의 키스가~~~ ...모두들 피하시는군요. 네, 알겠습니다. 혼자서도 잘해요는 그만 찍고, 아무튼 여러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비축분이 이제 하루어치 남았네요... ㅡ.ㅜ 슬포라. karin (primblade00@yahoo.co.kr) 혹(眩) - 아찔하다 7시가 되자 공사장 건물 바깥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난무했다. "쳇, 돈 많은 놈들인가 보네. 떼거지로 오토바이를 끌고 온 것 보면." "혹시 모르죠. 짱개인지도..." "쿡쿡... 그래. 이제 곧 시작하겠다." "네..." 모두들 전의를 가다듬으며 놈들이 들어올 공사장 입구를 바라보았다. 선유도 주먹을 쥐 었다 폈다 하며 긴장으로 수축된 근육을 이완시켰다.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몇 명의 사내녀석들이 떼를 지으며 나타났다. 강남쪽에서부터 세력을 확장시켰다더니 짱개는 아니였나보다. 모두 부티나는 옷을 입고 있었다. 짱인 듯한 세 녀석은 뒤에서 느긋하게 걸어 내려왔다. 왠지 일부러 모습을 숨긴다- 는 느낌... 아아, 그렇지. 그러고 보니 알려진 게 거의 없었다. 어두운 공사장 계단에 비춰진 그림자에서 익숙함을 느꼈지만 그건 단지 착시현상일 뿐 이다. 사람 그림자가 그게 그거지 뭐 다른 게 있다고 익숙하고 자시고 하겠는가. 집중- 그래, 집중해야 한다. 지금은 눈 앞의 적을 맞아 싸울 때이다. "아아, 미리 와 있었군." "미안해 할거 없어. 우리가 일찍 온 거니까." "원칙대로 일대일 승부인가?" "그래." 저 목소리... 분명히... 짱인 듯 보이는 세 명을 은연중 가리고 있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가 상당히 익숙했기 때문에 선유는 내심 놀랐다. 중학교때 몇 번 들어본 소리다. 삼인조와 가끔씩 어울리던 패거리의 우두머리 격이었다.- 이름이 지환이였던가? 아는 사람이라서 싸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망설여졌지만 어쩔 수 없다. 저 쪽 또 한 자신을 알아보더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보아하니 저쪽도 짱이 아니라 간부인 것 같은데, 아는 사람이 있다고 짱을 무시하고 싸움을 멈출 수는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한 싸움 했던 것 같은데... 그런 녀석을 간부로 두다니, 짱인 세 녀석의 실력 도 만만치 않다는 뜻이다. 예전에 얼핏 본 지환의 싸움 실력을 가늠해 보면서 대적이 될 만한 사람을 꼽아 보았다. 성혁, 자신, 우석... 채 5명이 안 된다. 이번 싸움, 꽤나 불리하겠는걸? "3판 2승제." "한쪽이 쓰러지면 싸움이 끝난다." "선방을 내보내지." 저 쪽에서는 지환이 나왔다. 이 쪽에서는... 으음... "내가 나간다." 성혁이가 나서고 있었다. 아니, 성혁이랑 붙으면 성혁이가 불리하다. 저 녀석과 성혁은 싸우는 방법이 비슷하니까. 저런 녀석에게는... "아냐, 내가 아는 놈이야. 너 빠지고, 우석이 내보내." "뭐?" 되묻는 성혁에게 다시한번 말해줬다. "우석이 내보내라고." "하지만 저 녀석, 큰 싸움은 이번이 처음인데..." "내보내라면 내보내. 너보다 잘 싸울거야." "...근거 있는 소리지?" "아무렴." "알았어. 한우석, 준비해라." "알았어요, 선배." 우석이가 손에 가죽 장갑을 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손가락을 까닥해서 녀석을 가까 이 불렀다. "니가 상대할 녀석은 스피드와 기술 중심이야. 넌 완력이 있으니까 완력으로 밀고나가. 그리고 저 녀석 머리가 약하니까 머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아, 그래. 발차기를 많 이 이용해. 아무래도 키 차이 때문에 니가 유리할거다." "...굉장히 잘 아네요?" "어제의 친구는 오늘의 적이지. 젠장, 씁쓸하군." "...제가 이길 확률은?" "반/반. 하지만 무승부만 만들어놔도 괜찮아." "네." 우석은 주먹을 한번 꾸욱 쥐고는 가운데로 나아갔다. 지환이 손목을 흔들며 우석을 노려 보았고, 우석은 그 눈빛을 맞받아쳤다. 서로를 탐색하던 시간이 지나자 지환이 먼저 주 먹을 날렸다. 여전히 멋진 기술- 아니, 파워도 배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우석이 녀석 도 가만히 당하지는 않았다. 내가 말해준 대로 완력을 이용해 지환을 저지하고, 주먹 하 나 하나에 힘을 쏟아부어 한번 맞을 때마다 타격이 만만치 않아보였다. 지루하다면 지루 하고 초조하다면 초조한 10분이 그렇게 지나가고, 둘은 땀에 젖어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 었다. 누가 봐도 지친 모습이었다. "이번 판은 무승부로 해야 할 것 같군." "좋을대로." 지환과 우석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각자 패거리로 돌아왔다. 잘 버텼다는 의미로 우석 이 녀석의 어깨를 한번 툭 쳐주었다. 자, 다음은 내가 나갈 차례겠지? "내가 간다." 성혁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데 성혁이 재밌다는 듯 말 했다. "오홀~ 드디어 보스가 나오는군." "흠, 그래?" "긴장 좀 해라, 금선유." "충분히 하고 있어." "젠장, 모르겠다. 알아서 해 봐." "누군지 알 것 같아? 짱 정도면 중학교때 왠만큼 날렸을 거 아냐?" "아니. 모자를 깊숙히 눌러쓰고 있는데. 저 자식, 얼굴에 무슨 결점이라도 있는 거 아 냐?" "글쎄다. 내 알 바 아냐." "잘 다녀 와라." "오냐, 임마." 성혁이의 주먹과 내 주먹이 스치듯 부딪쳤다. 자아, 드디어 나군. 내 상대는... ...어디선가 많이 본 옷이다. . ...어디선가 많이 본 자세다. ...결정적으로, 어디선가 너무나 많이 본 얼굴이다. - 모자를 푹 눌러쓴 그 녀석은 자근자근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이.민.재. 군이었다. "아까 그 놈보다 오히려 약해 보이는군. 잘못 나온 거 아냐?" "호오- 내가 보이기는 하는건가?" 모자를 내리깔고 있던 민재가 내 목소리를 듣고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벌려진 입. 일초, 이초, 삼초. 타임 아웃- "으갸갸갸갸갸갹!!!" 긴장을 유지하고 있던 싸움판은 민재의 괴상망측한 목소리로 단번에 코메디가 되었다. 성혁네도, 삼인조네도 이유를 모르는지라 괴성을 지르는 아메바 하나와 선유를 번갈아보 고 있을 뿐이다. 흐음, 놀라는 걸 보니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 모양이군. "왜 놀라지, 이.민.재. 군?" "아, 아니... 선유야, 그게..." "선유?!" "선유야!!!" 민재의 말에 놀란 하진과 율도 뛰쳐나왔다. 그러나 곧 선유의 화난 얼굴을 보고는 난감 한 듯 멈춰 섰다. 선유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거칠게 장갑을 벗어 민재의 가슴팍에 날렸다. 민재도 나머지들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실망이다, 이민재." "선유야, 그건..." "원 율. 남궁하진. 너희도 똑같아." "..." "선유야..." "젠장!!!" 선유는 가슴속에서 뭔가가 치솟아 오르는 걸 느꼈다. 떨거지들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 러간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자기들끼리 수군대고 있었다. 선유는 삼인조에게서 발걸음을 떼 선화고 쪽으로 돌아왔다. 너무 열이 받아 머리가 아파온다. 지끈지끈. 웅성웅성. 선유는 머리를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얼마간 가만히 있는다 싶더니 만, 다시 시작이다. 뭐, 이 상황에서야 시작한다 한들 이상하지도 않아. 선유의 예민한 신경과 남에게 기대지 않는 성격은 화가 나면 그에게 엄청난 두통을 안겨 주었다. 이번엔 스트레스성 두통에 빈혈까지 겹쳐 오는 듯 했다. 정말인지 빌어먹을 녀 석들이다. 이렇게 되면 약도 없다. 조용한 곳에 가서 스스로를 추스리고 머리가 가라앉 기를 바라는 수밖에- 스스로가 생각해도 개같은 성격이었다. 화만 나면 두통이라니... 마치 떼쓰는 어린얘 같지 않은가. 성혁도 우석도 그 심상치 않은 모습에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았다. 예전에 하진을 본 적 있는 단영이가 알고 있는 사실 몇을 성혁이에게 주 절거렸다. 성혁은 단영의 말에서 오늘 싸우기로 했던 상대편의 짱과 선유가 아는 사이였 다는 것을 듣고는 싸움을 지속할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왠만하면 상 대편을 아는 선유가 나서서 처리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겉으로 보기에도 날카로워 보이 는 그 모습에 차마 말을 걸지 못하는 성혁이었다. 하지만 묵묵히 자신의 짐을 챙겨 들고 자리를 뜰려는 선유를 보자 얼떨결에 말이 튀어나 왔다. "어, 선유야... 아는 사람이냐?" "몰라." 조용한 공사장에 선유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상대편도 100% 들었을 것이다. "응? 하,하지만..." 단영의 말과는 달리 상대편과 자신의 관계를 단호히 부정하는 선유의 태도에 성혁은 당 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선유의 모습을 삼인조들은 난처한 듯 지켜볼 뿐이었다. "야, 아는 사람이라던데... 그럼 싸움은 어떻게 하냐? 관둬?" "마음대로. 아, 아니." 선유는 무표정으로 바뀐 얼굴에서 입꼬리만 끌여올렸다. 나름대로 웃음짓는 모습이었으 나 눈가는 휘어지지 않은 채였다. "1대 1이고 뭐고 필요없어. 할 수 있는 데까지 조.져." 이쁘장한 얼굴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오자 삼인조네들은 열을 내며 선유를 향해 이를 갈 았다. 그러나 곧 하진의 가만 있으라는 눈빛에 불만을 가득 담고는 제자리를 지키고 있 을 뿐이었다. 성혁은 기가 찼다. 조지라니, 우리가 어떻게 조진단 말인가. 까놓고 얘기해서 건우도 없다. 선유 저 놈은 싸움에서 빠질 모양인가보다. 우리 팀이 불 리해도 훨씬 불리한 것이다. 우리가 당했으면 당했지, 이길 건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서슬이 시퍼래진 선유의 모습을 보자니 반론을 제기할 맛도 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화가 났을까? 최소한의 절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오던 선유였다. 그것 은 선유가 어떤 말을 할 때에도, 어떤 행동을 할 때에도 그를 둘러싸던 막 같은 것이었 고, 선유와 가장 심하게 장난치던 성혁에게도 그 최소한의 범위는 지켜졌다. 그러나 지금은 정말 위태로워 보인다. 하늘거리지만 무엇보다 강력한 막이 젖혀지자 날 카롭고 뾰족하고 아슬아슬한 선유가 나타났다. 뭐, 이것도 나름대로 감칠맛이 나지만. 선유는 가방을 둘러메고는 공사장을 빠져나왔다. 노을이 하늘 가득 퍼져 있었다. 마지 막 햇살을 자랑이라도 하는듯한 그 눈부신 빛에 선유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선유는 조금씩 비틀거리며 자리를 옮겼다. 어서 자리를 벗어 나고 싶었다. 지금 삼인조 녀석들을 봤다간 정말 끝장날 거다. 그 녀석들은 나를 우습게 봤다. 나와의 약속을 우습게 봤고, 그들을 걱정하는 내 마음 을 우습게 봤다. 정말인지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쿡쿡..." 사내자식들이 크면서 싸움 한두번 하는거야 당연한건데 왜 이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건지... 그들이 내 어리광을 들어주는 것을 빌미로 내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건 잘 알 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약속했잖아... 머리가 아프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안녕하세요, karin입니다. 오랜만이죠? ...죄송합니다. 음... 나름대로 열심히 썼습니다만... 역시 허접이네요. 허접으로 시작해서 허접으로 끝 나는 일관된 모습을 보여드리고 있습니다... ㅡ.ㅜ 이만 줄이겠습니다.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그리고 어려운 결단을 내리신 kiss님께도 꾸벅- karin (primblade00@yahoo.co.kr) 혹(眩) - 아찔하다 18살. 누구보다도 힘이 남아돌때이다. 그 기운은 그야말로 기개세 역발산(氣蓋世力拔山) 이라 표현해도 좋을 정도인 것을, 선유도 알고는 있다. 고등학교 사내자식에게 싸우지 말라고 한다는 게 얼마나 얼토당토하지 않은 소리인지...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어른들께서는 마지막임에도 불구하고 선유가 시신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비행기 사고로 파손된 유체가 어린 선유에게 악영향을 끼칠까 봐 쉬 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유는 말해주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보지 말라하는 것에 대해 선 유는 반감을 느꼈고, 결국은 어른들이 선유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때 몰래 시신에 다가가 하얀 천을 걷었었다. - 그곳엔 이미 선유가 기억하는 부모님이 없었다. 비행기 사고였던 만큼 시체가 잘 보존되는것은 어려웠고, 장례를 위해 어느정도 시신을 수습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 유체는... 사고의 끔찍함을 나타내는 것처럼... 처참했 다. 인간의 몸이 종이봉지와 별 다를게 없다는 것을 선유는 느꼈다. 사실 중학교 때는 그 녀석들을 따라 싸움판을 전전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중 3때 인가, 선유도 싸움에 참여했을 때 어떤 빌어먹을 새끼가 무언가로 선유를 내리치는 것 을 율이가 막다 다치면서 - 그때 율이는 팔을 7바늘 꿰매야 했었다 -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누구보다 강하고, 그 어떤것도 이들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율이가 부 상을 당하면서 이들도 인간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와 팔이 피 범벅이 된 율이와 흉하게 파손된 부모님이 겹쳐오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강해봤자 어차 피 약하디 약한 인간일 뿐- 인간의 강함에는 한계점이 있다. 더 이상 이들이 싸움판을 전전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 그이상 그것을 보는 것은 선 유에겐 고통이었다. 이들 또한 언제 부모님처럼 사고를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그래 서 억지스럽게나마 약속을 받아내었다. 억지인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해주길 바랬다. "선유야, 기다려!!" 웃기고 있네. 지금은 절대 보고 싶지 않다. 만약 지금 저 녀석들의 얼굴을 보게 된다 면... "젠장, 금선유!! 기다리라니까!!!" 다급했는지 하진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선유는 걸음을 빨리하다 삼인조와 자신 의 간격이 좁혀지는 걸 알자 급기야 달리기 시작하였다. "꺼저, 개자식들아!!" "선유야, 우리 말이라도 하자. 응?" "웃기지 마!! 젠장, 따라오지 마!!" "금선유, 서라니까!!" "오지마!!!" 하진이 달리는 선유의 팔을 나꿔채어 고개를 돌리는 선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하 진의 얼굴에 어쩔 줄 모르는 듯한 당혹스러움이 퍼졌다. 뒤따라온 민재와 율이도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하진의 얼굴을 보고는 당황하며 입을 우물거렸다. 젠장... 이럴 줄 알았어... 이 녀석들 보면... 울 것 같아서 일부러 혼자 나왔는데...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감히 자신을 붙잡은 괘씸한 것들을 노려봐주었 다. 하진은 잠시 움찔하더니 옷 소매로 선유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민재가 말문을 열었다. "미안하다, 선유야." "미안해, 다시는 이런 일 없을거야." 가만히 말을 듣고 있자니 다시 화가 복받쳐 올랐다. "미안해? 뭐가?" "선유야..."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라고? 내가 니들을 어떻게 믿어?!!" "..." "내가 억지였다는 건 알아. 하지만 약속했잖아. 알아들어? 약속했다고!!" "..." "젠장할 개새끼들!! 처음부터 상대하기 귀찮으니까 대충 약속해놓고 이럴려고 한 거 지?" "내가 니들에게 그렇게 우습게 보였어? 내가 한 말이 그렇게 우스웠냐고!! 대답하란 말 야, 이자식들아!!!" "..." "호오- 그래, 이제는 우습게 보다 못해 무시까지 하는구나. 좋아, 좋다구. 너희는 너희 대로, 나는 나대로 갈 길 가자. 친구고 뭐고, 끝내!!!" 악에 받쳐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던 선유는 그 말에 갑자기 정신이 돌아왔다. 묵묵히 선유의 말을 듣고 있다 마지막 한마디에 표정이 급변한 삼인조를 보며 선유는 자 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해도 되는 말과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면 선유의 마지막 한마 디는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말 제 1순위인 것이다. 마지막 말 만큼은 후회스러웠지만 그 래도 자존심 때문에 물리지 못하는 선유였다. 얼굴 표정이 급변한 하진이 선유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진심이냐?" 차마 대답을 못하는 선유에게 하진은 목소리를 낮게 깔고는 물었다. "...진심이냐?" "몰라." "...진심이냐?" "몰라!!!" "진심이냐고!! 금선유, 똑바로 대답해. 진심이야?!" 대세가 바뀌어서는 이제 선유를 잡아먹을 듯 다그치는 하진이었다. 선유는 자신이 마치 터진 풍선같다고 느꼈다. - 크게 부풀어오르다가 '뻥!'하고 터진 후 조그맣게 오그라드 는. "알았어!! 정정해, 정정한다구!! ...마지막 말은 실수다, 미안." 조그맣게 대답하는 선유의 말에 그제서야 하진의 표정이 조금씩 나아졌다. 민재가 다시 말을 꺼냈다. "정말 미안하다." "선유야, 다시는 이런 일 없을거야?" "웃기고 있네. 그 정도로 일을 벌여놓고선 다시는 이런 일 없을거라고 말하면 내가 믿 을 거 같냐?" 아무리 삼인조가 싸움에 일가견이 있다지만 싸움은, 특히나 영역싸움은 개개인이 하는것 이 아니다. 밑의 얘들을 이끌고 이만큼이나 판을 벌려놨다면 꽤나 열심히 했다는 말인 데 이제부터 안 싸우겠다니, 어떤 바보가 그 말을 믿겠냔 말이다. "...그룹은 해체한다." 하진이 선유의 말을 듣고 있다가 나즈막히 내뱉었다. "해체까지는 안 가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물러날 테니까." "정말... 미안하다." 진심으로 사과하며 해체까지 불사하겠다는 삼인조의 말에 선유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 졌다. 강아지처럼 자신이 대답하기만을 기다리는 민재와 율이의 얼굴을 보고있자니 슬그 머니 웃음이 삐져나왔다. "물러나지 마." 무심코 말을 하고 나서야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당황한 선유였다. 분명히 자 신은 엄청난 육두문자를 쏘아붙일 생각이었건만, 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 한마디에 민재와 율이의 얼굴에 회색이 도는 것을 느끼며, 남들이 보기엔 무표정으로 일 관하고 있는 것 같은 하진의 얼굴에도 미미하게 즐거운 빛이 도는 것을 느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했다. "정말이지? 진짜다!!" "...알았어. 대신!!!" 조건부라는 선유의 말에 다시 굳은 민재와 율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싸움 할 때는 나도 데리고 가." "뭐? 하지만..." "싫어? 그럼 관둬. 한번만 더 싸우면 그땐 정말 끝이다." "윽..." 어쩌다 보니 싸우는 것 까지는 허락했지만, 이것만은 물러설 수 없는 선유였다. 자신이 모르게 이들이 싸운다면 수시로 불안감에 휩싸일 것이다. 그것만은 절대 싫다. 게다가 옛날에 그룹의 누군가에게서 자신과 함께 있으면 이들이 약간이나마 조심스러워 진다는 것을 얼핏 들은 기억이 나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따라다녀야겠다고 생각한 선유 였다. 좀 더 화를 내려고 한 것 같은데, 정말 용서할 수 없을 것같이 배신감을 느꼈는데, 왠 지 일이 흐지부지하게 끝난 것 같다고 느끼는 선유였지만 강아지같은 민재와 율이를 보 자니 더이상 화도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선유의 기분을 풀려고 어울리지 않는 얘교를 부리는 민재와 율이 옆에서 뭔가를 심각하 게 고민하는 듯 양 눈썹을 찌푸리던 하진이 선유에게 말을 꺼냈다. "선유야, 너 귀걸이..." "이거?" 선유는 자신의 귀에 달린 붉은 피어스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래. 아까 보니까 니 친구중에 비슷한 걸 하고 있는 놈이 있던데..." "아, 단영이? 예전에 너랑 인사했었잖아." "...그거, 그 놈이랑 같이 산거냐?" "음... 결과적으론 그렇게 되는건가?" 고민하면서도 시인하는 선유의 대답에 하진이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워졌다. 민 재와 율은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을 지으며 혹시 있을지 모를 <남궁하진 폭발> 에 대 비, 하진의 어깨를 눌렀다. "결...과적으로- 라니? "아, 내가 한 게 괜찮아 보였는지 단영이도 사더라. 처음엔 나랑 같은 걸 찾았는데, 같 은 색깔이 없어서 모양만 같은걸로... 하진아?" 순간적으로 하진의 얼굴 표정이 어두워지며 양 팔에 힘줄이 불거졌다. 민재와 율이 흠 칫 놀라는 사이, 하진은 이빨 사이로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뭐가?" "흐음... 단영이라..." "야!!" 하진은 자신을 부르는 선유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순간적으로 강한 힘이 들어가자 선유 의 아미가 찡그려졌지만 하진은 개의치 않고 선유의 귀에 달린 귀걸이만을 뚫어져라 쳐 다보았다. "남궁하진, 뭐하는거야!!" "..." 하진은 대답하지 않은 채 선유의 귀에 달린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선유는 한마디 쏘아 주려다가 진지한 하진의 표정에 아무말 못한 채 하진의 행동을 지켜 볼 뿐이었다. 순간- 하진이 선유의 귓볼에서 피어스를 빼 버렸다. "우왓, 남궁하진!! 뭐하는 짓이야!!" "내가 갖는다." "무슨 개같은 소리야!!" "저번에 축제에서 빌린 돈 대신 주겠다며?" "언제는 싫다며! 갑자기 왠 변덕이야?!" "어쨌든, 이건 내꺼야." "이 빌어먹을 자식아, 막힌다구!! 빨리 내놔." "새로 사줄께." "아씨, 정말... 막힌다니까!!" "지금 사면 되잖아. 귀걸이 사러가자." "어어? 야, 남궁하진, 도대체 무슨 짓이냐고!! 야, 손이나 놓고 걸어!! 젠장!!" 투덜대는 선유의 손목을 잡고는 성큼성큼 오토바이로 향하는 하진과, 끌려가면서 왠지 속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선유와, 오토바이를 타며 안도의 한숨을 교환하는 민재와 율이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안녕하세요, karin입니다. 드디어... 써놓은 것들이 전부 사라지고... 남은건 쓰잘데기없는 몸뚱아리와... 거머리같은 게을병... 에궁... -_-;;; 언제나 남을 배려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사시길 빕니다. ^^* karin (primblade00@yahoo.co.kr) 혹(眩) - 아찔하다 여행 첫날 : ...날씨가 정말 지랄맞게 화창하다. 금일(今日) 5월 26일, 현재 시각 오전 10시 20분. 초침이 막 40초를 지나는 중이다. 그 리고 나는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고 있다. 수학여행지의 대명사 - 바꿔말하면 진부하 다는 거지만 - 경주로 향하는 중인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젤과 붓, 물통 등도 챙 겨간다. 달리 예술고겠는가. 다른 학교 녀석들이 열나게 수련할때 우리는 그림그려야 한 다. 놀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통은 피장파장으로 쳐 두겠다. ...정말 젠장맞을 날씨다. 오월 말, 계절상으로는 늦봄이건만 이 놈의 기온은 초여름에 다가가다 못해 돌파하여 더위를 뽐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가는 모든 것들의 운명 처럼, 군중의 원망을 한몸에 받고 있다. 누가 그랬던가? 미움도 증오도, 사랑의 변형된 모습일 뿐이라고. 우린 오늘의 아.름.다.운. 날씨를 허벌나게 사랑한다. "더워..." "자, 여기 물." "아, 고마워, 지성." 더위에 지쳐 맥빠진 목소리를 내자, 지성이가 자신의 물통을 건네주었다. 무궁화호는 에 어컨이 빵빵하지 않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칸만 그런 것 같다. 다른 칸은 추워 서 긴팔을 곂쳐입을 정도로 서늘한데 어째서 우리칸은 이렇게 자연과의 동화를 주장하 는 건지. 튄다고 다 좋은게 아니라는 걸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인간의 학습법 중 체험이 가장 원초적이라는 말에 백번 찬성한다. 지성이에게 받은 물을 마시려고 입가로 가져갔지만, 본 목적은 이루지 못했다. 원인을 밝히자면... 휙- "뭐야, 양건우." "이거 마셔라. 이건 내가 마실테니까." 바로 건우 녀석이 물통을 낚아챘기 때문이다. 지성이의 단정한 입매가 일그러졌지만 건 우는 개의치 않고 물통의 물을 비웠다. 한 모금도 남기지 않고- ...그나저나 저 녀석, 밤중에 지도 그리지 않을까 두렵군. 내 기억에 하자가 없다면, 분 명히 건우는 5분 전 물 1통을 비운 상태였다. 남의 물을 가로챈 괘씸한 녀석을 어떻게 갈굴까 잠시 고민했지만 녀석이 포카리를 던져 줬으므로... "나 참, 별난놈일세..." 라고 응수하는 것으로 그치며 포카리를 땄다. 부드러운 이온 음료가 촉촉히 목을 적신 다. 좀 낫군. "둔팅이." "하.우.희. 너에게 그딴 소리 들을 이윤 없다고 보는데?" "없기는. 사방에 깔린게 이윤데. 그렇지, 단영아?" "갑자기 단영이는 왜 끌어들이냐? 마.녀." "금선유,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보지? 오호호호호호호-" "우희말이 백번 옳아. 넌 반박할 자격도 없어." 아니, 안성혁 저 녀석은 왜 또 갈구고 난리야. 이것들이 단체로 더윌 먹었나. "안.성.혁. 디자인부면 디자인부답게 옆칸으로 옮겨. 여긴 미술부 객차란 말이다. 멋대 로 자리를 바꿔놓곤 왜 시비야." "왜 나한테만 그래? 건우도 있다구!" "저 녀석은 조용하니까." "...이 녀석도 성혁이랑 같이 폐기처분했으면 더 바랄게 없겠는데."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내뱉은 지성의 폭탄선언에 모두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성을 쳐다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투와 내용과 얼굴과 표정이 각각 따로노는 인간이다. 지성 의 뛰어난 능력 - 위기감 조성에 - 에 경탄을 보낸다... 몇 마디 대화와 간식과 음료수가 공중을 날아다니며 난무하던게 불과 몇 분 전이건만, 어느새 모두들 잠들어 있다. 쯧쯧, 건우 녀석... 결국 여기서 잠들었군. 학교 짱인 녀석이 자리 바꿔달라 하는데 누가 감히 거절하겠는가. 아, 물론 이 녀석이 힘을 이용해 약자를 괴롭힌다는 건 아니지만 인간들의 보편적인 상식으로는 건우의 예외 적 성향을 계산하지 못하는 것이다. 필시 피눈물을 흘리며 친구들과 아디오스 하고 얼 굴도 모르는 디자인 부 녀석들 사이에 끼어 선잠을 이루겠다. 잠시 건우에게 자리를 빼 앗긴 클래스메이트에게 애도를- 선유는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 곧 CDP를 꺼내 secret garden의 CD를 넣었다. 신비롭고 부드러운 바이올린의 전주가 울려퍼지자 시선을 창가로 옮겼다. 나무와 집과 전봇대가 차례대로 그를 지나쳤다. 경주, 경주라... 대부분 경주는 2번째이고, 많이 간 녀석은 4~5번째라고 하건만, 선유는 경주가 처음이었 다. 초등학교 수학여행은 설악산으로, 중학교 수학여행은 일본으로 갔기 때문이다. 어렸 을 적 부모님을 따라 국외를 돌아다녔으면서 정작 국내는 처음이라니, 스스로도 자랑할 꺼리는 아니라 생각한다. 책과 사진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끼던 천년의 도시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란 생각에 선유 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사랑, 우정, 질투, 배신, 욕망... 인간사의 모든 감정이 천년고 도에 녹아내렸을 것이다. 오래된 도시 특유의 우아하고 탈속적인 분위기를 떠올리며 자 신도 모르는 새에 입가에 미소를 띄우는 점은 아버지를 닮은 건지도 모르겠다. 생각에 빠져있던 선유에게 화장실을 갔던 단영이 말을 걸어왔다. "어, 얘들 전부 잠들었네." "응." "넌 왜 안잤어?" "아아, 생각 좀 하느라..." "무슨 노래?" "secret garden." "음... 잘 모르겠다." "많이 유명한 그룹은 아니야. 난 좋아하지만." "들어봐도 돼?" 단영은 좌석에 놓여있던 과자봉지와 음료수 캔을 치우며 선유의 옆좌석에 걸터앉았다. 이어폰의 한쪽을 건네주자 왼쪽 귀에 꽂고는 선유를 향해 미소지었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정말 시원스런 미소다. 순수와 지성이 적절히 섞여있는, 현재 나 이에 가장 어울리는 미소. 선유는 단영의 미소에 무의식적으로 부러움을 가지며 말을 걸 었다. "경주에 가본 적 있어?" "어? 내가 말 안 했던가? ...난 초등학교 3학년때까지 경주에서 살았어." "뭐? 정말?" 뜻밖의 대답에 선유는 고개를 돌려 단영을 쳐다보았다. 선유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급격 히 이동하자 단영은 쑥쓰러운 듯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경주에서 태어난거야?" "아니. 태어나긴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랑 어머니가 같이 유학가시는 바람에..." "유학? 뭐 전공하러?" "미술이랑 공학." "어? 미술? 어느 분이?" 아무 생각없이 물은 질문에 단영이는 묘한 표정을 짓더니 곧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너 답네." "뭐가?" "선입견 없는 거 말야." 갑자기 바뀐 내용에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듯 단영을 빤히 쳐다보자, 단영은 한 숨을 내쉬며 보충 설명을 덧붙였다. "보통 부모님이 미술과 공학을 전공했다고 하면 아버지가 공학, 어머니가 미술인 줄 지 레짐작하거든." "남자도 미술할 수 있고 여자도 공학할 수 있으니까. 그 예로는 우선 미술학도인 내가 있잖아?" "쿡쿡, 그래. 아무튼 너다워." "그럼 아버지가 공학?" "아니, 네가 바로 맞혔어. 아버지가 미술, 어머니가 공학이야." "아버지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데?" "차연준." "정말?!" 차연준이라면 우리나라 중견 미술가의 선두를 달리는 화백이다. 외국에서도 꽤 이름이 알려져 있다고 하는- 그런 사람을 아버지로 두었으면서 시치미를 뚝 떼다니. 선유는 잠시 단영을 노려보았지 만 곧 자신도 단영에게 가족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이 기억나서 슬그머니 시선을 완화시켰 다. 약았다는 말을 들어도 별 수 없을 것이다. "미리 말 안해서 미안." "아니, 괜찮아. 나도 가족 얘기는 별로 하지 않으니까..." "너희 부모님은..." "이런!! 단영아, 지금 몇시야?" "응? 아, 11시 30분." "이런 젠장할!! 미치겠군... 나 전화 좀 하고 올께." "어..." 부산스럽게 자리를 빠져나온 선유는 객차와 객차 사이의 연결로로 나왔다. 덜커덩거리 는 기차의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너무 어설펐던 것일까? 마지막 단영의 쓴웃음이 여과없이 고스란히 느껴져, 어느새 선유 도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직... 익숙하진 않는 것 같다. 무의식적으로 이런 반응이 나온 걸 보면.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부모님을 정확히 인식할 수는 있지만, 조금 아릿하긴 해도 얼마 든지 화제로 삼을 수도 있건만, 아무래도 삼인조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너무 이른 것같 다. 급하게 빠져나오느라 둘러대긴 했지만 전화 용건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이번에 경주로 수학여행지가 결정났는데도 삼인조들은 별 반응이 없었었다. 그러려니, 하고 넘기려 해도 저번 선화제때처럼 '의외로 조용' 한 삼인조들에게 의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도 바보는 아닌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선화고와 수학여행일정을 맞 추려고 로비활동을 벌였단다. 오랜만에 전화한 원영학원의 친구에게서 "이번 수학여행 은 경주로 갈 것 같아. 원래는 중국이었단 말야~" 라는 울상섞인 푸념을 듣고서야 이 녀 석들의 수를 알아챌 수 있었다. 아니면 지금쯤 내 옆에는 삼인조가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겠지. 얼마 전 선유를 속이고 쌈질하다 걸린 전과가 있었기에, 삼인조는 선유의 협박에 얌전 히 물러났다. 그렇지만 그때부터 완전히 태도를 바꿔서는 하루 한번씩 전화해라, 두통 약 챙겨라, 더위타지 않느냐, 아침 굶지 말아라 등등 시어머니를 능가하는 잔소리를 해 대는 것이다. 처음엔 듣고 있었지만 나중엔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한귀로 흘려버렸다. - 당신도 당해봐라. 세개의 스테레오가 돌림노래순으로 끊임없이 지껄여대는 것을. 그 약속 중에는 기차가 출발하면 전화해서 상황 보고(?) 하라는 말도 있었다. 하진이가 핸드폰까지 쥐어주었건만, 들뜬 마음과 떠들썩한 분위기에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이미 기차는 출발한지 2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한숨을 쉬며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단축번호 일번을 누르고 무얼 누르고- 라며 민재가 끊임없이 설명해 주었었는데, 문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다. 아무래도 기계치인가 보다, 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신호음이 가는 것을 기다렸다. 아니, 그리 오래 기다리 지는 않았지만. 따르르릉- 따르르릉- 정확히 두번째 신호음이 가자마자 상대편은 - 99% 민재이지만 - 전화를 받은 것이다. 신 속, 정확을 모토로 내세우는 녀석이었던가? "여보세요?" "민재냐?" "금선유!! 너 왜 이제야 전화한거야!!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웃기고 있네. 내가 무슨 어린얘냐?" 코웃음치며 민재의 말을 받아넘기는데 수화기 저편에서 떠들썩하니 소리가 들렸다. "이민재군, 수업시간에 전화통화는 금지되어있네만..." "어? 수업시간이야? 그럼 끊는다." 되도록 빨리 끊어야 한다. 이 녀석들은 도무지 선생을 선생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 물 론 제대로 된 선생은 존경하지만, 이 녀석들의 존경을 받으려면 왠만해선 안 된다 - , 그리고 선생은 이 녀석들을 특별취급하기 때문에 - 하진의 말 한마디에 목숨이 왔다갔다 하기 때문이다. 돈에 구애되는 찝찝한 현실이지만, 그래도 현실은 현실인 것이다. - 이 렇게 수업시간에 핸드폰이 울린 경우 이 녀석들은 매우 당당히 전화를 받는다. 하지만 평소 수업시간엔 폰을 꺼놨었는데, 급히 연락 올 데라도 있나? "어, 야!! 잠깐, 잠깐만!!!" 다급한 민재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폰을 접으려고 했을때, 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유?" "어. 나 기차안이야." "어때? 괜찮아? 뭐 힘든거나 불편한건 없고?" "힘 안들고 안 불편한 여행이 어디있냐? 그걸 감수하면서 가는거지. 아직은 괜찮아." "그래. 날씨가-" "더워..." "모자 꼭 써라. 정 안되면 우산이라도 쓰고. 너 더위 잘 먹으니까..." "알아. 수업중이라며? 끊는다." "...그래." "걱정하지 마, 하진아..." "...뭐가?" "그냥..." "쿡쿡..." "야, 웃지마. 젠장, 내가 뭐하는 짓이야. 아무래도 더위먹었나보다. 끊는다." 더이상 끌다간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하진의 대답을 듣지 않고 플립을 닫아버렸다. 기 차의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일정하게 템포를 맞추어 들려온다. 말꼬리를 흐리긴 했지만 하진이라면 알것이다. 그래- 잠시 솟아오른 집에 대한 그리움을 선유는 가슴 깊이 묻어두었다. 그리고 경주에 대한 기대감을 끌어올렸다. 이젠 삼인조에게 그만 기댈때도 되지 않았는가. 어른이 되어서도 이렇게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여행은 자립심을 길러준다- 라고 누가 말했던가. 이제는 여행을 즐길 때이다. ---------------------------------------------------------------------------------- 안녕하세요, karin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써보는 [혹]이군요. 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러브러브 광선을- 참, 수능 보시는 분들... 잘 보시구요. ^^* 그럼 저는 물러나겠습니다. 이만- karin (primblade00@yahoo.co.kr) 혹(眩) - 아찔하다 여행 둘째날 : 남겨진 자의 후유증 탕- 총소리와 함께 소년이 쓰러진다. 흩어지는 핏방울. 오묘하게 붉은 그 색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채 빼앗는다. 소년은 갈기갈기 찢겨지고, 곧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난도질된다. 가슴이 아려. 숨이 막혀와. 누가 나 좀... 나 좀...!! "괜찮아..." 누구? "괜찮아..." 아름다운... 누구? "...는 죽었어. 넌 새롭게 태어난거야." "아...니..." 말이 안 나온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데... 누군가가 목구멍을 쥐어짜는 것처럼... 소리 가 나오지 않아. 아름다운... 눈..물? 우는거야? 왜? 나... 때문에? ...너의 눈물은 가치가 없어. 슬프게도. 이렇게 아름다운 눈물인데. "내가 책임질께. 내 이름과 생을 걸고 너의 운명을 책임질께. 네가 여태 받지 못한 사랑 만큼, 내가 사랑해줄께. 너를 추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은 아까의 그.것. 처럼 갈갈이 찢 어버릴께." "누... 누구..." "그러니까 괜찮아. 살 수 있어. 살아야 돼. 너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살아야 돼." "...누..." 울지마...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 감...정? ...너무 생소해. 가슴 한켠이 아파오는게... 감정이라는 건가...? "웃으며 만나자. 다음에는 웃으며." "...!!!" 율은 자신의 땀으로 흠뻑 젖은 시트를 걷어올리고는 창문을 열었다. 5월 말이었지만 새 벽은 아직 서늘했다. 바람이 자신의 몸을 휘감는 것을 느끼며 책상 밑바닥에 비상용으 로 두었던 담배를 꺼냈다. 정말 오랜만의 꿈... 그리고 오랜만의 담배다. 둘의 연관성은.... 선... 유... 벨렐렐렐렐레~(핸드폰 소리입니다... ^^;;;) "젠장, 씨펄... 어떤 새끼야!! 누가 한밤중에..." "시끄러, 나야." "아항, 나가 누구신가? 나라고 하면 내가 알아들을 것 같아, 원 율 이 회쳐먹을 새꺄!!" "...알아들었잖아." "응? 그거야 이 지고하신 민재님의 뛰어난 능력 덕분..." "시끄러. 술이나 사라." "미친. 선유 없으니까 돌았냐? 새벽녘부터 술은 무슨..." "사라면 좀 사!!!" 이 베라먹을 새끼는 또 뭐란 말인가... 민재는 감기는 눈을 비벼대며 애써 잠을 깨려 안간힘을 썼다. 어제 저녁내내 하진이의 술주정을 들어주어야 했다. 그리고 겨우 자나 싶더니만, 원 율 녀석이 새벽부터 사람 깨 워서는 술 사라고 난동피우는 것이다. 이 녀석도 보나마나 '금선유 부재로 인한 후유 증' 이겠군. 젠장, 내가 무슨 죄가 있냐고. 하지만 율의 목소리는 꽤나 심각했기에 민재는 그이상 토를 달지 않고 가게 이름을 댔 다. "...'FERRERO' 로 가마. 괜히 오토바이 타지 말고 기사 아저씨한테 태워달래." "놔 둬..." "너 오토바이 타고오면 술이고 뭐고 없어." "..." "알았지?" "..." "알았지, 율아?" "젠장... 그래. 알았다, 빌어먹을 새꺄." "캬캬, 그럼 좀 있다 보자." 얼떨결에 수화기를 들고 보니 어느새 민재 녀석에게 전화하고 있었다. ...말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놈만큼 이해심깊은 녀석은 없으니까. 사고날까봐 오토바 이 놓고 오라며 그 잔소리를 해 대는걸 봐도... 율은 스웨터를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기사 아저씨가 자고 있을 현관 옆 작은방 에 들어가려는 데 충주댁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율이 학생, 벌써 일어났어?" "아저씨 주무세요?" "응, 장관님께서 어제 회식때문에 4시 넘어서야 들어오셨거든." 그렇다면 잠든지 채 2시간도 되지 않았단 말이다. 내가 아저씨를 불러내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아주머니는 안쓰럽다는 시선을 방문 너머로 보냈다. 티가 나는 그 눈빛을 보 고도 곤히 자는 사람 깨우는건 못할 짓이다 싶어 - 이건 선유의 영향이다. 선유는 자는 도중에 누가 깨우는 걸 제일 싫어하니까 - 차키만 들고 나왔다. 뭐, 난 약속 지킨거야. 민재 녀석, 오토바이만 안 타면 된다고 했잖아? FERRERO라고 쓰여진 건물 지하로 들어가니 기다리고 있던 녀석이 달려나와 차 키를 받아 들었다. 약간의 팁을 던져주고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회원 카드를 검사하는 역할 을 맡은 두 웨이터가 엘리베이터 문 옆에 서 있었지만 율에게 카드를 요구하지는 않았 다. 율의 얼굴과 집안은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FERRERO는 민재, 하진과 - 물론 선유 는 빼고 - 가끔 오는 고급 회원제 클럽으로, 흔히 말하는 부르주아 계층의 인간들의 웃 기지도 않는 우월감을 충족시켜주는 곳이다. 재수없기는 하지만 조용하고 보안 잘 되니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까만 바탕에 흰 글씨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간판을 지나 문을 열 고 들어갔다. 민재는 이미 와 있었다. 자리에 앉자 웨이터가 메뉴판을 들고 온다. 뭐, 주문하는대로 다 주니 메뉴판이 소용없 긴 하지만. 브랜디를 한 잔 청하고 폭신한 소파 깊이 몸을 묻었다. "...뭐냐." 민재 녀석의 말투가 곱지 않다. 하긴, 자기라도 그랬겠지만... 꼭두새벽녘에 기껏 불러내서는 눈 감고 명상만 하고 있으니 말이다. "원 율, 사람 불러놓고 무시할래? 지금 나 갖고 노냐?" 이 녀석도 선유를 닮아서일까... 약간은 안정이 된 느낌이다. "원 율, 너 정말..." "그... 꿈을 꿨어." 계속 무시되는 자신의 말에 짜증을 내려던 민재는, 율의 고통스런 저음에 순간 입을 다 물었다. "그... 꿈이라면... 6학년때의?" "그래..." 아아, 이런. 민재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한숨을 내 쉬었다. 이미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고 생각했었 는데... 그 때의 악몽같은 일이라면 잘 알고 있다. 직접 겪지는 못했지만 수도 없이 들었으니 까. 자칫하면 이 녀석과 나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될 뻔한 것이다. ...그때 선유가 죽었다면. "왜... 꾸게 된거야?" "몰라... 모르겠어..." "선유가... 없어서 그런가..." 젠장할!! 민재는 욕이라도 내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녀석들의 사고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진이도, 율이도... 자신도 선유를 아끼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녀석에게 집착하지 마." "집착하지 않아..." 그 말에 민재는 뭔가 비꼬려고 했지만, 율의 다음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내 유일한 구원자니까... 쿡... 안 할래야 안 할수가 없지..." 웨이터가 브랜디 잔을 탁자위에 올려놓는 소리에 민재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녀석, 아직도 그때 일을 자책하는 건가? 이래서 잘난 놈들은 싫다. 조그만 실수에 민감해서 는 - 물론 그 일이 조그만 실수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 그게 이미 시간 저편의 안개가 되어 넘어가 버린 후에도 이렇게 되새이고, 또 되새이는 것이다. "...아직도... 겁나는 거냐?" "..." 율은 대답하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다. 아직도 겁이 났다. 지금 이렇게 행복 하게 사는 자신이 사실은 꿈이 아닐까. 행복하게 사는 선유도, 행복하게 사는 민재도, 행복하게 사는 하진도 모두 꿈의 잔인한 환상이 아닐까. 사실 그때 선유는 죽은 게 아닐 까. ...사실 그때 나도 죽은 게 아닐까. 민재는 축 늘어진 율을 바라볼 뿐이었다. 더 이상 내가 무엇을 해 줄 수 있겠는가. 이 녀석을 원래대로 돌려 놓을 인간은 금선유 뿐인데. 하지만 정작 필요한 인간은 우라질 경주로 수학여행 가 지금쯤 헬렐레 팔렐레 꿈나라를 헤멜 것이다. 선유의 의도는 아니라지만, 그 잔인한 연출에 민재는 할 말을 잃었다. 벨렐렐렐렐레(역시나 핸드폰 소리입니다. ^^;;) 자신의 핸드폰이다. 민재는 플립을 열고 습관적으로 물었다. "여보세요?" -어, 민재야? ...하지만 더 이상 습관적으로 대답할 순 없었다. 선유였다. -민재야? 이민재!! 선유의 다그치는 듯한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민재는 정신을 추스리며 대답 했다. 이건 또 무슨 같잖은 우연이란 말인가. "선유? 이 시간에..." 율의 눈동자가 선유란 소리에 잠시나마 반짝였다. 그 조그만 변화는 놓치지 않고 본 민 재는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좀 웃기기는 한데...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나 아무래도 무당 될까부다. "쿡쿡... 그래. 박수무당이 되든 계룡산 도사가 되든 그건 니 마음대로 하고... 능력은 있는 것 같으니까. 아, 지금 율이 있어." -그래? 너네 이 새벽부터 뭐하냐? "율이 바꿔줄께." 민재는 선유에게 아무 설명도 없이 핸드폰을 율에게 넘겼다. 선유라면 설명도 필요없을 것이다. 쿡쿡... 율은 떨리는 손으로 가만히 핸드폰을 받았다. 그리고는 그것이 자신의 생명줄인 양, 꽈 악 움켜쥐고는,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선유에게 말을 걸었다. "선유야..." -율아? 뭐야, 너 목소리 왜 그래? "선유야..." -그래그래, 내 이름 선유야. 그건 나도 아는거고. 감기 걸린거야? "선유야..." -무슨 일이야? 원 율 너... "선유야... 선유야... 우욱... 선유야..." -율아!! ...그래, 괜찮아. 율아, 괜찮아. 괜찮아, 율아. 선유는 잠시 당황하다가, 곧 어루만지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율을 달랬다. FERRERO안에 있던 몇 안 되는 손님들과 웨이터들은 훌쩍대는 율을 토끼눈으로 쳐다보았 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싸늘하고 냉정하던 그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율은 선유 의 이름을 부르며 계속 울 뿐이었다. ...열녀 났네, 열녀 났어. 민재는 훌쩍대는 거구의 사내를 삐딱하게 쳐다보았다. 나 참, 꼭두새벽부터 불려나온 나 는 뭐냔 말야. 내가 램프의 요정이냐? 선유의 전화만 내놓고 사라지게... 율이 녀석은 핸드폰을 꼭 쥐고 - 절대 앙증맞다 생각 마라. 저건 깜찍의 도를 지나쳐 끔 찍스럽단 말이다 -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가끔씩 선유... 라고 중얼거리며. 눈가가 편안한 걸 보니... 금선유가 만병통치약이었던가? 저 녀석은 이제 집에 가서 - 혹은 우리집으로 쳐들어가서 - 두발 뻗고 편안히 잠들 것이 다. 하지만 민재는 왠지 잠이 깨 버렸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슬금슬금 자신의 몸을 기어오르는 이상한 느낌... ...걱정이다. 요즘들어 단순히 흥미 위주로 - 그것만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몇차례 깊이 고찰한 결과 흥미가 가장 많은 퍼센테이지를 차지한다는 것을 자인했다 - 지켜보던 선유와 하진, 율이의 삐걱거리는 운명의 궤도가...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어느 한 쪽에서라도 어긋나면 그것은 겉잡을 수 없을때까지 무너질 것이다. 자칫 잘못 건드린다면... 이들 셋의 운명은 그야말로 한치 어긋남도 없이 맛물려 서로가 서로를 증 오하며 보낼지도... 가능성이 아예 없지 않는 한...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선유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하진과... 자신은 아무래도 괜찮으니 선유만은 행복해야 한다는 율... 그리고... 열리지 않은 판도라의 상자... 열쇠이자... 자물쇠인... 선유... 웃기지도 않게 자신은 이들의 관찰자가 된 것이다. 과분하다. 정말인지... 잠든 율이녀석의 품을 뒤져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한숨을 내쉬며 민재는 하얗게 피어 오르는 연기를 바라보았다. all or noting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안녕하시어요, 소녀 karin이옵니다. 평안하시옵는지요. 그간의 부재로 인한 벌은 달게 받겠사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해요오~ ...으음, 마지막에 올린게 13일인가요? 1주일 만이네요. 어흥- 그동안 뭐 하느라 늦었냐고 제게 물으신다면... ^^;;;(침묵은 금... 이죠?) 14일날 수능 전야제로 엄청 마시고 수능 응원하러 새벽에 나갔습니다. 감기 걸리고 소 주 마시면 감기가 낫는데, 어째서 소주 마시고 추운데 나가면 감기가 걸리는 걸까요. 그 것도 댓발로... 게을 부린것도 있구요. 잘 놀고 왔습니다. 웅... 그렇다구... 잊으신거... 아니죠?(불안한 목소리) 아... 아니죠?(...) 우엥- 맞구나... 정신이 오락가락하니 별 쓰잘데기없는... 흠흠, 아무튼 정신을 추스리고... 오늘 한편 더 갑니다. 미워하지 마시어요.(필살! 가련포즈!! ...먹혔으면 좋겠는데.) karin (primblade00@yahoo.co.kr) 혹(眩) - 아찔하다 여행 셋째날 : 1)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2) 뼈와 살이 불타는 밤 3) 전격!! 라이벌전!!(하진의 입장에서는...) ---> 아무 제목이나 마음에 드는 걸루 고르십시오.^^ 사실 이 제 목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지만 말이죠. "야, 꺼내!! 꺼내!!!" "아직 좀 이른 거 아냐?" "이르긴 뭐가 일러? 괜찮아, 다 꺼내!!" 흠...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하라면... 저녁식사후 노곤한 몸을 이끌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방정맞게 술에 환장한 짐 승 한 마리, 그리고 그 파렴치한을 뜯어말리는 인간들... 이랄까? 우리학교는 다른 학교처럼 교관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 괜히 쓸데없는 훈련시키다 손 이라도 다치면 누가 책임질거냔 말이다 - 콘도에 자리잡았다. 바퀴벌레가 조금, 개미 떼거리가 조금, 그리고 틀때마다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에어컨이 한 대 있긴 하지만 그 런데로 쓸만한 방이다. 작은 냉장고도 있고, 가스레인지도 설치되어 있으니까. 몇일동안 정말 많은 곳을 돌아다녔고 - 무슨 심보인지 가까운 거리는 전부 걷게 만들었 다. 게다가 날씨는 또 얼마나 덥던지... 가는 도중의 막대한 에너지 손실로 인해 정작 문화제를 볼 때가 되었을 땐 피곤에 절어 눈에 뵈는게 없었다 - 그 때문에 선유는 심신 이 모두 지친 상태였다. 다른 인간들도 모두 선유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아니라면 저 초 인적인 체력을 가진 안성혁과 차단영, 양건우 정도랄까. 그 외 5명은 모두 씻지도 않고 엎어져 있는 상황이다. 오늘은 불국사와 석굴암에 보고 점심식사 후 버스를 달려 포항제철에 갔다. 가는 도중 에 바닷가도 들렸고... 나중의 뒷처리가 끔찍해 - 털어도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그 모래 들... 게다가 버스 기사 아저씨들, 의외로 쪼잔해서 옷에 모래묻은 사람은 앉지도 못하 게 한다. 당해 본 사람만이 아는 법이다 - 안 들어가려고 했건만, 이 빌어먹을 축생들 은 한시도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안 들어갈래." 라고 말하자마자 들쳐업고 바다로 직행한 것이다. 그리고 풍덩- 화가 나긴 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하고 재미있게 놀았다. 물론 그 뒷처리는 예상대 로 지겨웠지만... 하루종일 풀파워로 돌아다녔는데다가 저녁도 먹었으니 온몸이 나른하고 잠이 와야 분명 정상이건만, 안성혁 저 녀석은 무슨 자력강생제이라도 복용했는지 쌩쌩해서는 9시도 안 된 이 시각에 술을 찾는 것이다. 정말 빌어먹을 축생이 아닐 수 없다. "안성혁. 너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철면피냐? 지금 겨우 9시밖에 안 됐다. 그런데 무슨 똥배짱으로 술 꺼내라는 거냐." "으이구, 고지식한 넘들... 금선유나 한지성이나 고지식에 무융통성으로 막상막하라니 까. 야, 선생한테 걸려도 상관없어. 모르겠냐?" "...네가 드디어 학교를 포기한 모양이구나." "그래, 뭐... 머리가 안 따라주면 몸으로 때워야지. 어느 공사장에서 일하기로 했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성혁을 가지고 놀자 축생은 가슴을 치며 절규했다. 물론 신경쓰 는 사람은 없었다.(축생의 비애? -_-;;;) "으이구, 선생들도 다 안다니까!! 모를리가 있겠냐? 이렇게 너구리 굴을 만들어 놨는데 도 아무런 제제가 없잖아. 담배가 허용되었음 당연히 술도 허용되겠지." "너구리 굴?" 그러고보니 저 위로 하얀 담배 연기가 빽빽히 들어차 있다. 난 뭐하고 있냐고? 아까 말 하지 않았던가? 뻗어있다...(-_-;;;) 하긴... 저렇게 대놓고 피는데도 눈감아준다면 술이야 뭐... 하지만 역시 담배는... "담..." "담배 꺼." "??"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을 간발의 차로 먼저한 사람은 지성이었다. 너구리를 잡던 건우와 성혁, 그리고 단영은 - 이 녀석, 의외로 할건 다 한다. 하긴, 남자 고등학생 중에 담배 한 번 안 피워본 녀석이 얼마나 되겠냐만... - 지성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왜?" "선유 기관지 안 좋아." 지성의 말에 넘들은 재빨리 담배를 비벼 끄고는 창문을 열어 환기시켰다. 여름이지만 저 녁바람은 그런대로 선선해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점점 나른해 졌다. "너, 선유만 은근히 편애하는 거 알아?" ...양건우, 너 그렇게 쪼잔한 놈이었냐. 날 생각해준 지성을 위해 한마디 내뱉으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지성이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편애? 이런건 배려라고 하는 거다. 네 놈은 평생가도 모르겠지만..." ...점점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 그 한 마디에 건우는 지성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고, 지성은 건우의 따가운 눈초리 를 무시한 채 짐을 정리했다. 냉랭한 분위기- "애~ 들~ 아~!!! 술 마시자~~~!!" 팽팽히 당겨져 누구의 손에서든 조만간 끊어지리라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는 아니었 다. 들떠가지고는 대놓고 술 봉지를 이고 들어온 우희와 해민, 그 외 꾸밀데로 꾸민 - 어떻게 저런 차림으로 자겠다는건지, 대단하다면 대단한 여성들이다 - 여자얘들 몇몇의 왁지자껄함에 팽팽한 분위기가 느슨해졌다. 아니, 일부분만 그런거겠지만. 여전히 지성과 건우가 쥐고 있는 실은 팽팽히 당겨져 있으니까 말이다. 조금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그 이상은 내 소관이 아니다. 둘의 감정에 문제가 있으 니 둘이 알아서 하겠지. 선생이 알면서도 눈감아 준다는데, 한 모범 한다는 - 적어도 선생들 눈에는 - 인간들이 이렇게 바리바리 술을 싸들고 왔는데,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우선 위를 좀 달래주기 위해 맥주 캔을 땄다. 나머지들도 자리를 잡고 앉아 어느새 둥 그렇게 원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초반에는 좀 어색했지만 오버하는 성혁의 처절한 노력 에 힘입어 조금씩 분위기가 뜨기 시작했다. '난 술 못해' 라며 순진한 척 하던 여자얘 들이 - 모든걸 초월한 마녀 하우희만 빼고 - 소주병으로 병나팔을 불었으니, 할 말 안 할 말 다 한 거다. ... ... ... ... ... "그래서... 꺼흑- 술이라는 건 말야... 끄억- 이렇게 정신이 즐거운 상태에서~어~" 퍽-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성혁이 넘에게 펀치를 한 대 먹여 주었다. 취한 놈이 잠들지도 않 으니 뒷처리 하는 나로선 상당히 고역이다.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는 놈이군. "웃기지도 않는 주론(酒論) 펼칠 생각은 일찌감치 접어라. 시끄럽다. 소음도 공해의 일 부분이라는 걸 네 놈의 머리는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어? 어? ~~ 천~사~다~" "으악!! 이 미친새끼!!! 단영아!! 차단영!!" 갑자기 풀린 눈으로 날 멍하니 바라보더니 "천사다~" 하면서 얼굴을 부벼대는 저 망할 안성혁 때문에 질겁을 해야 했다. 다른 녀석들을 굴려 방으로 처넣던 단영이가 내 고함 에 놀라 달려와서는 성혁이 놈을 떼어놓았다. 술 마시면 기운에 세 진다더니, 확실히 근 거 있는 말이다. 무슨놈의 악력이 이렇게 세냔 말이다. 헤롱헤롱 거리며 그대로 엎어진 놈을 단영이가 방으로 굴려 이불 위에 올려놓았다. 저 짐승새끼도 친구라고 베개 주고 이불 덮어주다니... 차단영, 너 정말 된 놈이구나. 현재 시각 1시 30분. 모든 이들이 잠든 이 시간에 도대체 내가 왜, 어째서, 무슨 업이 쌓여서 저 녀석들 뒤치 닦꺼리를 해야 한단 말인가!!! 9시 가량부터 시작된 술판은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급기야 게임으로 넘어갔다. 지성이 는 일찌감치 뻗어서 건우가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갔고, 그 후 분위기 잡던 두 넘의 부재 로 치솟을 때까지 치솟은 분위기에 휘말린 인간들은 지 주량도 생각않고 마구마구 마셔 댄 것이다. 급기야 여자 애들 중 몇몇은 토하기까지 하고- 긴 머리카락에 토사물이 묻어선... 윽! 정말 엽기였다. 나중에 이성을 사귀게 된다면 자기 주량껏 마시는 여자를 고를 것이 다. 자기 몸 하나 간수 못하는 여자는 질색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희와 해민이는 통 과인 걸까? 두 녀석은 모두 멀쩡했다. 특히 하우희는 밑빠진 독처럼 들이붙는데도 왜 그리 멀쩡한지... 하우희의 신체 및 정신 적 부분에서 유일하게 부러운 부분이었다. -_-;;; 아무튼, 취해서 이성과 자아를 잃은 여자애들을 우희와 해민이 간신히 부여잡고 옮긴 것 이 방금 전이었다. 난 스스로 자제를 했기 때문에 - 위가 안 좋기 때문에 오늘 저녁 취한 후 아침 일찍 기 차를 타면 틀림없이 올라올 것이다 - 그럭저럭 정신을 붙잡고 있을 수 있었지만, 단영 이 저 자식은 주는 거 다 받아먹으면서도 저렇게 멀쩡하다니... 새삼스럽게 세상이 불공 평하단 생각이 든다. 남자녀석들도 여자애들 욕할 처지가 아닌지라 - 안성혁은 웃통까지 벗어던졌으니까 - 여 자애들이 가자마자 인사불성인 녀석들을 방으로 굴리고 과자 부스러기와 종이 컵, 병들 을 치웠다.(도대체 내가 왜 집에서도 안하는 뒷정리를 해야 하는지... 이 원수는 꼬옥 갚아주마. 흐흐흐... -_-+++) 환기 시키기 위해 닫혀있는 베란다 문을 여니 까만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의 탁 한 검정과는 깊이가 다른- 너무 깊어서 외경심마저 들게 하는 하늘이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단영이었다. "안 추워?" "조금." 그러고보니, 새벽이 되자 조금씩 한기가 밀려온다. 내 대답에 단영은 손에 들고있던 여 름 점퍼를 내밀었다. ...잠시 고민했지만 거절하면 호의를 무시하는 게 될 것 같아 받 아 입었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정말... 칠흑같은 밤이다. 내 이름은 서단영. 키 179 몸무게 73의 표준체격을 지닌 남자다. 자랑은 아니지만 미팅 에 나가면 뜨거운 눈길을 보내는 여성들이 다섯에 반 정도. 미술과 교수이신 양친때문 에 서양화를 전공하고 있고, 또 재능도 있단 평을 받고 있다. 능력으로 보나, 외모로 보 나 어디 하나 모자란 데 없는 완벽한 남성인 나의 현재 유일무이한 고민요소는 내 옆에 서 정신없이 밤하늘을 바라보는 클래스매이트 금선유. 술병을 버리고 오자 거실이 조용했다. 선유도 방으로 들어갔나 싶어 방문을 열어봤지만 선유는 보이지 않았다. 약간 조급한 마음에 베란다를 보자, 선유는 밤하늘을 고스란히 이고 있었다. 선유가 베란다에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짐에서 여름 점퍼를 꺼내들고 나도 베란다로 나갔 다. 여름 점퍼는 배낭 맨 아래쪽에 넣었기 때문에 짐을 다시 챙겨야 하겠지만, 아무래 도 상관없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지금은... 조금이나마 그와 시간을 공유하고 싶 다. 조금 추워보이는 선유에게 점퍼를 건네주자 약간 망설이더니 받아들었다. 그런 점도 좋 아... 남에게 신세지는 걸 죽도록 싫어하는 그 자존심도... 어째서 동성인 그를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확실히 대답할 수가 없 다. 그를 좋아하는 게 당연하게만 생각되는 것이다. 이렇게 당연하게 생각되는 이유 가... 네가 나의 운명이어서라면... 얼마나... 얼마나 좋을까... 선유는, 순결하고 드높은 자존심의 선유는 아마 나의 추악한 생각을 모르겠지. 그는 아름답고, 아름다운 만큼 순수하고, 순수한 만큼 자존심이 세다. 손해보며 사는 사 람의 전형이라고 해야 하나? 삐걱대는 그의 말투 뒤에 쑥쓰러운 그의 배려가 담겨 있다 는 걸 눈치챌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고, 싸늘하고 냉소적인 그의 아름다운 미소 뒤에 울 상짓는 어린아이가 숨겨져 있다는 걸 깨달을 사람은 열의 하나도 안 될 것이다. 누구보다 상처입기 쉬운데도 출처모를 그 자존심으로 자신을 완벽하게 무장하고 모든 아 픔을 홀로 겪어내는 것이다. 환한 미소에 사람들은 현혹되겠지만... 정작 그 뒤의 고통 은 알아채지 못하겠지. 정말... 손해보며 살 사람이다. 내가 그의 고통을 어루만져주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나를 희생해서라도 그를 지키겠 어. 그가 나를 받아들여 주기만 한다면... 선유도, 나도, 밤하늘을 쳐다보며 어떠한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슬그머니 그의 옆모습 을 바라보자 달빛과 밤하늘에 도취된 그의 황홀한 눈빛이 느껴졌다. 선유야, 나를 봐 줘. 칠흑같은 어둠이 아니라, 은은한 초승달이 아니라 바로 날 봐. 선유야, 나를 봐. 선유야, 나를 봐. 선유야, 나를 봐. 선유야, 나를 봐. 선유야, 나를 봐. 선유야, 나를 봐. 선유야, 나를 봐. 선유야, 나를 봐. 선유야, 나를 봐. 선유야, 나를 봐!!!!!!! 마음속에서의 외침이 점점 극에 닿아 차마 입밖에 내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가 되었을 때, 선유는 내 손에 잠바를 건네주고는 "들어간다" 하고 짧게 내뱉었다. 베란다 문이 열리며 그는 우리만의 공간에서 현실로,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이동해갔다. ...아직은 아닌가보다. 아직은 때가 아닌가봐. 내 손에 들린 점퍼에서, 희미하게 선유의 냄새가 났다. 그만의 달콤한... 체취... 나는 죽을때까지 이 점퍼만을 애닯게 쳐다볼지도 모른다. 아니겠지... 아니겠지 선유 야... 몸이 한기를 느낄 때까지, 그렇게 장승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잔영이 사라질 무 렵, 나도 몸을 돌려 우리만의 공간을 빠져나왔다. 그곳은 더이상 현실과 차단된 우리의 공간이 아니라 다만 하얀색 타일의 베란다일 뿐이었다. ...선유야,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어... ...내가 너를 상처입힐지도 몰라... ...기다리게 하지 마... ---------------------------------------------------------------------------------- 안녕하세요, karin입니다. 어제 하나 더 올리겠다고 했는데... 죄송... 꾸벅-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karin (primblade00@yahoo.co.kr) 혹(眩) - 아찔하다 "싫어." 내 대답은 정확하고 거침없으며 또한 명료하고 직설적이었다. 그런 내 대답에 그들은 또 다시 물어왔다. "왜 싫은데?" "첫번째, 더운건 질색이야. 두번째, 커다란 사내놈들이랑 쭐래쭐래 움직이는 것 또한 질색이야. 세번째, 혼자가는 여행이 아니라면 나에겐 별 의미가 없어. 네번째, 피서가는 것보단 집에서 에어컨 켜고 빈둥빈둥 쉬는게 내 취향에 맞아. 다섯번째, 방학동안 신인미술대전에 낼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 다섯개의 이유를 줄줄히 열거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짝 올라간 입꼬리라던가 조금도 변하지 않는 얼굴색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은 전혀 포기할 의사가 없는 것 같다. 친절한 나는 좀더 세밀한 사항들을 하나하나 열거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입에서 나올 내용을 뻔히 안다는 듯, 말을 끊어버린 저 녀석들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나저나, 왜 저렇게 히죽 웃는 걸까?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안 갈수가 없어." "왜? 피서를 가고 안 가고는 내가 결정할 일인데. 정당한 이유를 대 봐." "피서가 아니라 휴양 명목이야." "...뭐?" "어머니께 그곳을 너의 휴양지로 적극 추천했거든. 건강관리를 소홀히 한 탓에 요즘 천 식끼도 있고 몸이 말이 아니잖아? 공기좋은 시골에서 한동안 요양하는게 좋지 않겠냐고 여쭤보았지. 아, 물론 어머니께선 대찬성이셨고 니가 원하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너 를 보내겠다고..." "젠장할, 이 자식들아!!! 그럼 애초에 왜 물어봤냔 말야!!!" "그거야 당연히 너의 의사를 존중하기 위해서지. ^^*" "썩을, 이민재에~~~" ...정말 살인적인 날씨다. 누가 여름같지 않다고 투덜대기라도 했는지 - 그런 인간이 있 었다면 기필코 잡아다 다리몽둥아리를 자근자근 분질러 주겠다 - 더위는 날마다 업그레 이드되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프레온 가스때문에 오존층이 파괴되어 지구가 온실화되 고 있다는 게 사실인가보다. 매년 기온의 한계점이 높아지니 말이다. 평생을 바쳐서라 도 프레온 가스 타도 운동을 벌이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드는건 이 빌어먹을 더위 때문이겠지. 그나마 여름방학이라 집안에만 있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집안은 에어컨으로 쾌적 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깥은 그다지 쾌적해 보이지 않는걸. 쾌적은 커녕 땡볕더위를 과시하며 유감없이 불타오르고 있다. 얇은 유리창 하나를 가운데 두고 안과 바깥의 차이가 정말 대조되는 것이다. 서늘함을 즐기며 더위를 바라보고 있는게 아이러 니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게다가 저 더위 속으로 돌진할 것을 생각하니 한숨밖 에 나오지 않는다. 젠장할!! 얼마 전 삼인조 녀석들이 정중하게(?) 여름 피서 참가를 요청해왔다. 고모님 내외분께는 명목상이나마 휴양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요즘 몸 관리를 소홀히 했더니만 저 혈압과 천식끼가 나타났는데, 삼인조 녀석들이 그런 나를 공기좋고 물좋은 곳에서 요양 시켜야 한다며 고모님을 설득한 것이다. 사실 별것도 아니지만, 건강에 관해서라면 어 떤 사소한 일이라도 불타오르는 고모님 덕분에 이렇게 맘에도 없는 요양(?) 준비를 하 고 있는 중이다. 뭐가 내 건강을 위해서라는 거야!! 저혈압인걸 알면서도 꼭 이런 꼭두새벽 - 방학중엔 오후기상을 당연시하는 나에게 있어 오전 9시는 한참 새벽이다 - 에 깨워 짐까지 챙겨 야 하냔 말이다. 젠장... 챙길것도 많네. 귀찮아. "선유야, 하진이랑 율이 왔다!!!" "네, 네, 네..." 아무렇게나 대답하며 창문 너머로 내다보니 과연 검은색의 커다란 중형차가 대기중이 다. 9시 정각에 도착이군. 이 넘들에게는 코리안 타임이란 말도 없는걸까. 내심 투덜대 는 것은 아직 준비가 덜 끝났기 때문일 것이다. 7시부터 계속 깨우는 민재를 무시하며 잤더니만 겨우 일어나 정신을 추스린 것이 20분 전이었는데, 습관적으로 시계를 보다 시계바늘이 이상한 곳에 가 있자 놀라 일어나버렸 다. 지금은 겨우 샤워를 마치고 물기를 닦은 상태. 결국 약속시간이 다 되었음에도 불구 하고, 준비 미완료라는 말이다. 아래층에서 들리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다급해진 선유는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털어 물기 를 빼고 흘러내리는 머리를 손으로 대충 휘저었다. 곧 얇은 베이지색 긴바지에 하얀색 면티와 남방을 걸친 심플한 - 사실 옷 고르기가 귀찮아 대충 아무거나 주워입은 것이다 - 차림으로 외양은 그럭저럭 준비를 마쳤건만, 문제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직 짐을 챙기지 않았다. 아래층에서 다시 고모님의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유야, 애들 기다리잖니!!" "네, 네, 잠깐만요!! 잠깐만!!" 아무래도 기다리다 지친 모양이었다. 아래층에서 "저희가 올라가 보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짐 챙기기에도 바빴던지라 한 귀로 흘려버렸다. 곧 방문이 열리며 삼인조 녀석들이 들어왔다. "금선유, 뭐 하고 있길래 안 내려오는거야?" "짐 챙기고 있다." "뭐? 너 아직까지 안 챙겼단 말야!!" "시끄러. 아무거나 옷 좀 알아서 챙겨봐." 짐도 챙겨놓지 않고 뭐했냐며 쭝얼대는 민재에게 커다란 배낭 하나를 던져주었다. 민재 녀석, 보기보다 꼼꼼해서는 속옷이며 수건이며 세면도구까지 알아서 잘 챙길 것이다. 잠 시 율이녀석까지 달라붙어서 자신의 옷을 챙기는 모습을 본 선유는, 곧 몸을 돌려 다른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제 저녁엔 뭘 하고." "몰라. 아악, 젠장!! 정신이 하나도 없어!!"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짜증을 내는 선유의 모습을 보며 하진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몇일 동안 마음껏 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모르는 사람과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가 모 르는 추억을 쌓아간다는 조바심에 떨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선유는 요즘 독립운동(-_-;;;) 이라도 벌이는 것인지 자꾸 우리를 - 정확히는 나를... 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만... 아직 은 아닌 것을 알기에 아껴둔다 - 이탈해 학교 친구들이랑 시간을 보낸다. 어찌보면 아무일도 아닌데... 그런 작은 일에도 내가 이리 민감해 지는것은... 역시 확신이 없기 때문일까. 그가 나의 것이라는 확신. 그렇게 만들 자신은 있다. 몇십년이 걸리더라도 그렇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되도록이면 빨리 그가 날 바라봐주길 바란다. 이렇게 뒤에서 숨죽이고 있는 나를. 선유가 미술도구를 챙기는 모습을 바라보며 하진은 잠시 선유의 여행 차림을 감상했다. 입가가 계속 벌어지는 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대충 미술도구를 챙긴 선유는 소설책을 챙겼다. <폭풍의 언덕>,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마농 레스꼬>, <춘희>. 몇 가지 고전을 챙기고 나선 책방에서 빌린 판타지 계열의 소설과 만화책도 아무렇게나 가방에 던져넣었다. 곧 게임기를 챙기기 시작했지만 플레 이 스테이션 2를 통채로 들고왔다는 율이의 말에 내려놓고는 게임 씨디 몇개만 가방 앞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대여섯 개의 CD와 함께 CDP를 가방으로 밀어넣고 이어 폰을 꺼내 귀에 꽂았으니 준비 완료라는 의미이다. 큰 나무 이젤과 몇개의 캔버스를 든 선유의 손에서 그것들을 받아든 하진은 계단을 내려갔다. 이젤과 캔버스를 트렁크에 실고 나니 나머지들도 짐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선유는 고모 님께 안녕히 계시라는 진심어린 인사말을 드렸고, 고모님께서는 답례로 선유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먹을 수많은 명약(?)들을 선사하셨다. 선유는 얼굴을 약간 찡그렸으나 결 국 그 약을 전부 받아 차에 실었다.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청록의 싱싱한 입사귀들이 태양의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 나는, 완연한 청춘의 계절 - 여름. 바야흐로 피서(避暑) 시작이다. ---------------------------------------------------------------------------------- 헤헷, 짧죠? ...용서를. 투다다다다다다다닥~ 혹(眩) - 아찔하다 지금껏 나를 조금이라도 지켜본 사람이라면 내가 심신을 피곤하게 하는 걸 얼마나 싫어 하는지 - 무지몽매한 넘들은 게으르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것은 좀 더 심오하고 심각한 내용이다 -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내가 이 여행을 반가 이 여기지 않는다는 것도 말이다. 그렇긴 하지만, 처음 나섰을 때 상상했던 것보다 나의 여정은 훨씬 즐거웠었다고 나 스 스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애초에 에어컨 빵빵한 자가용 승용차로 움직였는데다가 도심을 벗어날수록 짙어지는 신록의 상쾌한 느낌은 나로 하여금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 고 창문을 열게 만들었다. 자연이란 아름답고도 위대한 것이다. 순수하고 정열적인 여왕 이 청춘을 만끽하는 이 계절에 심취한 나는 상당히 지루한 자동차 안에서의 시간을 쉽 게 보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까워 객관적으로 판단하자면 지금까지 내가 했 던 자동차 여행 중 가장 낳다고 생각되지만... 생.각.보.단. 낳다- 라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바로 저 세 녀석의 찝찝한 행동 때문이다. 마치 약자를 보호하는 것 같은 그 세심한 배려와 챙김들. 인스턴트 음식이 내 몸에 좋지 않다며 집에서 직접 도시락을 싸왔다는 율이를 비롯해 흔들리는 자동차에 머리가 아파 잠시 눈만 감으면 쉬었다 가자며 차를 세우는 하진, 목이 말라 음료수를 마 실라치면 "찬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시면 건강에 나빠" 라고 끊임없이 건강에 대한 나의 무신경한 태도에 대해 잔소리하는 민재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친구사이에 하는 짓이 아니다. 예를 들어 하진이 몸을 생각해 집에서 도시락까지 운반해 올 율이가 아니며, 민재가 차안에서 눈 좀 붙이면 과잉반응을 보이며 차까지 세울 하진이 아니며, 율이가 찬 음료수를 벌컥 마신다 해서 건강지식을 듬뿍 안겨줄 정도로 투철한 민재가 아 닌 것이다. 틀림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겠지. '왜' 서로에게 신경쓰지 않냐고 내가 묻는다면 그들은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스스로도 못 챙기는 놈은 내 친구될 자격이 없어." 그들이 나를 생각하고 위해주는 건 정말 고맙다. 세상에 태어나 진정 '친구' 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을 하나라도 만난다면 그 사람은 성공한 거라고, 언젠가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렇게 치면 난 지금 진정한 친구를 세명이나 가지고 있는 것이다. 소심하고 의심 많고 짜증만 잘 내는, 어찌 보면 친구로서 가장 부적합한 나를 추스려주고 아껴주는 고 마운 놈들이다. 평생을 다해서라도 저 녀석들의 진심어린 우정을 갚아나가고 싶다... 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마치 나를 약자로 취급하는 듯한, 그들의 울타리속에서 보호하 는 듯한 이런 느낌은 정말 싫다. 나는 그들과 동등한 친구로 취급받고 싶다. 그들이 서 로를 생각하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생각되고 싶다. 친구로서의 적당한 배려나 적당한 걱정은 고맙지만... 나를 '지켜주어야 할' 무언가로 본다는 건 그들을 동등한 친구로 생 각하는 나에게 있어선 엄청난 치욕이자 모욕이다. 같은 남자로서 뒤쳐져있다는... 이성과 감정이 뒤섞인 모멸감과 수치심이 나를 뒤덮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 그들은 '동등하고픈 친구' 이기에. 쓸데없이 따진다는 생각도 든다. 나같이 성격 나쁜 놈, 챙겨주는게 어디냐는 생각도 든 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인 '친구'라 해서 적당히 끼 워맞춰 갖추고 싶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중요하기 때문에 적당히 할 수가 없다. 어쩌면 내가 자격지심에 과잉반응하는 것일수도 있다. 그래... 아마 그럴것이다... 나는 이 여행을 되도록 즐겁게 지내고 싶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곳은 강원도 어느 산골. 지리와 담쌓고 사는 나로선 여기가 어딘지 정확한 지명은 모 르겠다. 하지만 경치가 아름답다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와아~" 선유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한발짝 내딛었다. '그림 같은 정경' 이란 이 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거다. 조그만 오솔길을 따라 좌우로 사과나무 몇이 심어져 있었 고, 때마침 사과꽃이 만개해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향긋한 사과 꽃내음에 취하는 것을 느끼며 선유는 미술학도답게 눈앞의 집을 꼼꼼히 감정했다. 흰색 페인트로 칠해져 이탈 리아의 집처럼 햇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여름 별장은 동서양의 양식이 가미되 우아하 고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내었고, 그 뒤로는 하늘까지 뻗은 대나무와 보드라운 죽순이 빽 빽히 들어차 있었다. 전후좌우 모로 보나 자연스럽고 고풍있는 멋을 풍기는 그 치밀한 구조에 선유는 감탄을 서슴치 않았고, 그런 선유를 보며 하진은 즐겁게 소리쳤다. "근처에 계곡도 있고, 온천도 있어. 차 타고 조금 나가면 바다도 있고." "그럼 뭘하냐. 금선유 저자식은 움직이지도 않고 여기 틀어박혀 있을텐데." 민재가 투덜대며 자신의 짐을 별장 안으로 옮겼다. "너네만 갔다 오면 되지. 니가 어린얘냐? 한꺼번에 쭐래쭐래 다니게." "나도 그러고 싶지만 남궁하진이나 원율 자식들이 안 따라주니 그게 문제지." 조그맣게 꿍얼거리며 들어가는 민재를 보며, 선유는 잠시 눈을 감고 스스로를 추스렸 다. 그리고 민재를 따라 들어갔다. "오~ 돈 좀 들였겠는데~!!" 장난스러운 어투로 민재가 감탄했지만, 비꼬는 게 아니라 사실이었다. 깔끔한 구조로 꾸 며진 내부는 세개의 방과 거실, 조그만 부엌, 욕실, 베란다로 이루어져 있었고 왠만한 집보다 인테리어나 구조 면에서 훨씬 정교한 미를 자랑하고 있었다. 짐을 대충 정리하자마자 민재가 선유에게 달라붙었다. "선유야, 우리 계곡 가자." "너희끼리 다녀와. 난 여기 있을란다." "선유야아~" 선유가 알던 모르던 율이나 하진은 그와 행동을 같이 할 것이 분명했기에 민재는 냉담 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계속 선유를 꼬셨다. 처음엔 냉담한 반응을 보이던 선유였지만 끈 질긴 민재의 꼬임에 넘어가 - 사실 귀찮았다고 보는게 더 정확하겠지만 - 결국은 체념했 고, 그 즉시 수영복을 챙겨 계곡으로 향했다. 싫다고 투덜대면서도 발걸음이 가벼운 것 은 선유 또한 나름대로 들떴기 때문일 것이다. "와아~ 맛있겠다!! 잘 먹을께, 민재야 ^^*" "그래라, 이 소도둑놈아." 기껏 착실히 잘 먹겠다고 인사까지 했는데, 민재넘은 툴툴거린다. 아무래도 자신이 이 번 휴가기간동안 모든 가사일을 떠맡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드나보다. 민재의 본능 이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치하하며 - 그가 느낀 불길한 예감은 아.마. 도. 맞을 것이므로 - 선유는 자신의 앞에 차려진 카레밥을 바라보았다. 민재넘이 할 줄 아는 음식이래야 봤자 라면, 국수, 카레, 오무라이스, 주먹밥 다섯가지인데, 아무래도 그 다섯 요리를 번갈아가며 먹을 것 같다. 인간의 역사상 수많은 산해진미가 만들어졌건 만 겨우 카레밥에 기뻐해야 하는 처지가 불쌍하긴 하지만, 사실 선유로선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라면도 못 끓이는 넘이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나를 '형제(사촌도 넓은 의미에서는 형제 아니겠는가)를 구박하며 자신 은 놀고먹는' 극악무도한 놈으로 매도하지 말아라. 저 녀석이나 나나, 요리를 배우기 시 작한 건 같은 시기였다. 단지 저 녀석이 느리게나마 착실히 실력을 향상시켰다면, 나는 어찌된 일인지 요리와는 인연이 없어서 지금까지 '인간의 요리 범주에 들어가는' - 민재 의 평가였지만, 나로서도 이 이상 나은 평가는 차마 못 할 것이다. - 요리다운 요리를 만들어 본 적이 없다. 라면을 예로 들자면, 내가 끓이면 맛에서나 모양에서나 우동의 유 사품이 되는 것이다. 나조차도 입에 대고 싶지 않는 음식이었다. 그나저나, 이 넘들은 야수도 아닌 것이 어째서 먹.을.때.만. 얌전한건지... 뭐, 나로선 좋은 일이다. 이쯤에서... "선유야, 너...!!!" "이런, 이런, 이런..." 들켜버렸다. 밥을 좀 덜려고 했을 뿐인데, 민재의 한 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따갑다. 이 봐들, 내가 무슨 살인죄라도 지은 것 같잖아... 스마일, 스마일. 하지만 나에게도 할말은 있다. 민재 녀석, 날 살찌워 잡아먹으려는 속셈인지 밥을 그릇 위까지 수북히 쌓아서 꼭꼭 눌러담아주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오기 전에 고모님의 특명 을 전수받은 것 같아 심히 마음이 괴롭다. 게다가... 아까 눌러버렸던 '어떤 생각' 이 마음속 벽을 타오르는 것 같다. "...선유야, 그거 먹고 어떻게 사냐." 율이가 내 밥그릇을 지긋이 넘보더니 한마디 하였다. 하지만 원 율, 네가 모르는게 있는 데... 난 너희처럼 위.대.한.(한문의 뜻은 알아서 해석하도록. 인간의 두뇌를 가진 자라면 내 의도를 해석하고도 남을 것이다) 짐승이 아니란 말이다!!! 잠시 율이를 향해 무언의 항변을 하고 있는 틈을 타 민재가 다시 덜어내었던 밥을 내 밥 그릇에 얹었다. "이민재, 나 이거 다 못먹어." "니가 무슨 계집애냐? 너 다이어트해?" "...지금 나랑 장난하냐? 내가 왜 비싼 밥 먹고 그런 짓을 해?" "그럼 뭐하자는거냐? 기껏 밥 해놨더니만 깨작깨작하면서 이젠 밥까지 덜어내?" ...아무래도 저 녀석, 내 건강 걱정이 아니라 밥 남을 걱정하는 것 같지? 괘씸죄를 적용 시키고 싶군.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민재를 애써 무시하고 다시 밥을 덜어냈다. 민재는 또 질새라 밥 을 얹었다. "그만해, 이민재. 내가 먹을 양은 내가 잘 알아." "웃기지 마. 니가 먹는대로 놔두면 너 또 난리나." "내 몸은 내가 더 잘알아!!" "니 몸을 가장 모르는 사람이 바로 너야!!!" "이.민.재!!!" 아무래도 반응이 조금 세게 나갔나보다. 민재와 나의 격해진 말에 하진이 나를 잠시 쳐 다보더니, 곧 달래는 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선유야, 그 정도는 먹어놔야 몸이 제대로 돌아가." "남궁하진, 애 달래냐?" "선유야. 화 내도 괜찮으니까, 우선 밥부터 먹자." 아아, 뭐란 말인가. 지금 내 꼴이란... 정말 내가 봐도 칭얼대는 꼬마 수준이다. 왜 이렇게 전락한거지? 이 상황을 만든게 나일까... 저 놈들일까... "...정말 싫구나." 이게 뭐하는 짓인지 나도 모르겠다. 기껏 좋자고 놀러와서는 이 썰렁한 분위기는 무엇인 지. 그 분위기를 주도한 사람이 나라는 사실도 기가 막히다. 내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어쨌든 주범은 나이지 않은가. 아아, 밥투정 한번 부렸다가 사람 여럿 잡겠군. 세 녀석 다 묵묵히 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걸 보자니 한심한 기분이 든다. 왠지 이 녀석들과 나의 관계가 이렇게 된 건 내가 자초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와 이 녀석들 의 관계는 아무래도 단순한 친구의 관계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먹어." "뭐?" "먹는다고. 니들 말대로 건강해지려면 밥 먹어야지. 하루바삐 건강해져서..." 니들이랑 맞먹어야지... 뒤로 선유가 무언가 중얼거렸지만 삼인조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다행히 고집불통 금선유 가 - 민재는 '사소한 일에 목숨건다' 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 왠일인지 마음을 바꿔 다 시 숟가락을 들었다는데 안도하며 자신들도 열심히 수저를 입으로 옮겼다. 선유도 묵묵히 밥을 넘겼다. 입안에서 까슬하게 느껴지는 밥을 꾸역꾸역 넘기자니 목이 매였지만, 아무 내색하지 않고 열심히 삼켰다. 만약 이들이 이렇게 자신을 '약자' 로 취 급하는 이유가 건강 때문이라면, 억지로 먹어서라도 건강해지겠다. 인정하긴 싫지만 이 곱상한 외모 때문이라면, 머리를 빡빡 깍아서라도 남자답게 보이겠다. 그게 안 되면 고 등학교 졸업 즉시 군대에 자원입대라도 할테다. 지금 이 녀석들이 날 동등한 친구의 입장으로 보지 않고 있다면, 그 삐뚤어진 눈깔을 뽑 아서라도 다시 제대로 박아주겠다. 두번다시 저렇게 '애 다루는듯한' 말이라든가 '넘쳐 흐르는' 걱정따윈 하지 못하게 해주지. ...그러나 선유의 원대한 포부를 담은 그날 저녁은, 선유가 억지로 먹었다 체하는 바람 에 모두 올리며 하루저녁 늦춰졌다. 선유로선 통탄할 일이었다. ^^;; karin (primblade00@yahoo.co.kr) lark님 저 착하죠^^;;;;;; 혹(眩) - 아찔하다 "유야... 선유야..." "졸려..." "선유야, 일어나. 점심은 먹고 자야지." "싫어..." 귓가에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가 살며시 울려퍼진다. 한없이 부드러운 그 목소리에 어 리광을 부리듯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부벼댔다. 선유는 깔끔한 시트에서 나는 레몬 향기 를 맡으며 깊은 잠의 나락에 빠져들었다... 잠결에 얼핏 들은 로우톤의 목소리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잠들었던 것도 같다. 엊저녁 삼인조들과 새벽 3시까지 놀았던지라 피곤했기에 일어나라는 목소리를 무시했단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렇게 버려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일어나보니 별장 안은 사람의 부재로 인해 정적에 쌓여 있었다. 처음엔 잠깐 나갔겠거 니 하고 맘 편히 기대렸는데 그게 벌써 30분이었다. 결국 녀석들이 자신을 내팽겨치고 놀러나갔다- 고 결론지은 선유는 잠옷바람으로 침대를 나섰다. 아침도 점심도 굶었더니 배에서 요동을 쳐 대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입맛은 없는 것 같았다. 강렬한 생존본능에 의해 세수도 않은 채 부엌으로 들어갔지만 - 당연하게도 - 부엌은 깨 끗했다. 아니, 깨끗하다 못해 황량하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 식탁위에 하얀 메모지에 는 싸가지라고는 약에 쓸래도 찾아보기 힘든(자다 일어나 말투가 험하다... 라는 건 변 명이겠지? ^^;;;) 이민재가 저다운 말만 지껄인 흔적이 있었다. <금선유. 우리 너 깨우다가 지쳐서 그냥 우리끼리 나간다. 알아서 밥 차려먹어.> 알아서 밥 차려먹으라고 하면 내가 먹을 놈인가... 이민재군에게 이런 순진한 - 금선유의 본성을 잘 모른다는 점에서 - 면이 있었군, 하고 비웃으며 발걸음을 돌려 다시 방으로 가려는데 냉장고에도 메모지 한 장이 펄럭이는게 보였다. <우리 올때까지 밥통의 밥이 가득하다면 너 집에 갈때까지 밥 구경은 다 한 줄 알아. 냉 장고에 반찬 있다. 참, 식탁위에 있는 알약들도 다 먹어치워. ^^> ...이민재란 녀석을 너무 과소평가 했나보다. 그 녀석이 순진할 리가 없는 것이다. 이렇 게까지 했는데도 밥을 안 먹는다면 내가 아는 이민재의 성격상 틀림없이 삐질 것이다. 먹긴 먹어야 겠다만... 협박조의 문장이 맘에 안 들어서 점심은 관두기로 했다. 오기 전 까지만 먹으면 되겠지, 뭐. 집안은 조용했다. 그 우울하면서도 편안한 정적에 선유는 희한한 안도감을 느끼며 거실 소파에 앉았다. 오랜만에 혼자하는 시간이었다. 책이라도 볼까 했지만 갖 일어나서인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하얀 벽면에 빛이 부딫쳐 잘게 바스라지는 태양의 유희 를 몽롱한 눈으로 지켜보던 선유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창문을 넘어선 빛이 선유의 몸을 구석구석 간지럽히고 있었다. 태양이 중천에서 빛을 발 하고, 신록은 여전히 푸르름을 뽐내며, 대기의 왕성한 기운이 이리로 저리로 쉴새없이 달음박질한다. 젊음과 충전된 힘의 계절임을 하늘과 땅과 지구상의 모든 입자가 드러내 고 있었다.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그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눈을 감았지만 졸립지는 않았다. 아 무래도 다시 잠드는 건 그른 것 같다, 는 생각에 선유는 눈을 떴다. 밝은 허공에 먼지 가 떠다니고 있었다. 먼지를 잡아볼까... 손으로 조심스레 허공을 저었다. 하지만 먼지란 놈은 생각보다 쉽게 잡히지 않는다. 처 음엔 심심풀이로 하던 것이 자꾸 손안을 빠져나가니까 열받아서 집중하게 되었다. 하 나, 둘... "뭐... 하는 거냐?" 자신만의 공간임이 분명했던 곳에 타인의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선유는 화들짝 놀라서 고 개를 돌렸다. 하진이 양 옆에 비닐 봉지를 내려놓은 채 서 있었다. 벽에 기대어 팔짱까 지 낀 것을 보면 지금 막 들어온 게 아닌 듯 싶다. 문득 자신이 하던 일이 생각난 선유 는 얼굴을 돌렸다. 혼자 있다고 생각했기에 아무런 자각없이 했지만 아무래도 남에게 보 여주기에는 쪽팔리는 짓이다. 지금 자신의 얼굴은 틀림없이 빨개졌을거다 . "소리도 안 내고 들어오다니, 니 놈이 고양이냐."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괜시리 핀잔을 주었건만, 저 실없는 녀석은 기분 나쁘지도 않은 지 쿡쿡거리며 웃어댄다. 얼굴이 더 붉어진 선유는 옆에 있던 쿠션을 들어 하진의 얼굴 을 겨냥해 던졌다. "웃지마, 짜샤." "쿡쿡... 고양이같은 건 내가 아니라 너야. 고양이가 그 짓 잘 하잖아? 허공에 대고 발 저어대는거..." "빌어먹을, 남궁하진!!!" 이제는 드러내놓고 웃는 하진의 능글맞은 얼굴을 표적삼아 다시 한 번 쿠션을 - 강도와 속도는 두배로 - 던졌지만 녀석이 피하지 않아도 쿠션이 알아서 피해간다. 젠장할, 갑자 기 일어섰더니 눈 앞이 뿌옇게 아리아리했다. 약간은 불안정한 그 느낌을 즐기며 잠시 시력의 회복을 기다렸다. 하진은 걱정이 되었던지 빠른 걸음으로 옆에 다가와 선유의 한 팔을 붙잡았다. "너... 밥 안 먹었지?" 끄덕- 자신도 예상한 당연한 대답일텐데,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얼굴이 굳어서는 나를 뭐마냥 부엌으로 끌고갔다. 지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많은 잔소리를 동반하면서. "민재 녀석 말이 맞았지. 메모를 두 장이나 써 놨는데 아직까지 밥도 안 먹고..." "그 녀석들은?" "나만 먼저 온거야."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나를 의자에 앉히고 아침에 민재녀석이 챙겨놓았을 음식거리를 이 것저것 꺼내 내 앞에 늘어놓았다. "배 안 고픈..." "잔말 말고 먹어." ...박력에 밀린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는 게 슬플 뿐이다. 내 앞에 반찬을 늘어놓은 하 진은 돌아서서 가스레인지에 불을 지폈다. 국을 덥히는 그의 익숙하지 않은 듯한 뒷모습 에 왜 뿌듯했냐고 묻는다면, 나도 대답할 말이 없다. 나도 모르겠는걸... "하진...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하진아!!! 하진아!!! 하진아아아아!!!!" 그의 감긴 두 눈은 굳게 닫힌 채 뜰 생각을 않고 있었다. 검고 긴 속눈썹이 죽음의 휘장 처럼 드리워졌다. "안돼!!!! 하진아, 눈을 떠!!!"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저 녀석이 저렇게까지 잠들다니. 내가 원맨쇼를 부리건 말건 개의치 않고 여전히 잠들어 있다. 상황에 어울리게 연출을 좀 해 봤는데, 마음에 드셨는 지?(...누구한테 말 거는 거냐? ^^;;) 아무튼, 이건 정말 희귀한 일이다. 나야 언제나 엎어지면 잠들고 잠들면 누가 업어가든 말든 절대 모르는 평범한 인종이지만, 저기 잠들어있는 남.궁.하.진. 이란 녀석은 레테 강을 열두바퀴 돈다고 해도 절대 그럴 녀석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잠 을 깨던 녀석이 저렇게까지 깊이 잠들다니. 흠... 나로선 모처럼 녀석을 감상할 기회가 생긴 셈이다. 항상 내가 먼저 잠들고 녀석이 먼저 깨니까 당연히... 그렇다고 해서 나를 너무 게으름뱅이처럼 생각하진 말아 주시길. 단 지 저 녀석이 초인적일 뿐이니까. 흐음... 그나저나,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어디 하나 흠 잡을데가 없는 녀석 이다. 여자들이 이 녀석에게 목 매는 것도 이해가 될 정도로. 수컷중에서도 최상급의 수 컷이겠지. 진한 밤색의 머리칼은 생각보다 가늘다. 여자의 머리카락정도로 생각하면 될 정도로. 밤 색의 피부는 건장한 체격과 어울려 약간 섹시하기도... 평소엔 좀 무섭게 보이는 눈이지 만 저렇게 감고 있으니까 어려보이다. 콧날과 턱선은 베일 정도로 날카롭게 생겼고... 전체적으로 얇은 입술은 키스하기 딱 좋게....!!! "미쳤어. 미쳤어, 금선유. 너 욕구불만이냐? 으아아아~"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나 혹시 변태 중에서도 상변태가 아닐까? 숨겨진 본성이 지금에서야 들어나는 거냐구!!!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동성의 친우를 보 고 그딴 생각을 하다니, 내가 잠시 해까닥 돈 모양이다. 그치만 그래도 키스하기는... "으아아악!! 그치만은 무슨 그치만이야!!! 죽어, 금선유!!!"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뜯으며 붉어진 얼굴을 가라앉히기에 여념이 없는 선유였다. 이 얼 마나 우스운 꼴이란 말인가. 만약 민재나 율이가 지금의 날 보았다면 비웃느라 하룻밤 을 꼬박 새고도 남을 것이다. 금선유, 정말 저질이다. 평생 친구를 상대로 어떻게 그런 생각을...!!! "...내가 미쳐가나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하진을 쳐다보았다. 밝은 햇살이 그의 냉정한 기운을 완화시켜 주었다. 바람에 조금씩 펄럭이는 하얀 시트가 하진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조금 전의 내가 어이없을 정도로 녀석은 편안하고... 안정되 보였다. 평소의 저 녀석은 하도 딱딱하고 긴장된 분위기라 몰랐었는데, 진짜 부드러워 보이는 걸... 아무튼, 미술학도의 심미안으로도 그림 되는 녀석이다. 쳇, 부러운 놈... "흐음..." 녀석의 평화로운 분위기에 한동안 심취해 있었다. 그러고보니 그림을 하나도 그리지 않 았다. 내내 할 일은 하지 않고 놀고만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이렇게 된 거 저 녀석 이나 그려볼까? 마침 시끄러운 두 녀석은 뭘 하고 노는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 다.(방황하는 탕아들...?? ^^) 장난기가 섞인 결정이 내려지자 선유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저 녀석이 자고 있을 때 스 케치라도 끝내야 하는 것이다. 색을 입힐 때까지는 무리겠지만, 적어도 지금 하진의 분 위기를 옮기고 싶었다. 곧 적당한 사이즈의 캔버스를 앞에 둔 선유는 잠시 하진을 감상했다. 추상화로 그릴지, 인물화로 그릴지 고민이 된다. 둘 다 욕심이 나지만 아무래도 어렵겠지... 추상화로 그린다면 그는 깊은 바다의 느낌이다.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르는 어두운 심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은 다른 이를 용납치 않는 성역으로 언제나 잔잔하고, 언제나 고 요하다. 그는 또한 폭풍과도 같다. 경이롭고 두려운 대자연처럼 그 매서운 눈빛에 모두 가 전의를 상실하고 복종한다. 그의 전투는 사납고 거칠고, 그만큼 아름답다. 광폭하고 잔인한 모습이긴 하지만, 야수는 아니다. 좀더 효율적이며 두뇌적으로 적을 농락하는 것 이다. 타고는 군주, 혹은 전사의 신이랄까. 차가우면서도 가장 뜨거운 파란 불꽃심을 생 각나게 하는 사람이다.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고 카리스마 적이다. 모든 이의 시선을 빼 앗는... "이 녀석, 생각보다 복잡하잖아!!" 즐거운 한숨을 내 쉬면서 선유는 연필을 잡았다. 정말 예술인의 혼을 흔드는 녀석이다. 아무래도 추상화를 그려야 할 것 같다. 그의 이미지가, 그의 느낌이 내 머리속에서 재배 합되어 손끝을 통해 그려달라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인물화도 욕심히 나 는데. 저 인간의 자는 모습을 내 평생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미지수인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둘 다 그리지, 뭐." 작은 캔버스를 하나 더 이젤 위에 올려놓으며 선유는 미소지었다. 곧 선유의 하얀 손이 하진의 감겨진 눈과, 곧은 입매와, 날카로운 턱선과, 그의 모든 것을 섬세히 스케치하 기 시작했다.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햇살과, 눈부신 방안에서의 평화로운 한때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안녕하세요, 여러분. karin입니다. 오랜만이죠? ^^ 오늘 드디어 시험이 끝났답니다. 장장 1주일에 걸친 지겹디 지겨운 시 험이 말입니다. 크흠... ^^* 입이 째집니다, 그려. 사촌오빠 결혼식 전야제도 불침하고 이렇게 올립니다. 길고 짧음의 문제를 제외하자면, (-_-;;;) 오늘 처음으로 도배(?)를 해볼 것 같네요. 아, 물론 제 기준에서 입니다. ^^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뜻을 표하며.(쓰는 사람도 질리는 넘들을 아직까지 보듬 어 주시다니, 정말 대단하단 말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군요. ^^;;;) karin (primblade00@yahoo.co.kr) 혹(眩) - 아찔하다 "...?" 하진은 무언가 석연치 않음을 느끼며 잠에서 깨었다. 어둠에 익숙치 않은 눈 때문에 전 후좌우의 구분조차 할 수 없이 사방이 온통 컴컴했다.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러 몇 번 눈 을 깜빡인 후에야 흐릿하게 윤곽선을 드러내는 사물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 용히 시치미를 떼었지만 그저 그렇게 넘기기는 힘들었다. 분명히 무슨 소리를 들었고, 그렇기에 자신은 깬 것이다.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밤에도 자기만은 그러지 않으리라는 듯, 조용한 가운데 더욱 크 게 들리는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로 고개를 돌렸다. 새벽 3시가 막 넘었군... 일반적, 상식적, 보편적 인간이라면 에너지 비축을 위해 단잠에 빠져있을 시각이다. 게 다가 이 곳은 도시도 아닌 시골. 그리고 근방 500m 이내로는 집이 없었다. 하진의 기억 력에 문제가 없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그맣게, 미약하지만 그 존재를 경고하는 듯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 다. 이 시간에 허락 없이 남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도둑 정도겠군. 부스럭거리며 자신의 잠을 깨운 그것이 도둑이라고, 거의 확신을 한 하진은 벗어놓은 옷 가지를 뒤적거려 담배를 찾았다. 그다지 급할 것도 없다. 어차피 들고갈만큼 가벼운 물 건중에는 돈 되는 게 없고, 돈 되는 물건치고 당일에 가지고 날를 수 있는 물건은 없었 기에 느긋하게 담배 한 대 피우고 나서 뭘 어떻게 해도 할 생각이었다. "저 녀석들 깨울까..." 특별히 무섭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옆에서 마음 편히 자고 있는 녀석들을 보자 니 괜시리 심술기가 발동한 모양이었다. 다리와 팔과 몸에 온통 이불이 휘감겨져 있는 두 녀석들을 보며 하진은 혀를 끌끌 찼다. 이 곳에는 방이 세 개 있는데 그 중 작은 방 하나는 선유가, 그리고 나머지 방은 우리 셋이 대충 쓰고 있었다. 그렇게 방을 나눈 데에는 의식과 무의식이 함께 작용했는데, 의 식적으로 우리 셋과 그는 친구 - 선유의 말을 빌리자면 - 지만 무언가 다른, 여성과 같 이 - 선유가 들으면 화내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에게는 어딘가 사람의 보호 심 리를 자극하는 데가 있으니까 - 우대를 해 줘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고, 이 점에 관한 한 우리 셋의 마음은 놀랄 만큼 일치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선유는 가장 먼저 잠들 었기 때문에 이 별장 내 유일한 퀸 사이즈 침대를 차지한 것이다. 물론, 우리 셋 모두 감히 그의 옆에서 잘 생각은 하지 못했다. 뭐, 이유야 각기 다르겠지만. 하진은 담배를 입에 물고 살며시 방문을 열었다. 공기의 차가움에 순간적으로 움찔거렸 다. 여름이라지만 산으로 둘러쌓여서인지 산장의 밤은 서늘한 데가 있었다. 그런데...!! 하진의 잠을 깨운 미약한 소음은 도둑의 것이 아니었다. 도둑이라면 한밤중에 저렇게 끅 끅대고 있지는 않겠지. 하진은 닫힌 방문 새로 스며나오는 빛을 보았다. 선유가 있는 방 이다. "선유야? 안자고...!!" 하진은 방문을 열고 들어가다 보이는 광경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선유는 끅끅대며 억지 로 울음을 참고 있었다. 꽤 많이 울었는지 코 끝은 빨개져 있었고, 주변에는 휴지 더미 들이 쌓여 있었다. "선유야, 왜 그래!!" 하진은 당황한 나머지 선유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야? 또 부모님 때문에 그런 거라면...!! 그렇다면...!! 걱정되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하진은 선유를 꽉 부둥켜 안았다. 갑자기 나타난 하진 때 문에 울음을 그치려 안간힘을 쓰던 선유는 갑자기 끌어안겨진 상황에 잠시 눈쌀을 찌푸 렸다. 거의 동시에 하진을 밀어내려 했지만 하진의 기세가 굉장한데다 자신을 걱정하는 것 같은 그의 모습에 곧 쑥쓰러운 듯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레 말했다. "별거 아냐, 그만 좀 놔라. 애 떨어지겠다. 훌쩍." "아무것도 아니라면 이 한밤중에 왜 서럽게 울어댄거야. 게다가 혼자서..." "진짜 별 거 아냐. 나 때문에 깬 거라면 도로 가서 자." "말 되는 소리를 해라. ...무슨 일이야." "아, 정말. 누가 고지식하지 않다고 할까봐...! 정말 별거 아니라니까!" "금선유!!!" 다그치는 하진의 목소리에 선유는 손가락을 깨물었다. 젠장, 이런 쪽스런 일이 있나... 아무래도 오늘 일진 꽝인가보다. "진짜야. 신경 안 써도 돼."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면 내가 그렇구나, 하고 가서 잘 줄 알았나고!!!" 하진이 진지한 얼굴로 선유를 채근했다. 마음만은 진심으로 고맙게 받아들였지만, 선유 로선 참으로 답답한 순간이었다. 젠장, 나는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나... 내가 뭐 큰 걸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 데, 맹세코 그런 건 아니란 말이다. 명색이 나랑 5년지기 친구잖아. 척하면 척이라는 효 율적인 커뮤니케이트를 할 수는 없는 거냐.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하진을 보자니 말을 해야 오늘 밤 잠이고 뭐고 가능할 것 같은데, 차마 내 입으로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다. "이유가 뭐야." "너, 지금까지 내 대답은 다 어디로 흘려버렸냐. 별거 아니라니까!!" "별거 아닌데 이렇게 오밤중에 혼자 짜냐!!! 니가 그럴 놈이야!!!" 젠장, 열받는다. 쪽팔림이고 뭐고, 이 고지식한 놈 같으니...!!! "젠장!!! 그래, 말해주마. 책 읽다 서러워서 울었다. 됐냐!!!" "...에?" "책.읽.다.감.정.이.북.받.쳐.서.울.었.다.고." 결국 말하게 만든 하진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들었던지 선유는 입술을 깨물며 한자 한자 또박또박 끊어서 말했다. 하진은 순간 당혹감에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책...이라고?" "그래, 책. 젠장, 쪽팔려." 다행이다...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혼자 우는 게 아니었다. 애써 상처를 싸매고 평온함을 가장하는 게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안도감이 하진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하진은 억세게 잡았던 손의 힘을 풀었다. 선유는 책을 보다 울었다는 게 좀 부끄러웠는 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모양에서 그가 난처해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쿡쿡..." 하진이 안도감에 웃음 소리를 내자, 안그래도 붉던 선유의 얼굴이 그야말로 불난 얼굴 이 되었다. "남궁하진, 웃지마!!! 야!!! 젠장, 빌어먹을!!!" "쿡쿡... 아, 미안. 그래도..." "너, 민재랑 율이한테 말하기만 해봐. 죽어도, 네버, 절대 안돼!!!" "알았어. 알았어." 선유는 현실에 관한 한 악착같이 울지 않는다. 아니, 남몰래 눈물을 흘릴 지도 모르지 만, 적어도 그의 자존심은 남 앞에서 운다는 것을 용납치 않는 모양이었다. 그건 하진 자신도 마찬가지이지만 자신은 '울고 싶다' 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으니까. 남의 말이 나 행동에 영향을 받는 타입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선유는 그렇지 못했다. 어 느 쪽이냐 하면, 오히려 상처를 잘 입는 편이었다. 물론 그는 '상처입다' 라는 사실에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지, 아니면 오기를 부리는건지, 애써 태연한 척 하는 것이다. 그 것은 말 그대로 '척' 하는 것이어서, 그가 받은 고통은 무디어지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은 채 선유의 가슴속에 잠식해 그의 생살을 파먹고 통증을 유발한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뒤에서 홀로 상처를 싸매는, 일반적으로 '손해보는 사람' 이 바 로 그이다. 하지만 현실이 아닌 일에서는 상당히 잘 우는 편이다. 감성이 풍부한 걸까? 비디오, 드 라마, 영화, 책, 심지어 만화책을 보고도 우는 일이 허다하다. 어쩌면... 현실에서 울 지 못한 것을 그렇게 풀어놓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선유 나름대로의 한풀이인지도... 어쨌든, '남자 답다' 라는 데 상당히 강박관념을 가진 선유인지라 중학교때부터는 일부 러 슬픈 것을 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보는 비극적 내용이 그의 눈물샘을 건 드렸나보다. "무슨 책이야?" "...비웃지 않을 거냐." "비웃기는." 조금 눈을 굴리며 생각하더니 이불 속에 파묻혀 있던 책을 꺼내 표지를 보여주었다. <폭풍의 언덕> ...무슨 내용이었더라? 아아, 제시라는 여자와 히드클리프라는 남자의 사랑이야기인가. 자신이 읽은 바로는 별 다를 것 없는 사랑이야기였다. 단지 그 위에 시간의 무게를 덧붙 여 '고전' 이라 부르는. "울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내가 기억하기로, 선유는 예전에도 이 책을 보았다. 초등학교 작문 발표시간에 그의 독후감이 뽑혔었는데, 그 때 쓴 것이 <폭풍의 언덕>에 대한 감상이었었다. 하지만 그때의 그는 이 책에 별다른 견해가 없었었다. 과거에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 시간이 변함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는 것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다. "맞아. 울 만한 내용은 아니지." "그런데?" 되묻는 나의 말에 선유는 고개를 숙였다. 한참을 숙이며 무언가를 고심하는 듯 해서, 나 는 가만히 그의 앞에 앉아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그는 조용히 - 어떻게 보면 아 무렇지도 않은 듯이 - , 그리고 상당히 조심스런 어조로 입을 떼었다. "절대적인 사랑이.... 있을까?" 쿵- 말 그대로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점차 쿵쾅 쿵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음박질쳤 다. 있어. 선유야, 있어. 감히 절대적이라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인생의 단 하나 의 의미가 되는 사랑이 있어. 생을 이어갈 단 하나의 이유가 되는 사랑이 있어. 그것이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이라고, 지금 너를 향한 사랑이라고 선유에게 울부짖듯 토해 내고 싶었다. 하진은 잠시 호흡을 고르기 위해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에게 고백하고 싶 다는 충동이 밑바닥부터 마구마구 솟구쳐왔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선유는 아직 덜 자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그에게 지금 말을 꺼내는 것은, 그를 상처입 히고 나를 상처입히는 길밖에 되지 않았다. 그가 내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내 인내심의 그릇이 닳고 닳을 때까지, 그의 성숙을 기다려야 했다. 단지 그의 옆에서 조용히 그를 지켜주기로 결심하지 않았는가..!!! 하진은 애써 머리속을 차갑게 식혔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글...쎄.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조그맣게 속삭이는 듯한 하진의 목소리에, 선유는 다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제시와 히드 클리프의 사랑.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절대적인 사랑. 나는 너이고 너는 나라는 제시의 말에 심장이 불타는 듯 감정이 벅차올랐다. 타인의 영 혼을 지배하고, 나의 영혼을 일체 상납할 만큼 몸과 마음을 붙드는 사랑을... 나는 할 수 있을까. "몰라... 아직은 모르겠어..."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는 선유의 말에, 하진은 재차 물었다. "그런 사랑을 하고 싶니...?" 아니. 하고 싶지는 않다. 현실적으로 수많은 제약이 있을 것이다. 한 곳만 바라보고 하 나만 위하면 살기에 세상은 너무나 위험하고 각박했다. 상대방의 말 하나, 행동 하나에 울고 웃고 상처받을 일을 생각하면 끔찍하기까지 했다. 자신은 쉽게 무언가를 잊는 사람 이 아니었다. 쉽게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잊은 듯 하면서도 안으로는 들춰보고, 바꾼 듯 하면서도 결국은 제자리인 소심하고 유약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 다. 그런 자신이 절대적인 사랑을 한다면 틀림없이 뼛속까지 아픔으로 신음할 것이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상대방에게 같은 상처를 입힐 것이다. 그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아플 것임을 알면서도 해 보고 싶었다. 인간으로 태어나 대부분 반려자를 찾 고 결혼을 하지만 영혼까지 묶여져 하나가 되버리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자신의 모든 것을 망각할 정도로 빠져드는 그 사랑이란 감정을 느껴보고 싶다고, 제시와 히드클 리프가 부럽게 느껴졌다. 사랑은 위험한 줄 알면서도 혹하고 마는 판도라 상자 같은 것 이다. "그것도... 모르겠어." 멀리서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맞춰 춤을 추듯 이리저리 흔들리는 달빛을 받으며 두 사람은 침묵속에 빠져들었다. 칠월 말, 청춘(靑春)의 계절 여름 밤이었다. ---------------------------------------------------------------------------------- 행복한 하루 되세요~~ karin (primblade00@yahoo.co.kr) 혹(眩) - 아찔하다 "선유야, 뭐 그렸어?" 수업 중이었지만 선생님이 돌아다니며 방학 숙제였던 유화를 평가하고 있었기에 그 틈 을 타 모두들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방학이 끝난지 일주일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방학때 의 습관이 남아있는 듯, 모두 목소리가 커 교실은 상당히 시끄러웠다. 내 옆에 이젤을 놓고 자신의 그림을 세워놓은 지성이 아직 캔버스를 싼 종이채 있는 내 그림을 가리 키며 물어왔다. 이젠 더위도 한풀 꺾였는지, 인위적인 바람을 맞지 않아도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선선 한 가을날씨라고 하기엔 그래도 더웠지만 지독시리 덥던 여름에는 비할 데가 아니었다. 여름방학의 대부분을 삼인조들과 하진네 별장에서 보낸 건 꽤나 유감스런 일이었지만 - 난 나름대로 이것 저것 계획을 세워놨었단 말이다 - 그래도 건강은 많이 회복되었다. 더 위가 물러가니 입맛도 땡겨서, 간만에 고모님께 밥다운 밥을 먹는다고 칭찬을 듣고 있었 다. 본 목적은 노는데 있었던 사이비 요양이었지만 그래도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럭저럭 여름방학이 아쉽게 끝나고, 개학하자마자 학교는 전시회 준비로 온통 북적거렸 다. 작년에 했던 <선화제>의 중간년에 하는 조촐한 교내전시회지만 학교의 특성상 전문 인들이 많이 보기 때문에 만만히 볼 수가 없었다. 미술과는 방학숙제를 겸 - 물론 선생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그려야 하는 시대착오 적 시스템이었지만 - 해서 그림을 그려오기로 되어있었다. 그 그림들을 평가해 잘된 작 품들을 복도에 전시하는 것이다. 난 여름방학동안 총 세 장을 그렸는데, 그 중 두개는 추상화이고 하나는 초상화였다. 하 진이 녀석을 그린 초상화는 워낙 크기가 작은 것이라 제쳐두고 - 그림을 완성하고 민재 와 율이 녀석에게 핀잔을 많이 먹었다. 초상화는 인물의 사실적인 묘사에 묘미가 있다 나? 하긴, 나도 보통때의 하진이 녀석을 보면 내가 그린 그림을 믿을 수 없는데 그 녀석 들이 믿기는 당연히 힘들겠지. 그렇지만 사람을 매도하는 나쁜 점을 바로 잡아주기 위 해 몇 대씩 후려갈겨줬다 - 나머지 추상화에서 제출 작품을 골랐는데, 내가 결국 고른 건... 하진이 녀석을 추상화시킨 작품이었다. 사실 끝까지 고민했었는데, 객관적으로 봤을때 도 그 그림이 더 잘 되어있었고 주관적으로 보았을 때도... 하아, 내가 왜 쓸데없는 변명을 하며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건지. 아무튼 하진이 녀석을 추상화한 걸 가져오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왠지 쪽팔려서 껍질도 까고 있지 않다. 다른 녀석들도 상당히 심혈을 기울였는지 작품 하나하나마다 세심한 정성이 엿보인다. 지성이의 그림은 풍경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늘을 그렸는데, 자신의 느낌처럼 단 아하고, 바른 느낌의 그림이다. 그림은 그리는 사람을 닮는다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단영. 이 녀석의 그림 또한 만만치 않아서, 어릴 때부터 그림을 접해보 고 산 놈답게 기술미가 뛰어나다. 추상화를 그렸는데 어떠한 테마나 모티브도 없이 단 순히 붉고 투명한 빛깔을 바탕으로 여러가지 다양한 색상을 곂쳐놓은, 화려하면서도 숭 고한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의 그림이었다. 아무튼 두 녀석의 그림을 모두 다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내 그림을 보여줄 생각이 없었다. 치사하다고 뭐라 하더라도 차마 내놓고 싶지 않은 그림이다. 내 그림이 너무 못 나서 그렇다는 건 아니다. 사실 미술을 늦게 시작한 관계로 기술은 떨어지지만, 그래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작품에 애착은 갖고 있다. 내가 이렇게 치사한 짓을 하는 이유는 위와 같다. 역시 이 그림의 모티브가 하진이 녀석이라는 데 있는 것이다. 하진이 녀석을 아는 사람도 없고, 또 안다 해도 추상화에서 어떻게 그 녀석을 끄집어 낼 수 있겠냐고 하지만 그래도 쪽팔린 건 쪽팔린거다. 젠장, 왜 하필이면 이게 제일 잘 그려졌냔 말이다... ㅠㅠ "흐응, 아직도 결심이 안 선거냐?" 지성이가 짓궂게 웃으며 물어왔다. 이 녀석, 단아한 얼굴은 순수 위장용일 뿐 성격과는 상관이 없어서 - 없을 뿐만 아니라 정반대다 - 사람 가슴을 콕콕 찌르는 말만 골라한 다. 젠장, 순수한 세상에서 살고싶어... "별로 볼 거 없다니까. 단순한 추상화야, 추상화." "그래. 니 말대로 별.볼.일.없.는. 추상화인데 한번 보여주는 게 어때서 그러냐니까?" ...사악한 놈. "나중에 봐." "하긴, 선생님이 검사할 때 되면 풀르겠지. 그때까지 꿍쳐두진 않겠지?" 웃지마, 에비. 꿈에 볼까 무서운 놈. 쿡쿡... 하지만 말이지... 난 오늘 검사맡은 생각 없어. 수업 끝나고 몰래 낼 생각이란 다. 그러니 한지성, 내 그림에 대한 욕구는 일찌감치 접어버리는 게 좋을걸...? ^^ 결론만 얘기하자면, 지성에게도 숨기려 했던 내 그림은 결국 만천하 만백성(?)에게 알 려져 버렸다. 어찌어찌하게 그 그림이 선생님 마음에 들어 복도 한가운데를 장식하게 된 것이다. 내 그림을 보며 지성이 얼마나 즐거워 했는지는,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충분 히 알 것이다.(당신들이 지성이와 같은 성격의 소유자라면 말이다) 게다가 그 넘은 고개 를 갸우뚱거리며 특기 - 사람 가슴을 찌르는 말 - 를 살려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흐음... 이거 어디선가 본... 그래... 음..." "보..기는. 내가 추상화 도용이라도 했다는 거냐?" 놀라서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괜히 퉁명스레 대꾸했는데, 녀석은 고개를 젓 고는 다시 한 번 내 가슴을 휘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모티브 말야. 너 이거 모티브가 뭐냐?" "...세상엔 알아선 안 될 비밀이 많단다, 착한 아이야." "나쁜 아이여도 별 상관없어. 모티브가 뭐냐?" "...안 가르쳐 줘." "뭐냐, 상당히 버릇이 나쁜...!!!" "뭐, 뭐야?" "아, 아니... 대충 떠오르는 게 있어서 말야. 후훗-" 그러면서 싱긋 미소짓는 폼이 뭔가 불안했다. ...설마 알아채지는 않았겠지? 복도 한가운데의 어두운 조명 아래 놓여진 그림을 볼때마다 깜짝 깜짝 놀라곤 한다. 그 첫번째는 이유없는 쪽팔림 때문이고, 두번째는 학교에서 하진이 녀석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혼자 복도를 걸어갈때면 하진이 녀석이 뒤에서 지켜보는 느낌이 든다. 망상중에서도 최망상이요, 지랄 중에서도 개지랄이다. ---------------------------------------------------------------------------------- 하핫, 짧죠? 그래도 한 편은 한편입니다... 제가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장단(長短)은 상관이 없다니까요... ㅠㅠ 내일 사촌오라버니 결혼식이기에 일요일까지 다시 잠수(?)입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무한한 감사의 표현으로... 마사루 버젼... "아이원츄!!!" ...그나마 읽을 생각이 떨어지셨다구요. 넵, 자중하겠습니다. ^^;;; "콜록, 콜록... 켈록... 쿨럭... 쿨럭, 쿨럭, 쿨럭... 켁켁!!!" "...약 먹어." "그래. 애 잡겠다." "선배, 누가봐도 정상이 아니라구요."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내 기침에 관한 우석의 말에, '사람은 패면서 키우는 거다' 라는 만고의 진리를 이 한몸 바쳐 실현하고자 - 그냥 제 성질에 못 이겨 평소대로 손이 먼저 나간것에 불과하다 - 했지만... 휘청~ ...하고 하늘과 땅이 제멋대로 섞여서 흔들어대는 바람에 우석이 녀석에게 안기는 폼 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봐... 자네들은 결코 섞여서는 안 된단 말이야. 하늘과 땅이 섞이는 날은 바로 이 지구 멸망의 날이라고.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계속 우석에게 안겨(?)있는 선유의 모습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 은 우석과 단영, 지성 등은 황급히 열을 재어보았다. 그 와중에도 선유는 계속 볼이 빨 개진 채 콜록콜록 기침을 하고 있었다. "야, 이거 장난 아닌걸." "선배. 양호실 가요. 괜한 고집 부리지 말고." 우석의 말은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이성적으로 보나 감정적으로 보나 그야 말로 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학교에서 양호실을 지은 이유와 부합되는, 모범생적 인 생각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선유는 그 권유를 딱 잘라 거절하였다. 이미 몇 번째일지 모르는 거절이었다. 뭐, 사실대로 말하자면 거절의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고도 유치한 것이었다. "오늘은 체육대회란 말이야!!!" "젠장... 으... 물, 물 줘..." "이런, 잠깐만. 선유야, 금선유!! 잠깐만 머리 들어. 그래, 옳지." 단영은 선유를 안아 일으켜 입가에 컵을 대주고는 천천히 기울였다. 어느정도 목을 축 인 듯 하자 컵을 내려놓고 선유를 다시 눕힌 그는 그제서야 한숨을 쉬었다. 선유는 머리 가 아픈지 얼굴을 찡그리며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피곤한지 축 쳐져서 두 눈을 감 은 폼이 조그만 초식동물같아 무의식중으로 측은감을 불러일으킨다- 는 것을 선유가 알 아챈다면 길길이 날뛰겠지...? 체육대회를 끝까지 관전하겠다며 열에 달뜬 몸을 억지스레 지탱하던 선유도 점심시간이 지나자 기진맥진해서는 결국 양호실에 오게 되었다. 그러나 양호실도 바람이 차단된다 는 것 말고는 바깥과 매한가지여서 - 양호선생님은 이곳 저곳에서 속출한 부상자를 치료 하기에 여념이 없어서인지 약 하나만 던져주고는 사라져 버렸다 - 선유에게 약을 먹이 고, 침대에 눕히고, 수건 찜질을 해 주는 등의 모든 잡일은 단영이 해야만 했다. 평소엔 남에게 폐 끼치는 걸 지독히도 싫어하는 선유였는데, 아파서 그런건지 어리광을 부리는 말투가 되어서는 단영에게 이것저것 칭얼대며 요구해왔다. 물론 그러한 사실이 단영에게 불쾌감으로 다가왔냐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선유의 보이지 않는, 그러 나 견고한 막이 사라진 것 같아서 - 그것이 설사 일순간의 환상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 매우 기뻤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확실히 선유는 마르고 몸이 약하다. 극도로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그의 성격과 예민한 신경, 상당히 심한 편식이 그 이유일 것이다. 하얀 양호실 침대에 누워 끙끙대는 선유 의 여린 실루엣을 따라 그리던 단영은 어느덧 자신이 붉어진 그의 뺨에 사내다운 욕정 을 느끼고 있는 것을 깨닫고 급히 그것을 억눌렀다. 아무리 선유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어떻게 아파하는 모습에까지...!!! 자신의 인내심이 조금씩 갉아먹히는 것을 느끼며 단영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선유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참기가 힘들어져..." "저..기...ㅆ어...?" "!!!" 들리지 않을거라 생각했었는데 선유에게 들렸을까? 단영은 극도로 긴장한 신경을 통해 떨리는 손을 제어하려 애쓰면서 천천히 선유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가 내 말을 들었으 면... 들었으면 어떻게 하지? 그냥 두 눈 딱 감고 고백해버릴까? 하지만 지금으로서 는... "전화기 있냐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어오는 선유의 말에 단영은 아이러니한 감정을 느꼈다. 그에게 속 마음을 들켰으면 어떻게 하나, 라는 낭패감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들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알아채지 못한 선유에게 - 억지스럽다는건 스스로도 인정 하지만 - 원망스런 마음도 생겼다. 단영은 애써 복잡한 마음을 감추며 선유에게 휴대폰 을 건네주었다. 선유는 민재의 번호를 누르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몇번의 신호음이 울리더니 곧 사람 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 "전화 받았습니다??" 민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선유는 말을 꺼내려 했지만, 목에서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 다. 젠장, 이번건 꽤 심하잖아. 고생 좀 하겠는걸. 선유는 투덜거리며 어느새 매마른 목을 침으로 축였다.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 플 때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 눈물이 난다고 하던데, 같은 맥락인건가? 쳇, 그럼 이민재 자식이 엄마와 비슷하다는 거잖아... 나도 참 눈이 낮군. (-_-;;) "누구야?! 전화 했으면 말을 하라고!!!" "시끄러..." 열이 높긴 높은지 생각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 바람에 대답이 늦었다. 고새를 못참고 다혈질 민재녀석은 고함을 지른다. 머리 울리잖아, 새꺄!! "어? 선유? 너 이시간에 왠일... 아니, 너 목소리가 왜그래?" 언제나 티격태격하지만 그래도 몇년을 함께 산 사촌이라고, 민재는 선유의 목소리에서 금방 이상한 점을 발견해내었다. 하지만 여전히 목소리는 커, 개쉑!! "소리 죽여, 멍청아... 머리 울리잖아..." "어? 어... 아픈거냐?" "짜증이 날만큼. 나 좀 데리러 와라." "엇? 수업시간인데?" "그래? 그럼 나 혼자가지 뭐..." 데리러 오라는 선유로서는 드문 어리광에 잠시 농담을 한 것 뿐인데, 역시 금선유는 죽 어도 금선유였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 집에 가겠다는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민재는 수업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핸드폰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두 녀석을 보며 생각했 다. - 그러는 자신은 수업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태연히 핸드폰을 받고 있지만, 자각하지 는 않는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자각하지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다. - 내가 안가도 어차피 이 녀석들이 가만 있지 않을건데, 뭐. "알았어. 어디 있는데?" "학교 양호실..." "알았어. 그럼 양호실로 지금 갈테니까 조금만... 어..." 말을 하던 민재는 폰을 귀에 댄 체 멍하니 중얼거렸다. 장소를 듣자마자 하진이 녀석이 나가버린 것이다. 분명 제멋대로이긴 해도 수업시간에 말없이 나가는 녀석은 아니었기 에 앞에서 영어 문장을 해석하고 있던 젊은 여선생은 두 눈을 동그랗게 만들고 하진의 이름을 불러댔다. 그럼 그렇지, 남궁하진이 어디 갈리 있나. 민재는 씽긋 웃으며 - 막무 가내로 나간 하진이 녀석의 뒷처리는 틀림없이 자신이 책임져야 할 것이기에 마빡에 크 로스를 퍽퍽 쳐붙인채 - 선유에게 말했다. "...하진이 녀석 갔다." "아퍼..." 선유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식은땀이 이마를 적셨는지 머리카락이 땀에 젖 어 흥건하였다. 눈의 초점을 맞추려 애쓰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눌렀다. 젠장할!!! 바깥에서 왁자지껄한 소음이 바람을 타고 닫혀있는 창문에 다가와 부딪쳤다. 여기 저기 서 경기를 진행하는 소리겠지. 아무튼 이놈의 몸뚱아리는 도움이 되는 적이 없다니까. 씁쓸하게 웃으며 이불을 끌어올렸다. 열이 더 높아졌는지 으슬으슬 춥다. 물론 이럴땐 이불을 덮지 말아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설마 천쪼가리 하나 덮었다고 죽겠어? 뭐, 죽으면 할 수 없는 거고.(-_-;;) 잠시 잠든 사이 단영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긴, 미술부 부장인데 오늘같은 날 할일이 없는게 오히려 이상하지. 괜히 자신때문에 정작 해야할 일은 팽개쳐 놓은 것 아닐까, 하고 선유는 잠시 반성했다. 아무래도 단영에게 폐를 끼친 것 같다. 나중에 인 사해야겠군. 온통 흰 색으로 덥혀있는 양호실은 추워보였다. 아파서 그런가... 아플때 혼자 있는 건 정말인지 싫다. 하지만 단영에게 그걸 바랄 순 없지... 젠장, 생강차 먹고 싶다... 평소 감기 걸리면 고모님은 생강차를 끓여 주셨는데, 그때는 뜨겁고 맵기만 했던 것이 왜 하필 지금 먹고싶은지... 자신도 참 제멋대로다, 라고 혀를 쯧쯧 찼지만 이내 생강 차 생각에 침이 고였다.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더니, 확실히 그짝이다. 평소에 귀찮다 고 뿌리치던 생강차가 정작 마시고 싶으니 없다. 민재한테 생강차 가져오라고 할 걸 그 랬나... 확실히 아프다는 핑계로 어리광 부리는 것 같잖아... 으음...생강차... 벌컥- 무례하게도 - 여러분도 사회생활을 온전히 하고 싶다면 노크하는 습관을 갖도록 - 벌컥 들어온 인간은 양호실 간이침대에 누워있는 날 보고선 한숨을 쉬고는, 잠시 숨을 고르더 니 내 이름을 불렀다. 하진이였다. "선유야?" "...늦었어." 교복 차림에 성급히 온 게 눈에 보였지만 난 퉁명스레 타박을 주었다. 흐음... 역시 나 어리광 부리고 있는 것 같아. 하진이 녀석도 그걸 알았는지 그냥 씩 웃으며 넘겼다. "아, 미안. 괜찮아?" "아니. 생강차 먹고싶어..." 하진이 녀석이 내가 누워있는 침대 가까이에 오자 나는 녀석의 팔을 붙잡았다. 확실히 아플때 혼자 있는 건 청승이다. 누군가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안심이 되는 걸. 내 몸뚱아리를 집에 인수인계할 믿을만한 놈이 나타났다는 안도감에 나는 하진이 녀 석의 팔을 꽈악 붙잡고는 생강차를 내놓으라고 칭얼대었다. 거의 땡깡 수준이었지만 - 나중에 열이 내린 후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다 - 하진은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경 험상 터득하고 있었기에 그럭저럭 어리광을 받아주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내 머리를 짚 고는 크게 화를 내었다. "너, 열이 왜 이렇게 높아!!!" "어, 시원해..." 하진의 손은 바깥 바람의 기운이 감돌아 시원했다. 나는 내 머리를 짚은 하진의 손을 부 여잡고 얼굴을 마구 문질러댔다. 열이 내린다면 쪽팔려 죽겠지만, 뭐 지금은 아픈 상태 니까. - 안일하다, 고 후에 반성했지만 - 하진은 잠시 움찔거렸지만 다시 화를 내었다. "금선유, 열이 이렇게 오를 때까지 왜 전화 안했어!!!" "화내지 마..." "지금 내가 화 안내게 생겼어!!!" 선유는 하진이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냉정하게 생겼다- 고 평가되는 얼굴이지만 그래도 가까운 사람들에겐 안 이랬는데, 지금은 인상을 찌푸리며 화를 낸다. 아플때 누 가 화내면 진짜 서러운데... 나쁜 놈... "훌쩍..." "선유야??" "죽어버려..." "선유야, 아니, 그게... 그래, 미안. 내가 잘못했어." 자신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눈물만 뚝뚝 흘리는 선유를 보며 하진은 혀를 찼다. 명백히 자신의 실수였다. 선유는 아플때 누가 조금만 싫은 소리해도 - 설사 그게 자신에게 하 는 소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 울어버린다는 것을 어째서 간과했을까. 평소에는 자존심 때문에 기를 쓰고 울지 않지만, 아플 때면 조금만 섭섭해도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 뿐인가. 평소엔 섭섭할 정도로 무뚝뚝한 녀석이 아플때면 어리광을 피워대는데, 그 시릴 듯한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면 누구도 버텨내질 못하는 것이다. - 그 증거 로 몇 번이나 칼로 물베기라는 고모님네 부부싸움을 중단시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 하진은 목소리를 부드럽게 만들며 선유를 안아 일으켜 달래주었다. 평소라면 금새 뿌리 쳤겠지만 선유는 그러지 않고 하진의 목 뒤로 두 손을 교차시켜 하진을 꽉 끌어안았다. 하진은 쑥쓰런 감정을 애써 표면에 드러내지 않으며 잠시 고민했다. 이 녀석, 다른 인간 들에게도 이러면 어쩌지? "선유야, 너 가방...!!!" 단영은 선유의 짐을 들고 들어오다 낯선 사람이 선유를 안고 있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랐 다. 그러고 보니 몇 번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2월달 입학식때도 봤고, 저번의 싸움터 에서도 봤다. 아...!! 그러고 보니 1학년 축제때 우희의 돈욕심이 빚어낸 돌발적 인간 경매에서 선유를 사려고 했던 녀석이기도 하다. 여자 꽤나 울렸을 것 같은 잘생긴 얼굴에 모델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잘빠진 몸매. 게다 가 원영학원 교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봐서 집안도 좋을 것이다. 모로 보나 나무랄데 없 는 모습이었지만, 단영은 왠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이유들을 - 저 녀석이 선 유를 안고 있다던지, 선유가 아무 거리낌없이 녀석에게 안겨 있다던지 등의 - 제쳐놓고 서라도 자신을 바라보는 저 싸늘한 눈동자... 그야말로 맹수의 눈빛 같다- 고 단영은 생각했다. 자신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 도 거리낌없이 없엘 수 있는. 직감적으로 위험한 인물임을 알아챘지만, 그가 어떻게 선 유의 신뢰를 받게 되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저런 인간은 어차피 자 기 마음 내키는데로 행동하는 족속들이라 선유와는 상극인데...? -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판단이다 - 하진 또한 선유의 가방을 들고 들어온 단영을 쳐다보며 - 누가 봐도 노려보는 것이었지 만 - 그를 훑었다. 언젠가 선유에게 소개받은 인간이다. 선유가 자신에게 소개시켜 주었 을 정도면 어느 정도 신뢰를 얻었다는 건데... 마음에 안 들어. 금선유란 인간은 가끔씩 고양이과의 동물들과 놀랄만큼 흡사한 면모를 보여주는데, 사교 성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고양이과의 유전자를 받았다- 고 생각할 만큼 닮았다. 어느 정 도의 벽을 그어두고 넘어오면 가차없이 상처를 입히는. 그렇기 때문에 선유와 친해지는 강도는 얼마나 사귀었느냐에 비례한다고 보아도 문제없었다. 조금씩, 조금씩 그가 눈치 채지 못하게 다가가는 것이다. 부드럽고 따뜻하게, 경계심을 풀도록. 그런데 채 2년도 안된 인간이 이렇게 신뢰를 받고 있다는 건 드문 일이다. 게다가 가방을 들고 온 꼴을 보아하니 양호실로 데리고 온 것도 그인 것 같았다. 그런 이유로, - 역시 지극히 주관적 이고 감정적이지만 - 다시 한 번 '맘에 안 들어' 라고 생각하는 하진이었다. 꽤나 공통점이 많은 사내녀석 둘이서 또한 공통적으로 '맘에 안 들어' 기를 발산하며 스 파이크를 튀기고 있을 때, 우리의 금선유 군은 아무 생각 없이 "생강차~" 를 연발하고 있었다. 모르는게 약일지, 무식이 죄일지. 하진이 녀석이 나를 데려가긴 했지만, 뭐에 기분이 상했는지 - 설마 수업시간에 불러냈 다는 걸로 상한 건... 아닐거다. 수업은 듣지도 않는 녀석인데, 뭘 - 내내 얼굴이 굳어 있었다. 단영도 나에게 가방을 가져다 준 이후로 뭐에 열이 받쳐서는 오후 모든 경기에 서 타올라 - 정말 미친듯이 하더라, 라고 훗날 지성은 평가했다 - 미술부가 우승하는데 일조했다고 한다. 그 이유가 자신 때문인지도 모르고 단지 "생강차, 또 먹고 싶다" 라 고 중얼거리는 우리의 금.선.유. 마냥 이뻐해 달라고 하면, 음... 화내실 건가요? ^^*(재차 말하지만 누구한테 말거는 거 냐?) 드디어 올라온 혹 하지만...... 작가님이 또 잠수타신데요 혹(眩) - 아찔하다 "...였기에 이 상을 드립니다. 문화교육부장관 이 태 호." 선유는 자신에게 상장과 상패를 내미는 교장선생님의 미소에 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 리 생각해도 꿈같은 일이다. 하지만 꿈이라면 죽여버릴테다.(누굴? ^^;;;) "선유야, 내가 그랬지? 꼭 상 탈거라고." 서양화 담당 선생님은 선유를 보자 빙긋 웃으며 말씀하셨다. "선생님, 놀리지 마세요. 가장 아래의 상이라구요. 노력상 같은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선유였지만 역시 입가에는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선생님은 선유의 마음을 안다는 듯 어깨를 툭툭 치고 다시 걸음을 옮기셨다. 선유도 상장과 상패를 안고서 교무실 을 나왔다. 이런 행운이 또 있을까. 여름방학이 끝나고 제출한 그림 중 잘된 그림을 뽑아 신인미술대전에 내보낸다는 건 방 학 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상은 탐내지 않았었다. 편한 마음으로 그냥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 신인미술대전의 심사를 보는 분 정 도면 우리나라 미술계에서 어느정도 알려진 분이므로 - 냈던 것인데 어쩌다 보니 자신의 작품이 입선한 것이다. 비록 '대상' 도, '우수상' 도 아닌 '입선' 에 불과했지만 선유는 진심으로 기뻤다. 이것으로 화가의 길에 한걸음 다가간 것이다.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자신의 실력이 다른 학생들에 비해 굉장히 우수하다고는 생각 치는 않는다. 다만 다른 사람보다 적절한 소재를 적절한 감성으로 그린 것이다. 비록 그 림 자체는 실력일지 모르지만 그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까지 수많은 갈림길이 있었기에, 이것은 행운이었다. 행운인 건 알겠는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면 바로 뽑힌 그림이 문제의 작품, 죽어도 같이 가져가야할 비밀, '남궁하진 추상화' 라는 것이다. 뭐, 알아볼 사람은 없을 테지만. 교실로 가니 디자인과로 이적한 성혁이 녀석까지 와 있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 자 주변인에게 민폐를 끼치며 달려들었다. 의미모를 괴성을 첨가하며 말이다. - 누누히 말하지만, 소음도 심각한 공해다 - "야, 야, 야아, 금선유 이자시익~" 퍽-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짐승화된 친구를 보며 선유는 주저않고 한대 쳐 주었다. 명색이 친 구라면 친구가 탈선할 때 조금 뜨.거.운. 충고를 해서라도 탈선을 막는게 도리... 라고 배웠거든. 우리집 가풍이 워낙 엄격해서 말야. - 뻥이다 - 별로 아프게 때리지도 않았건만 - 난 맞는 입장이 아니므로 - , 안성혁 녀석은 있는 상, 없는 상,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엄살을 피워댔다. 아, 물론 난 신경 안 쓴다. 아픈만큼 약된다고, 혹시 들어봤는지? "호오, 이게 바로 그 '신인미술대전' 의 상장과 상패인가?" 왼손에 들려있던 상장과 상패를 쏙 빼가는 - 오른손은 성혁이 녀석을 쳐야 했으므로 - 여성의 소프라노 목소리. 참고로 내가 치를 떠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이쯤 하면 다들 아 시겠지만 노파심으로 말하건데, 내가 마.녀. 라 칭하는 옆반의 하우희 여사였다. "그래. 비록 입선이긴 하지만." 왠지 낯간지러워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자 상장과 상패를 흘낏 본 우희가 답지않게 - 우희 는 왜 칭찬을 해줘도 난리냐, 란 표정으로 나를 봤지만 - 격려해 주었다. "무슨 소리야. 이 정도면 대단한거지. 여름방학동안 집에 처박혀서 쌔빠지게 그림만 그려 댔구나?" ...이것도 나름대로의 격려지. 격려... 겠지? 상장과 상패가 반 아이들을 비롯, 여러 사람들에게 돌고 도는 가운데 나는 친한 녀석들 의 우정의 손길을 가장한 돌림빵을 받아야 했다. 물론 하우희는 패미니스트답게 돌림빵 에 참가했고, 해민이는 웃고만 있었다. "에구구, 삭신아..." "잘 그리는 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줄은 몰랐어." 해민이 빙긋 웃으며 어깨를 두들기는 - 어느정도 돌림빵을 맞아주다 성질이 나서 다들 똑 같이 패 주었기에. 아, 물론 상황정탐이 빠른 우리의 지성군과 우희양 등은 그 전에 실 컷 때리고 빠져 있었으므로(hit and run의 고난도 작전을 구사했다) 안.타.깝.게.도. 패 주지 못했다 -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도 몰랐어.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야." "쿡쿡... 그건 너무한 표현인데." 해민과 같이 이것저것 이야기하며 웃고 있자니 어느새 HP 회복이 다 된 성혁이 녀석이 또 시비를 걸어왔다. 정말 빠른 회복능력을 자랑하는 그 비인간적인 체력만큼은 인정해주 지. "야아, 둘이 잘 어울리는데? 사귀는 거냐?" "안성혁. 네가 외모로만 어울림과 안 어울림을 판단하는 녀석이었는지는 몰랐는걸? 아, 물론 해민이와 나는 성격으로도 맞지만 말야. 혹시 질.투. 하는거야?" 싱긋 웃으며 말을 되받는 나도 악취미긴 하지만, 단순무지를 인생 목표로 삼고 오직 그 길만을 정진해 가기에 이렇게 곧바로 반응을 보이는 성혁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이리라. "내, 내가 왜!!" "호오, 그럼 해민이에게는 질투할 가치도 없다 이건가? 이거, 너무하는걸?" 시뻘게진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성혁. 아, 물론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해민 도 알고, 우리의 대화를 무료한 시간 땜빵용으로 즐기는 반 아이들도 알고 있단다. 참고 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네 녀석의 사고회로가 그런 이중적 의미의 언어유희를 할 만 큼 복잡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야. 그럼에도 묵인하는 이유의 공통점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겠지. "아, 아니... 해민아 그게 아니라..." "응? 해민이가 아니야? 그럼 나야? 에~ 안성혁, 너 나 사모했었구나? 변.태." "크아아아악~" 역시 버릇을 잘못 들인거다. 말로 안 되면 몸으로 때우다니, 이런 시대에 뒤떨어진 행동 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 의미를 깊이 새기란 뜻으로 성혁이 녀석의 머리를 자근자근 밟아주었다. 사실 이 녀석, 워낙 말을 물고 늘어지기에 말싸움하기 쉬운 상대가 아니다. 평소에 내가 이 녀석과 티격태격 말싸움을 할 때, 간혹가다 이 녀석이 날 바보취급 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니까. 그런데 유독 이성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 쑥맥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애 지. 쯧쯧.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시원하다. 기분은 상쾌하고 친구들과는 즐겁다. 예상치 않았던 상 까지 받았다. ...좋은 날이다. [라 마르세예즈] 프랑스의 국가명(國歌名)을 따온 이 레스토랑은 그랜드 호텔 본점 식당가에 위치한 정통 프랑스 음식 전문점이다. 바꿔 말하자면 기념용 외식을 위한 - 결혼기념일, 양가 부모님 상견례, 애인의 생일 등 - 보편적 음식점이라는거다. 어디서 많이 들은듯한 바흐의 G선상 의 아리아가 흐르고 어디서 많이 본듯한 옷차림의 웨이터들이 날라오는 어디서 많이 본듯 한 프랑스 음식. 하얀색 접시 위에 놓여있는 조그만 고기 한 토막과 소스를 보며 이게 도 대체 얼마일까, 하고 고민하는 선유였다. "음식을 눈으로 먹냐? 왜 손도 안 대고 있어?" 오렌지소스가 가미된 오리 가슴살을 한점 베어 입으로 가져가며 민재녀석이 물었다. 그러 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레드와인을 마신다. ...고모부나 고모님도 암말 안 하시는 거 보면, 저 녀석 내논 자식인가? 불쌍한 놈. "아니... 이거 한 쪼가리에 얼마냐?" 아무리 봐도 바가지를 쓰는 것 같다는 생각에 선유는 나이프 끝으로 오리 가슴살을 슬며 시 들어올리며 가격을 물었다. "글쎄. 그 음식만이라면... 한 이삼만원 선일거다."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며 - 실제로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 조그만 고기 모퉁이에서 베어 낸 더 조그만 고기 조각을 입으로 옮기는 민재에게 선유는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도대체 이놈의 오리는 인삼이라도 먹였다냐? 무슨 가격이 그렇게 비싸?' ...이렇게 꿍시렁댈 뿐이었다. 선유가 더욱 기가 막힌 이유는 이 요리 외에도 대여섯의 요리가 더 있었다는 점이다. 더 하자면, 이 오렌지 소스가 가미된 오리 가슴살 구이는 그나마 본 요리도 아니었던 것이 다!! 자, 잠깐... 그럼 방금전에 먹은 송아지 안심 스테이크와 송이버섯 구이는? 그건 도대체 얼마라는거지? 타오르는 호기심에 물어볼까 하다가 아무래도 컬쳐 쇼크(Culture Shock) 를 받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선유는 계속 고기를 뒤적거리며 먹을까, 말까를 고민하였다. 이 비싼 음식을 소화해내기 자신의 위는 너무나 섬세했다. 아무래도 먹으면 얹힐 것 같아. 그렇지만 기껏 시켜논 비 싼 음식을 버린다는 것 또한 안될 말이었다. 오리고기를 바라보는 선유의 의심스런 표정과 불신감이 가득한 눈빛에 민재는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한숨을 쉬었다. 때때로 발휘되는 선유의 자린고비 정신이 나타난 모양이다. 사실 지금까지 자기가 먹어온 음식에 비하면 그리 비싼것도 아닌데. 엄마가 환절기마다 지어오는 한약이나 매년 하진네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먹어대는 음식만 해도 이까짓 오 리고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비싼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유 녀석이 태연 하게 그것들을 먹을 수 있었던 이유는 틀림없이 자신이 먹은 음식값을 몰랐었기 때문이겠 지. 오리고기 하나에 저렇게 고민을 하는데 한약값이라도 알았다간 틀림없이 한약을 안 먹는다고 두눈 부릅뜨고 버틸거다. 그렇다고 안 먹일 엄마도 아니니 만약 그렇게 되면 자 신이 가운데 끼여서 피를 볼게 틀림없다. 오리 가슴살 요리 하나가지고 컬쳐 쇼크까지 받은 선유도 선유지만, 그것을 토대로 상상 의 나래를 펼치는 민재도 또한 민재다웠다.(-_-;;;) "선유야, 왜 안 먹니? 배 안 고프더라도 조금은 먹어. 네 시상 축하 외식인데." 고모님께서 냅킨으로 입가의 소스를 닦으며 말하셨다. 그 말에 선유는 고기에 대한 집쩍 거림(-_-;;)을 그만두고 포크를 놀려 입가로 가져갔다. 이미 시킨 요리야 어쩔 수 없는거 고, 절대 남기는 일은 없어야겠다 다짐하면서. 곁에 있는 와인잔을 집어들며 고모부가 말을 꺼내셨다. "선유는 동서의 재능을 이어받은 것 같아." 그 말에 고모님은 기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으셨다. "그렇지? 내가 봐도 그래. 정말 샛별이랑 닮았다니까."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한 아버지와 닮았다는 말에 선유는 얼굴을 붉혔다. 뭐, 솔직 히 말하자면 오랜만에 들은 아버지의 낯간지러운 애칭 때문이기도 하다. 쿡쿡. 그 모습을 보며 민재는 혀를 찼다. 아직도 샛별이라니, 쯧쯧. "살아있는 사람이라도 마흔 몇의 중년 남성을 '샛별' 이라 하시면 주위사람들이 비웃어 요, 어.머.니." 충분히 어머니를 강조하며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민재의 생각에 지나지 않았는지, 아 니면 어머니가 강적이었는지, - 후자쪽이 훨씬 더 현실적이며, 사실적이고 진실적이기까 지 하다. 도박꾼들이여, 거리낌없이 후자를 선택하여라. 운명의 여신이 100% 미소지을 것 이니!! ^^;;; - 선유의 고모 금지연 여사는 한치의 허물어짐도 없는 완벽한 미소를 아들 에게 선사하며 말했다. "어머, 샛별이 어때서 그러니? 좋잖아, 샛별. 이쁜 별. 새벽 별. 네 이름도 사실 샛별로 하려고 했는걸." 아아, 완벽한 고모님의 KO승입니다, 란 선유의 표정에 배신감을 금치 못하며 조금이나마 반격해 보려고 하는 민재. 그러나 고모부와 선유는 '아직 백년은 이르군.' 이란 눈빛으 로 민재를 바라볼 뿐이었다. "고인에게는 금성휘라는 엄연한 이름이 있다구요."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휩쓴다지만, 그 구절이 이 집안에서 인용되기까지는 아직 상당 한 시간을 요함이 틀림없었다. "그래. 금성-휘. 금성이면 샛별아냐? 그러니까 우리 샛별이지." 그렇게 말씀하시며 싱긋 웃으시는 어머니의 얼굴에 민재는 황급히 아버지를 쳐다보았으 나, 아버지는 시선을 피하시며 - 그러나 분명 웃고 있었다 - 포도주잔을 들고 딴청을 피 웠다. 하긴, 우리 아버지에게 뭘 바라겠는가. 어머니보다 어리단 그 이유 하나때문에 안그래도 페미니스트를 강요 - 사전적 의미로 보자면 강제로 요구한다는 뜻이다. 문학박사 이희승 편저의 국어 대사전을 찾아볼 것 - 당하는 처지에 부부싸움이라도 한번 났다 하면 역시 어리단 그 이유 하나만으로 온갖 육두문자를 귀로 집어넣어야 하시는데. 아, 물론 자의 를 가장한 타의로 말이다. - 당신들같으면 자신은 육두문자를 남발하면서 정작 이쪽이 한 마디만 하면 울고 불고 난리치는 사람을 건드리고 싶나? 그렇다면 당신은 지독한 매저키 스트다. 아, 물론 새디스트를 가장한 매저키스트 말이다. - 수세에 몰리다 못해 아주 열세인 민재를 돕고자 - 미운정이라고 들어 보셨는지? - 선유 는 웃음을 참으며 고모님을 말렸다. 고모님도 그만 두실 생각이셨는지 - 그동안 고모님 의 성격에 입각, 분석한 결과 절대 아니라고 본다만 본인이 그렇게 주장하셨으므로 - 그 쯤에서 민재를 닥달하는 것을 그만두셨지만, 이따끔 한번씩 생각날때마다 민재 녀석을 찔 러댔으므로 민재 녀석은 외삼촌 이름에 관한 반박 한번 했다가 지치도록 정신적 압박을 받아야 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선유는 미대갈꺼지?" "네. 아마 그럴 것 같아요." "어머, 여보. 무슨 소리야. 당연히 보내야지. 재능 있는 사람은 그 재능을 키워줘야해." "아하하... 고모님. ^^;;" "그런데 민재는 어.린.애.같.이. 선유랑 떨어져 학교에 가는게 싫어 교장을 협박했었지? 아무튼, 정말 덩치만 커다란 어.린.애. 라니까." "...(빠직!!)" "^^;;;" 여성이란 정말 태산도 움직이고 바다도 치워버리는, 강력한 존재임을 새삼 깨달았다. "자, 그럼 선유야. 다시 한번 상 받은거 축하하고." "아, 고모. 네. 하하하. ^^;;" 식사를 마치고 고모부께서 계산하시는 동안 고모님, 민재와 함께 1층 프론트로 내려왔 다. - 차마 가격을 확인할 깡이 없는 것이다 - 그곳에서 다함께 고모부를 기다리는데 고 모님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핸드백을 여시고 흰 봉투를 하나 꺼내어 나에게 내미셨다. "그리고 이거. 금일봉이다." "에? 고모, 안 이러셔도 돼요. 상으로 비싼 저녁 얻어먹었잖아요." 옆에서 민재가 '헐, 역시 비.싼. 저녁임을 마음에 두고 있었군' 이라 중얼거리는 것을 언 젠가 두뇌및 정신 갱생 시켜주겠다는 의미로 지긋이 노려봐주고는 다시 고모님께 봉투를 돌려드리려 애썼다. 정말, 두분께는 너무 신세를 진 것이다. 친자식도 아닌 날 이렇게 신 경써주시는 것도 감사한데... 극구 사양하는 선유였으나 고모님도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어허! 어른이 주겠다면 받는거야. 어서 받지 못해!!!" "고모, 정말 괜찮아요. 마음만으로도 충분해요." "무슨 애늙은이같은 말이야!! 너희땐 사양하는게 수상한거야!!" 무언가 의미모를 말로 선유를 협박하는 어머니와 죄송스런 마음에 한사코 거절하는 선유 를 보며, 민재는 21세기 사이버시대에 보기 드문 이 아름다운 미덕이 자칫 감정의 불화 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흰 봉투에 거침없이 손을 내밀었다. "흐음, 그럼 내가 갖지 뭐." 흰 봉투와 함께, 양쪽에서 크로스 펀치도 받았다면 역시 세상은 공평한걸까? "그럼 우린 그만 병원 들어가봐야겠다. 여보, 당신두 갈꺼지?" "응. 민재랑 선유는 집에 갈래?" "네, 아무..." "아니, 하진네랑 만나기로 했어요." 아무생각없이 집으로 가려던 선유의 말을 가로채며 민재가 말을 이었다. 놀란 선유가 무 슨 말이냐는 뜻으로 민재를 쳐다보았지만 민재는 개의치 않고 - 그 덕에 고모님 내외와 헤어진 후 정강이를 걷어채였지만 - 재빨리 말했다. "이쪽으로 아홉시까지 나오겠다고 했으니까 조금 기다렸다 만날겁니다." "그래. 너무 늦지 않게 들어오고. 위험한데 가지마." 걱정스런 고모님의 말씀에 선유는 픽- 하고 비웃었다. 고모님, 그 무슨 세상 사람들 황당 하게 하는 말씀이십니까. 위험한데 가지마, 가 아니라 위험한 짓 하지마, 겠죠. 세상이 위험한게 아니라 이 녀석들이 위험한 거라구요. 선유의 그 바람빠지는 소리(-_-;;;)는 민재도 들었지만 역시 개의치 않고 자신의 모친에 게 질문했다. "알았어요. 곧장 병원으로 들어갈꺼예요?" "응. 난 그럴 것 같아. 당신은?" "나도. 오늘 밤은 아무래도 집에 가기 힘들 것 같다. 하하... ^^;;;" 사람좋게 웃으시는 고모부와 고모님께, 선유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보나마나 지금 병원 은 난리도 아닐 것이다. 의사란 직업이 원래 바쁘고 사생활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아 마 욕 먹을 각오 하고 나오신 거겠지. 자식도 아닌 조카를 위해 이렇게 시간을 내 주시 는 고마우신 두 분. 선유는 팔짱을 끼고 들어가시는 두분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기다려 주신분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무척 게으르다보니 하하 그리고 karin님께서 지금 올리고 계신 홈피가 열심히 내부공사중이다 보니 3월달중순 정도 되어야 34편이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혹(眩) - 아찔하다 "아임 드리이밍 오브 더 와잍 크뤼스마아스으~" 12월 23일. 이른바 황금휴가기에 노래방 한구석에서 죽어라 발음 굴려가며 - 노력은 인정 하지만 결코 실력이라 할 수 없는 - 크리스마스 명곡을 뽑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만약 있으시다면, "썩을, 안성혁. 닥쳐." "으아, 소름끼쳐!! 변태!!(...왜? ^^;;)" "젠장, 누가 저 마이크 뺏어!!!" "안성혁, 너 시멘트에 묻어 산에서 굴려버린다!!!" ...등등 친구들의 따스한 격려를 맘껏 받으실 겁니다. 당신에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축복 - 사실 별로 도움은 안 됩니다만 - 이 있기를... ^^* 올해로 들어 2번째. 뭐가 2번째냐 하면, 12월 23일의 피같은 골든타임을 이 녀석들과 함 께 보내는 것이 두번째라는 것이다. - 제대로 읽으신 분이라면 내가 작년에 이 녀석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쇼핑을 했었다는 걸 기억하시겠지요.(누구한테 하는말이냐...?) 각설하고, 작년에 그 고생을 하면서 절대 마녀 하우희와는 연관되지 않겠다고 결심했건 만, 또 어찌어찌하다보니 - 이런걸 흔히 수법에 넘.어.갔.다. 고 말하지만 - 올해도 함 께 보내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번엔 쇼핑이 아니라 단순한 크리스마스 파티랄 까. 멤버는 지성, 건우, 단영, 성혁, - 참고로 방금 전 느끼한 목소리로 '화이트 크리스마 스' 를 부르다 많은 사람들의 비호 아래 구석에 처박힌 놈이 이놈이다 - 우희, 해민. 거 기에 건우의 똘마니들 몇이 합세해 약 열 다섯 정도 되는 대인원이 되어버렸지만, 뭐 크 리스마스 파티는 약간 시끌벅쩍한게 좋겠지. ...웃기고 있네. 시끄러 죽겠다, 젠장. 선유는 한숨을 폭 쉬며 오늘따라 왠지 부르고픈 'home, my sweet home' 을 조그맣게 흥얼 거렸다. 선유의 옆에 앉았기에 유일하게 그 처량한 음색을 들은 해민은 이해가 된다는 듯 난처한 웃음 - 난처하다기보단 즐거워하는 표정이 압도적이었지만 - 을 지어보였다. '이럴 줄 알았음 삼인조 녀석들이랑 집에 있을껄 그랬나...' 얼핏 드는 생각을 누르며 선유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 싸.가.지. 녀석들, 어차피 집 에 있지도 않을 거다. 빌어먹을 녀석들. 젠장할 녀석들. 망할 녀석들. 아마 지금쯤이면 호텔 나이트라도 가서 신나게 놀고 있겠지. '지난번 그 사건' 이후, 삼 인조 녀석들은 놀때만큼은 절.대. 자신을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오늘도 어떻게 하면 자 신을 기분 상하지 않고 최대한 티 안나게 떨구어 놓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녀석들에게 화 가 치밀어올라 안 나오려고 마음먹었던 이 모임에 나와버렸다. 싫다는 사람 붙잡고 늘어 질만큼 노는데 목숨걸지는 않고, 그 녀석들이 내 눈치 보면서 슬금슬금 놀러다니는 것도 보기 싫으니까. 그렇지만 상.당.히. 기분이 나쁘다. 아무튼 나왔으니 즐기기는 해야할 텐데... 분명 1차로 무슨 식당에 들어가 저녁을 먹은 것까지는 썩 마음에 들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정신사나운 곳에서 정신사나운 짓을 하게 되 었는지 모를 일이다. 하긴, 예능계 녀석들에게 조용히 놀라는 것 자체가 무리인건가? ...어떻게 갈수록 시끄러워지냐. 진짜 기관총 난투라도 하고 싶네, 이거. "선우야아!!!!" "왜에!!!" "노래!!! 불러어!!!" "나중에!!!" 옆에 앉은 해민이가 노래 목록이 담긴 책을 건네주면서 고함을 질렀다. 애들이 워낙 시끄 럽다 보니 일상 대화가 단절되는 것이다. 삼인조 녀석들에 대한 오기 때문에 나오긴 했지 만, 확실히 사람은 성격에 안맞는 짓을 하면 안 되는 것 같다. 이렇게 두통이 오는걸. 언제 부활했는지 마이크를 쥔 채로 열심히 떠들어대며 박자를 맞춰 몸을 흔드는 성혁을 과녁삼아 노래방 책을 던지며 선유는 생각했다. 내년에도 이녀석들이랑 보내면 내가 죽 일 놈이닷!! 겨울 저녁은 바람까지 불어 스산했지만 크리스마스 장식 사이로 지나가는 사람들, 연인 들, 가족들은 추위에 아랑곳없이 얼굴이 상기되어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엄밀히 말 해 아직 크리스마스는 아니었지만 거리는 이미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흠뻑 젖어 있었고 나 무에 걸쳐놓은 불빛과 함께 사람들은 흔들리고 있었다. 자정에 가까운 늦은 시간이었지 만 모두 이 화려한 분위기에 심취되어 떠날 줄을 몰랐다. 물론 선화예술고등학교 학생들 로 이루어진 어느 그룹도 마찬가지였다. "오, 이해민. 노래 잘 부르더라?" "그래, 고맙다. 쿡..." "정말 쉴새없이 열리는 조둥아리다. 노래방에서 그렇게 떠들어 대고는 아직도 안 지쳤 냐?" "이정도로 지친다면 섭하지." "그래, 참 위대한 조둥아리다." -_-;;; 선유의 일행은 지하 1층의 노래방 층계를 올라오며 삼삼 오오 떠들어댔다. 큰 방을 하나 빌려 무려 두시간이나 열창했는데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들이었 다. 선유는 자신의 뒤에서 성혁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혀를 찼다. 저 녀석 저러 다 혀에 쥐나는거 아닌지 몰라. 바깥에 나오자 열기에 달아오른 몸의 온도가 금새 낮아졌다. 사람이 꽤 많은지라 의견 통 합이 금새 안 되어 할일없이 계속 노래방 입구에 서 있었는데, 그 사이에 몇 명인가가 인 사를 하며 자리를 뜨고 건우와 지성이도 슬그머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3차는 2차보 다 훨씬 시끄러울 것 같은 불길한 - 그러나 확실한 - 예감에 선유는 그만 집에 갈까 생각 하다가 다시금 떠오른 삼인조 녀석들 생각에 남아있기로 결정했다. 그녀석들이 나랑 안 놀겠다면 나도 안 놀면 되지, 뭐. - 우리는 이런걸 흔히 유아심리라고 부른답니다 - 쑥덕대던 녀석들은 곧 3차 장소를 정했는지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간 거 리를 헤메다 도착한 곳은 클럽, 다른말로는 나이트라고도 하는 저.주.받.을. 장소였다. "이런 젠장, 왜 하고많은 곳 중 클럽이냐, 하필." 선유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혹은 나란히 걸어가던 해민이 선유의 한탄에 돌아보며 물어왔 다. "왜? 클럽 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이유? 이유야 많지. 대한민국의 일꾼이 될 건전한 청소년으로서 절대 출입하지 말아야 할 악의 장소이며, 또한 일생의 영위를 꾀하는 데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쾌락적, 일시적 장소이며..." "아하하, 말도 안돼." 뭔가 마음에 안 들어도 단단히 안 들었는지 얼굴 가득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팍팍 내며 비꼬는 선유의 말에 해민은 웃어버렸다. 정말 언밸런스다, 저 얼굴에 저런 말은. 그 사실 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유는 해민의 웃음소리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같이 웃었다. 하.하.하.하. 도대체 어쩌다가 나이트란 곳이 나와 상극이 되어버렸는지. '지난번 그 사건' 도 있고 말 야. 그것 때문에 삼인조 녀석들에게 이렇게 따(?) 당하기까지 하는데. 참고하자면, 나이트와 자신의 빌어먹을 악연의 첫머리를 장식한 '지난번 그 사건' 이란 자신이 신인미술대전에 입선해 고모님 내외와 레스토랑에 갔던 날 저녁, 삼인조 녀석들 이 축하해 준답시고 데리고 간 클럽에서 일어난 일을 말한다. 술에 취한 것 같아 정신을 차리려고 화장실에 갔다가 어떤 미친놈에게 찝적거림을 당했던 것이다. 게다가 취향이 아 니라고 정중히 거절했더니 - 라고 선유는 생각하고 있지만, 그 정.중.히. 라는 것은 단 지 말투뿐이고 어감이나 표정, 모든 면에서 비웃고 있음을 현저히 드러냈다 - 아예 본성 을 드러내놓고 강간하려 한 것이다. 물론 당할 내가 아니지만 - 누누히 밝힌다. 난 성격 안 좋다 - 당시에는 좀 취했던지라 반응이 느렸는지,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그 녀석 이 내 목을 애무 - 젠장!! 이따위 단어는 쓰고 싶지 않단 말이다!! - 하고 있었다. 그제 서야 반항을 해 녀석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지만 이미 이리저리 긁히고 몇 대 얻어맞아 얼굴은 엉망인데다가 상의의 단추는 몇개는 떨어지고 몇개는 달랑거렸다. 거기까지는 그 래도 좋다. 문제는 녀석을 때려눕히고 간신히 승리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그때 마침 나 를 찾으러 온 율이 녀석과 마주쳐버렸단 말이다. 타이밍도 좋지, 젠장할. 율이 녀석, 한동안 놀래가지고는 엉망이 된 나와 처참한 꼴로 화장실 바닥에 처박혀 있 던 빌어먹을 변태새끼를 번갈아 보더니만,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는 괴성을 지르며 이미 기절해버린 그 변태새끼를 다시한번 밟아대었다. 그 발광에 여자화장실에 있었던 여성들 이 놀라 비명을 지르고 곧 사람들과 함께 민재와 하진이 녀석이 달려왔는데, 내 꼴을 보 자 두 녀석 다 어안이 벙벙해서는 경악이 서린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민재 녀석은 자신 의 웃옷을 걸쳐주며 괜찮냐고 물어왔고 - 당연히 괜찮지, 그럼 저딴 놈에게 내가 당할 것 같냐고 진심어린 반문을 했다 - 하진이 녀석은 무섭도록 표정이 변해 율이와 함께 이 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변태를 자근자근 밟았으니, 불쌍하게도 변태는 본연의 목적도 취 하지 못한 채 3번이나 밟혔다. 아무튼, 이 따위의 추억이 있는 클럽을, 게다가 그날 이후 로 삼인조 녀석들이 '위험하다' 는 이유로 자신을 빼놓고 싸돌아 다니기에 - 사감이 섞 인 단어다. 인정한다 - 더욱 께림찍한 클럽을 마.녀. 하우희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오 자고 했는지. 인간이 마.녀.의 음흉한 속마음을 어찌 알겠냐, 하며 자조하다가 이내 우희 에게 한대 얻어맞은 선유였다. 우희야 선유가 문을 가로막고 서서 자신을 째려보다 한숨 을 쉬니 분위기상 한대 때린것에 불과했지만, 선유는 마.녀.가 이제는 마음속까지 읽는구 나, 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검토했다는 것을 과연 누가 짐작이나 할까. 요즘은 경찰이 워낙 요란을 떨어 나이트에서 청소년 보기가 힘들다던데 - 대학생이라도 생년월일이 '만 19세' 가 되지 않았으면 돌려보낸다고 하니까 - 아무래도 순 거짓말인 것 같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자신의 일행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앞장 선 성혁 이 녀석이 입구에 서 있던 웨이터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자 웨이터는 정중히 인사를 하 며 일행을 테이블로 안내했다. - 나중에 성혁이 녀석에게 물어봤더니 자신의 선배가 이곳 의 지배인 비슷하다고 한다 - 문을 열고 들어간 실내는 눈이 아리도록 번쩍거리는 사이 키 조명으로 현란했다. 그 불빛 아래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 헌팅을 하고 있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홀에 올라가 미친 듯 춤을 추어대고 있었다. 유행하고 있는 가 요가 귀가 멍멍할 정도로 빵빵하게 틀어져 있는 가운데 홀에서 내려오는 사람들, 홀 위 로 올라가는 사람들, 헌팅하는 사람들, 헌팅당하는 사람들, 그 외에 이리저리 오가는 웨 이터들로 상당히 복잡스러웠다. 일단 테이블에 앉은 일행은 성혁이 대충 주문을 하는 것 을 보며 가만히 있었지만, 왠지 자신 이외에는 모두 나름대로 이 자리에 어울리는 것 같 다고 선유는 생각했다. 지성이 있었다면 또 모르지만 - 실상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미지 만큼은 절.대. 안 어울리니까 - 지성이 녀석은 애저녁에 배신을 때리고 어디론가 날라버 렸던 것이다. 인간의 범주로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하우희 마.녀. 가 왜 지성이와 건우를 곱게 보내 주었는지 잠시 궁금해졌지만 워낙 튀는 능력들이 좋았겠거니 하며 생각을 돌렸다. 노래가 바뀌자 성혁이 멀뚱히 앉아있는 얘들을 꼬시기 시작했다. "야, 여기까지 와서 앉아있는 게 말이 되냐. 어서 나가자구." "그래, 나가자." "와, 오랜만에 몸 풀겠다." 왠지... 여론이 모두 함께 나가는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지? 춤이라면 도통 자신이 없는 선유였기에 - 그러나 그 외모로 인해 어설픈 춤실력이 커버된다는 것을, 그리고 몇몇 사 람들은 그 모습에 더욱 몸이 달아오른다는 것을 알리 없는 선유이기도 하다 - 기를 쓰고 피하려 했지만 자신이 언제나 말하는 것처럼 마.녀. 하우희의 레이더망에 인간인 선유가 안 걸릴리가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지성이에게 튀는 능력을 전수받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선유였다. "으... 정신 없군, 정말." 선유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쩔수 없이 무대로 끌려나왔기에 어설 프나마 이리 저리 몸을 흔들고 있었지만 눈은 다른 녀석들을 관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성혁이 녀석이야 원래 잘 노니까 그러려니 했고 마.녀. 하우희는 인간이 아니니까 저렇 게 미친듯이 춤을 춘다지만 해민이와 단영이의 경우는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나마 나 같은 인간의 범주 - 어설픈 - 에 들거라 생각했었는데 왠걸. 남들 못지 않게, 아니 남들 보다 더 눈에 띄게 춤을 추는 것이다. 하긴, 단영이 녀석은 어찌 보면 의외도 아니지. 처 음 보았을때의 초 모범생적 분위기와는 다르게 담배면 담배, 술이면 술, 싸움이면 싸움까 지 선생이 싫어하는 짓은 조목조목 따져가며 다 할 줄 아는 녀석이었던 것이다. - 이런 걸 뒷구멍으로 호박씨 깐다고 말하긴 하지만 - 거기다 춤을 더해봤자 다른 것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다. 그렇지만 확실히 해민이는 의외다. 중성적으로 생기긴 했어도 사실 누구 보다 - 그래봤자 해민이 외 친한 여성이라고는 거의 없어서 비교대상으로 생각난 여자는 하우희 뿐이다 - 순진(?)해서 이런 자리는 처음일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는지 꽤 스무스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거... 나만 어설픈건가? 시골쥐가 처음 서울에 도착했을때 의 느낌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선유는 천천히 몸을 흔들어댔다. 이런게 왜 재미있 다는 걸까? 툭- 잠시 방향을 바꾸는데 뒤의 사람에게 등을 떠다 밀려서, 중심을 잡을 새도 없이 누군가 와 어깨를 세게 부딪쳤다. 그리고 반응은 곧바로 왔다. "씨팔!! 뭐야, 새꺄!!" ...역시라고 해야 하나. 좀 크게 울린 그 목소리의 근원을 따라 힐끗 훑어보니 자칭 남자 답게 생긴, 타칭 깡패답게 생긴 뭉툭한 얼굴 하나가 굵고 짧은 목 위에 얹어져 있다. "미안합니다." 어쨌든 잘못을 따지자면 자신의 불찰이었으므로 선유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 다. 보통 이 정도 순에서 넘어가는데... 그러나 보통 정도로 끝날 사람이라면 애초에 나 이트 무대에서 부딪친걸로 - 사람이 웬만큼 많아야지. 거의 부대낀다고 봐도 된다 - 쌍시 옷을 입에 달지 않았을 거란걸 선유는 간과하고 있었다. 선유의 옆에서 춤추던 해민이 분 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선유에게 물었다. "선유야, 무슨 일이야?" "아, 별거 아니야." 그 말이 거슬렸는지, 아니면 다른 것이 거슬렸는지, 타칭 폭력배인 사내는 눈을 부라리 며 육두문자를 나열했다. "썅, 별 좆같은 새끼들땜에 춤도 못 추겠네... 야, 니들 여자냐, 남자냐? 생긴 꼴하고는 구분도 안 되는 것들이... 씨팔..." ...나 아무래도 나이트랑은 인연이 없나봐. 선유는 한숨을 내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난생 처음 간 클럽에서는 사내새끼한테 강간당할 뻔 하더니, 이번엔 어깨 친걸 로 말꼬리 붙잡고 늘어지는 녀석이다. 도대체 이 무슨 악연인지. "......" 잠시 침묵에 잠겨 자신과 나이트와의 전생(?) 관계를 짚어보던 선유가 비위에 거슬렸는 지 사내는 선유의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얼핏 보아도 약력이 꽤 될것 같은 손아귀. 선유는 가만히 그 손을 쳐다보았다. 상당히 기분이 나쁘다. "놔." 자신이 먼저 잘못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에 지나친 무례를 용서하고픈 마음은 없다. 선유는 얼굴 가득히 비웃음을 머금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어깨를 강하게 잡고 있 는 손을 톡톡 쳐댔다. 선유의 의도와는 다르게 사내는 순간적으로 요염하게 보이는 선유 의 얼굴을 보고 얼굴을 시뻘겋게 달구었지만 선유의 눈에는 열받은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 았다. 사내의 주변에 그와 친분이 있는듯한 험상궂게 생긴 남자들이 몰려들었다. "뭐야? 왠 기집얘같은 녀석이야?" 빠직- 만화체로 표현한다면 자신에게서 이런 소리가 날꺼라 선유는 생각하며 그 말을 되받아 주 었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고운 법. "그렇습니까? 하지만 당신들의 만대에 걸쳐 재수없을 얼굴보다는 낫다고 봅니다. 정말 자 자손손 재수없을 면상이군요. 이거 축하드립니다. 요즘 세상에 어디 흔한 얼굴인가요." "킥-" 어느새 옆에 와있던건지, 우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유의 정중한 말투에 잠시 어리둥절 하던 사내들은 그 의미를 깨닫고는 목까지 피부색을 붉히며 달려들었다. "이... 이자식이!!!" 순식간에 멱살이 잡힌 선유는, 사내를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잠시 옆을 힐끗 보니 자신 의 일행들이 모두 와 있다. 뭐, 좋아. 이 정도면 밀리지는 않겠지. 퍽- 그리고 그대로 사내의 얼굴에 주먹을 내다꽂았다. 그것을 기점으로 나이트의 홀은 사내들 과 선유네들의 난투극으로 엉망이 되기 시작하였다.